그림이 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있다. 남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추측된다. 빛이 없는 걸로 보아 저녁이나 밤일 것이다. 아마 타인은 없는, 그들 커플만이 존재하는 공간일 것이다. 그들은 검정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어 남과 여라는 경계는 사라지고 하나의 형체로 보인다. 그들의 표정을 볼 수 없지만 그림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사랑하는 연인들의 설렘이나 당당함보다 불안을 감춘 격정이 느껴진다. 은밀한 사랑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을유세계문학전집【커플들, 행인들】의 표지는 에드바르트 뭉크의 [키스]다. 표지에서 짐작했어야했다. 【커플들, 행인들】은 불안했던 영혼 뭉크의 그림을 보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거라는 것을.
【커플들, 행인들】은 보토 슈트라우스의 국내 초역 작품이다. 보토 슈트라우스는 독일어권 문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가라고 하는데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이 소설인지 알았다. 다양한 커플들, 행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하나로 모아 스토리로 완성할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 책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였다. 나에게 에세이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고 상대에 상관없이 부담 없이 선물할 수 있는 장르다.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에세이의 개념과도 많이 달랐다.
【커플들, 행인들】에는 [커플들], [차량의 강물], [글], [황혼/여행], [단독자들], [현재에 빠져 사는 바보] 이렇게 6편이 실려 있다. 각기 다른 단편들이고 각 단편에도 여러 이야기들이 뒤엉켜 혼재한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사랑, 그리움(기억), 글 등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다.
카페에 약속시간보다 빨리 도착하면 밖이 내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가 있다. 다정한 커플들도 보이고 무심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행인들도 보인다. 그때의 나는 그들의 관찰자이다. 바쁘게 혹은 느리게 길을 걷다가 카페 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타인의 시선과 마주칠 때가 있다. 나는 때로 타인의 관찰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때론 관찰자가 되어 때론 커플이나 행인이 되어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나 문학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성공한 사람들은 현실의 주인공은 자신이라며 당당하게 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의 무대에서 나는 엑스트라나 단역으로 여겨진다. [커플들], [단독자들]의 사람들처럼 슬픔과 고통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육체에 탐닉하며 사랑을 계산한다. 혼자가 두려운 사람들은 감정을 위장하고 자기를 기만하며 ‘사회적 장치’로서의 관계를 맺으며 이중생활을 한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지만 그들은 ‘단독자’이고 외톨이다. 한때 애인이었던 그녀는 이제 길을 가는 행인일 뿐이다. 사랑의 기억은 잊혀 진다. 인터넷이나 TV 등 매체의 영향으로 세상에는 글과 말이 넘쳐난다. 매체의 글과 말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한다. 자신의 생각을, 기억을 잃어버리고 타인의 말을, 타인의 기억을 내 것처럼 착각하며 산다. 작가는 역사 · 문화 · 사회활동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문학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작가가 독문학과 사회학, 연극학을 공부하고 편집장과 극 평론가, 극작가로 활동해서 그런지 【커플들, 행인들】에서 다루는 내용은 광범위하다. 책의 진도가 잘 나가질 않았다. 내겐 좀 어려운 책이었다.
이 책의 제목은 '커플들, 행인들'이지만, 이 책엔 같은 제목의 글이 없다. 단지 「커플들」이라는 제목의 글이 맨 첫 번째로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수록된 여섯 편의 글(나는 '소설'이나 '에세이'라는 표현 대신 '글'이라는 표현을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이 책은 '에세이집'으로 구분되지만, '소설'로 읽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이 작가로서의 보토 슈트라우스의 사상이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이 책을 전반적으로 관통하는 개념은 '행인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행인'이란 말 그대로 지나가는 사람이다. 우리가 길을 걸어갈 때, 혹은 차를 타고 갈 때 스쳐가는 사람들이 '행인'이다. 즉 나와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 혹은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행인은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맨 앞에 수록된 「커플들」에는 다양한 커플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관계의 불완전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거나, 역으로 사랑을 위해 (일시적으로) 결합한 관계라고 할 수 있을테지만, 그 관계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기에 언젠가 '행인'과 같은 사이가 될 수 있는 불완전한 사이이다.
'사랑'은 보토 슈트라우스가 천착해온 테마 중 하나이고 여기서 파생된 것이 '커플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관계인 '커플들'은 언제고 '행인들'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랑과 행인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도 '행인들'의 개념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가령 「단독자들」에서 지칭하는 '단독자들'은 행인들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현재에 빠져 사는 바보」에서 연대의식에 의거하고 시위하는 사람들을 허위 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행인' 역시 집단이 아닌 단독자로서의 행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단독자=행인'은 보토 슈트라우스 자기 자신, 즉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틀 내에서 이 책에 수록된 여섯 편의 글들을 읽다 보면 보토 슈트라우스의 기본적인 생각이나 사상의 면면을 이해할 수 있다.
독일 문학은 한국에서 꽤나 사랑받았고 현재에도 사랑받고 있다. 귄터 그라스나 마르틴 발저, 페터 한트케나 엘프리데 옐리네크 등은 국내에도 꽤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거기에 비해 보토 슈트라우스는 상대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문체나 사상이 매우 난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작가로 활동하던 초기부터 아도르노나 프로이트,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왔고, 이루에도 롤랑 바르트나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이론을 수용했다고 한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을 관통하는 타자의 문제 역시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책에 국한하여 평가하자면 그의 문체가 그렇게 난해하다거나, 여러 철학 사조의 영향을 받아 내용이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전체주의를 경험한 독일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어떤 식으로 사상사가 전개되었고, 그런 것들이 문학이라는 예술에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볼 수 있는 일례로 눈여겨 볼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케이스라는 생각이 든다.
'나'와 '너'의 관계성에 주목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만들려고 한다. 그 욕망의 궁극에 전체주의가 있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관계'에 대해 성찰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관계의 깨어짐은 부정적으로 인식하지만, 이러한 경험과 반성을 통해 '단독자(들)'에 주목하면서 '행인(들)'이라는 개념으로 '타자(들)'에 주목했다고 생각한다면, 보토 슈트라우스의 글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토 슈트라우스는 독일의 우디 알렌이다. 적어도 이 책《커플들, 행인들》에서 체감한 저자의 취향은 지적인 풍자와 현실문명에 대한 회의주의 그리고 소시민적 삶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우디 알렌과 닮은 모습을 보인다. 겉으로 느껴지는 우디 알렌식 심상을 좀더 파헤쳐보면 이 책이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에 대한 독일식 오마주임을 알게 된다. '현대인의 사랑과 성'이라는 주제를 놓고 설하는 슈트라우스의 언어는 이른바 '타자윤리학'의 언어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자기계발서나 사랑의 카운셀러에 흔히 보이는 프로이트식의 정신분석학적 언어가 보이지 않는 점이 특색이다. 슈트라우스의 문학세계는 전통의 보존, 신화적 세계, 타자에 대한 회상과 창발성의 경험 등으로 요약된다고 한다. 역자 정항균은 '성스러움의 시학' 운운하지만 이 책과는 거리가 먼 얘기고, 오히려 '세속성의 철학'에 가깝다.
《커플들, 행인들》은 총 6편의 에세이를 싣고 있다. 〈커플들〉,〈차량의 강물〉,<글>,〈황혼/여명〉,〈단독자들〉,<현재에 빠져 사는 바보>의 순이다. 주제면에서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으니 그 가운데 몇 편을 얘기해보자.〈커플들〉은 여러대의 카메라로 다양한 커플들의 모습들을 옴니버스식으로 조명한다. 좀더 세부적으로 살핀다면, 저자는 도구적 이성으로 왜곡된 남녀간의 사랑을 비유한 '사랑의 냉기', 정체성을 상실한 도회적 소시민을 비유한 '행인들'과 '얼굴을 소멸시키는 힘들', 그리고 성애를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점점 더 독립적인 삶을 살지만, 전체적으로는 점점 더 의존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삶에서 운명적인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마음이 주는 달콤한 기만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우리는 그러한 감정을 점점 더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외적인 목적을 따를 필요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양면성을 띠고 있는 가장 내면적인 감정이 더욱 노골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남녀를 맺어 주는 언어는 오직 감정에만 의존할 뿐, 이제 더 이상 어떤 공통적인 사회의 운명을 짊어질 필요가 없다. 긍정과 부정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이 언어의 본질적인 핵심은 바로 사랑의 냉기이다.」(16-17쪽)
성애에 대한 단상은 에로티시즘의 고전인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에서 절정을 맞이하는데 이 영화를 사랑의 시간에 대한 승리로 해석한 점이 독특하다. 슈트라우스는 사랑의 진정성이라는 보수적 견해를 견지하는 것 같다. 그에게 진실한 사랑이란 일상적 세계를 벗어나 신화적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일지도 모른다.
<현재에 빠져 사는 바보>의 주제가 〈커플들〉에서는 현재형 인간에 대한 비판과 회상에 대한 찬미로 중복되어 나타난다.
「전적으로 현재형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불만족스러운 일인가! 열정, 즉 삶 자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예견보다는)회상이다. 삶이 힘을 비축하는 곳은 이미 지나간 왕국들인 역사적 기억 속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디서 그 힘을 끌어낸단 말인가? 역사의 뿌리는 조각조각 잘려 나가고, 그 뿌리가 있던 장소에 피상적인 사회적 네트워크가 들어섰다. 통시적인 것, 수직적 구조는 허공에 떠 있을 뿐이다. 」(27쪽)
'얼굴'을 상실한 행인들의 테마는〈차량의 강물〉에서 계속된다. 여기서 저자는 현대판 유목민의 감정상태와 우연과 조우한 마술적 사건들을 수다스럽게 들려준다. 자동차 안에서 우연히 바라본 옛 애인은 낯선 행인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자동차 안과 밖은 절연되어 있다. 적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그런 차단막이 가리워져 있다. 그런 점에서 자동차 안은 행인들을 관찰하기에 적절한 장소가 된다. 슈트라우스는 마치 커다란 원거리 망원경으로 거리의 행인들과 시위자들의 우스운 작태를 구경하듯 이야기한다. 그리고 미사여구나 관용구, 감탄사 같은 언어의 상투화 현상에 대해 얼치기 언어학자처럼 강의한다.
반면에 <글>은 언어와 텍스트에 대한 저자의 '현상학적' 견해를 깊이 있게 보여준다. 다만 언어와 텍스트는 서로 혼용된다. 가령「우리는 언어 속에 있음으로써 심층의 고향과 망명지를 얻게 된다.」는 말은 텍스트를 접하는 독자들의 내면적 체험을 압축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잡힐 듯 잡힐 듯, 보일 듯 말듯 작가의 눈을 통해 비춰지는 이야기 속의 연결고리를 찾기가 쉬지 않았다. 일단 형식적인 면에서 선형적인 글쓰기 방식에서 벗어나(그것도 좀 심하게) 있어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글에 몰입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읽고 있으면서도 내가 읽고 있지 않다고 느낀다고 말해야하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얻은 생각이나 느낌을 일정한 형식이나 내용에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한 산문 문학’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수필의 정의이다. 이 글 장르상 수필, 에세이로 분류되어 있다고 쉽게 읽으려고 했다면 큰 오산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들에 마치 내가 찔린 것처럼 조금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보토 슈트라우스에 관한 정보나 그의 다른 글, 이 글에 대한 지식도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논문으로 게재된 ‘정향균’의 해석에 의지할 수밖에) 그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조차 내가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모르는 상태이다. 그래도 몇 가지 정리는 해봐야겠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인간의 내면.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속한 사회를 생각해봐야 한다. 동독과 서독의 통일이 문학에 준 여러 영향들 또한 파악해야한다. 진공 상태에 빠진 독일 사회의 치유책으로 보토 슈트라우스는 즉 그가 말하는 불확실성, 불완전성, 뿌리의 상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제시한 치유책으로 정신적 태도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즉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현대 사회에 의해 억압되고 눌린 것들을 겉으로 보기에는 소멸된 것처럼 보이는 가치를 기억 속으로 불러와 그것에 시선을 돌릴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깊이 파묻힌 정신적 힘을 다시 획득하기 위해 ‘회상’을 보존하는 일을 작가의 의무라 말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독자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의 이런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술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그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작가는 오히려 이와는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내게 있어 문학은 독자와 작가와의 단절 상태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적어도 자신의 작품에 독자가 기웃거릴 수 잇을 정도의 틈은 열어 놓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그와 그의 작품을 논하는 것도 전부 폭넓게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편견이 될까 두렵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