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코너를 뒤적이다 최신 번역으로 나온 듯 하여 사 읽었음.
역시 고전도 최신 번역으로 읽어야 매끄럽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 했다.
매끄럽게 읽히니 생각도 매끄럽게 흘러 헤세는 참으로 꼰대스럽구나 라는 확!실한! 결론 또한 얻었지 말이다.
헤세가 이 책을 쓴 나이가 50 이다.
50이 넘어서도 이 양반은 어찌 여자를 묘사함에 딱 3가지 유형(완벽한 가이아 스러운 어머니, 척척박사의 팜므파탈, 날 잡슈쇼 스타일의 모르쇠 수동적 남성 맞춤형 여성상) 을 벗어나지 못하는지, 세상 이리 밋밋하고도 존재 불가능한 여상상을 고집할 수 있는지 세상 오래 산다고 혜안이 저절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라 하겠다. 말년의 걸작이라고 하는 유리알 유희를 읽는 중인데.... 더 이상 말을 말 지어다.
나는 소설을 읽고 싶지 헤세의 이상형 대잔치를 읽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말이다.
근데 비단 이것이 헤세의 글 만의 문제는 아니고 소위 말하는 고전이라는 작품들 속 여성상 들 중 많은 수가 위에 언급한 여상상 안에서 그려지는 걸 보면 자라면서 고전만 주구장창 읽어대는 남성 동지들에게 슬그머니 연민의 감정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저런 텍스들만 읽다 테스나 제인에어를 읽으면 얼마나 충격일 꼬... ...
그러다가 세상에 나와 진짜 여성동지들을 만나면 얼마나 더! 쇼크일까... ...
이래서 세상을 책으로 배우는 건 위험하다는 거다.
아! 이 문장은, 내가 남말 할 처지가 아닌데... ...
정말 입체적이고 쌔끈한(이건 선악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매력적인(개인적으로 매력적인 악인을 더욱 선호 하는 편이긴 하다) 여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읽고 싶고나.
같은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하면 처음에 내가 고전을 파보겠네 했던 처음 읽었을 때의 마음 가짐은 온데간데 없고 다른 여러 면으로 책을 요모조모 따지게 되는데, 나의 경우 고전을 다시 읽으면 좋은 말로 하면 비판적 읽기요 쉬운 말로 하면 뒷 담화 까기 스킬이 마구마구 발동 하는 걸 느낀다.
앞서 이야기한 헤세가 그려내는 한결 같은 여상상에 대한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그리고 세상이 변해도 변치 않는 것이 있으니 바로 세대갈등도 그 중 하나인데, 황야의 이리에도 1차 세계대전 직 후 바이마르 공화국 내의 세대 갈등을 엿 볼 수 있다.
내겐 교수- 하리- 파블로 이 세명의 대화를 지켜 보는 것이 이번 재독의 묘한 재미였다.
하리에게 교수는 전쟁광의 국수주의자 꼰대로 보였을 것이고, 파블로는 자유로운 영혼의 (저 근본 없는 나라)미국 재즈에나 흠뻑 빠진 덜 떨어진 생각 없는 젊은이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리가 뒤로 갈 수록 파블로와의 화해를 위해 노력 하는 모습들이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이건 (내 기준)꼰대 하리의 나는 이 정도로 너거를 이해 하기 위해 노력하는 진보적 식자층입네 하면서 용쓰는 걸로 보여 아주 재미난 관전 포인트로 읽었다 하겠다.
그리고 여기서 잊지 말 것! 황야의 이리를 많은 사람들이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면서 이리 하리를 헤세로 보는데 이견이 없다.
그리고 말이다. 하리는 분명 파블로를 여러 면에서 질투 하고 있었다. 하하.
그리고 이제 나도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거 같다.
아직은 정말 가끔이지만 나도 젊음이 부럽고 질투 날 때가 있고 이 감정이 당황스럽고 인정하기 싫을 때가 있다.
책의 초입에 하리가 다락방 어스름한 불 빛 아래서 괴테를 읽는 장면이 나온다.
책의 제목이 안 나오는데 읽다 보면 아마도 그 책은 '파우스트' 였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여러모로 파우스트에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인데, 헤르미네를 파우스트의 메피스토로 치환을 해서 보기 시작하면 더욱 이런 확신을 가지기에 충분 할 테다.
파우스트에서 나와 헤세식의 자기 성찰로 이르는 길의 여정으로도 읽힐 정도로 내게 황야의 이리는 파우스트의 흔적을 여러방면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이 책을 퍽이나 좋아 하는 포인트가 딱 한가지가 있는데. 이리 하리를 보면서 이 세기나 저 세기에나 어디에서나 '반골'의 기질을 지닌 사람들은 늘 존재 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해서 나타 날 꺼란 확신을 가지게 해 주었다는 점이다.
반골들아 너무 외로워 하지 말자.
어디에건 우리는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존재 할 게다. 화이팅들 하시라.
덧말.
책에는 하리의 한량 같은 생활이 유지되는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을 해준다.
이 양반이 투자를 잘 해서 은행 예금이 넉넉해서 이자를 받아 생활한다는 이유가 나온다.
역시 사람이 돈이 있어야 여유도 생기고, 허세도 부릴 수 있는거다.
난 지금 피터린치의 월가의 영웅을 읽는 중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초상화 속의 괴테와 교수에게 작별을 고하고 현관 옷걸이에서 내 물건들을 챙겨 들고 얼른 집에서 나왔다. 내 영혼 속에서는 심술궂은 이리가 기뻐하며 큰 소리로 울부짖었고, 두 하리 사이에 격렬한 연극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나는 저 즐겁지 않은 저녁 시간이 모욕을 당한 교수보다는 내게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기 때문이다. 교수에게는 그것이 실망, 작은 불쾌감 정도를 의미하겠지만, 내게는 최종적인 실패와 도주, 시민적이고 도덕적이고 학문적인 세계와의 작별, 황야의 이리의 완승을 의미했다.
--- p.122
헤르미네의 왼 젖가슴 아래에는 새로 생겨난 동그란 얼룩이 하나 보였는데 거무스름한 그 자국은 파블로가 곱게 빛나는 이빨로 물어 놓은 사랑의 상처였다. 나는 그 얼룩이 있는 곳을 주머니칼로 날이 쑥 들어갈 정도로 깊게 찔렀다. 헤르미네의 희고 부드러운 피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만약 모든 상황이 약간만 달랐더라면, 모든 것이 조금만 다르게 진행되었더라면, 나는 키스를 하면서 그 피를 핥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하고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두 눈을 뜨는 것을 지켜보았다.
--- p.311
헤세는 내게 읽지도 않고 친숙한 작가다..학창시절 수레바퀴아래서,데미안 등을 축약본으로 접해 익히 작품을 알기 때문이다. "황야의 이리"는 그에 비해 덜 알려진 낯설고 신선한 소설이다.
그러나 가장 자신의 영혼과 철학을 진솔하게 풀어낸 헤세의 자전적 이야기로 읽힌다.
그 어떤 작품보다 난 이소설이 좋다..휙휙 책장은 잘 넘어가지 않고 다시 돌아와서 읽어보고 꼽씹어 읽어봐야 하지만 쉰살의 헤세의 생각을 느낄수 있고 많은 부분을 공감할 수 있었다.
서문격에 해당하는 하리할러를 회상하는 나(편집자)의 수기부터 눈을 뗄수 없을 만큼 재미있었다..하리할러,황야의 이리'라고 불리는 한 남자의 수기를 읽기 전에 나의 그에 관한 소개글이다..
p.35 할러 씨는 두 시대 사이 끼여있는 사람, 모든 안온함과 순수함을 잃어버린 사람, 인간 삶의 모든 의문을 개인적인 고통과 지옥의 형태로 더욱 강렬하게 체험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한때 지성인이었던 하리 할러는 이혼 후 시골에 처박혀 극심한 우울과 고독, 인간세계에 관한 또한 다원적인 자신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느끼고 있다.왜 이소설이 '히피들의 바이블'인지 알겠다.
우리는 자신의 천박하고 어리석고 한없이 황폐한 실존에 대한 진실을 목도하지 않은채 꾸역꾸역 어쩔 수 없이 기계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하리의 수기에서 알 수있는 것은 하리의 목표는" 더 차원 높은 인간에 관한 것, 인간 되기라는 긴 여정의 마지막 목표에 관한 것, 존엄한 인간에 관한 것이다. "(p.95) 이 아닐까 싶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하리가 한 교수 내외의 집에 초대받아 두 하리(인간하리와 이리 하리)사이에 격렬한 연극이 벌어지고 결국 황야의 이리의 완승으로 끝난 일화다
p.122 교수에게는 그것이 실망, 작은 불쾌감 정도를 의미하겠지만, 내게는 최종적인 실패와 도주, 시민적이고 도덕적이고 학문적인 세계와의 작별, 황야의 이리의 완승을 의미했다.
교수의 가식적인 모습을 맞닥드리고 자신의 이전세계, 고향, 학문 및 도덕의 세계와 결별하는 하리, 모욕적이고 불쾌하게 하루를 보내고 하리는 이 소극의 막을 내리기 위해 자살을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