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날짜와 몰아치는 과제들때문에 정독하지 못 하고 다급하게 읽은 것이 안타깝다.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면 다시 읽어야지.
내가 죄와 벌을 펴들면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소냐를 통한 구원'장면이었기에,
상편에서 그리고 하편 6부가 끝나갈 때까지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소냐의 엄청난 활약까지는 없어서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에필로그. 에필로그가 정말 두 권으로 나눠 진 이 긴 소설의 백미이자 궁극적 목적이라고 해도 무방한 것 같다.
사실 소냐에 의한 라스콜니코프의 구원 장면은 정말 담담하게 그려졌지만 그 몇 페이지를 읽는 짧은 순간동안에 나는 소름이 쫙 올랐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소름 돋았는지 나조차도 이해안가지만 정말로 그랬다.
금요일 수업이 끝나면 일 분이라도 빨리 기숙사를 떠나던 나를 붙잡았던 에필로그.
나의 이 희열을 같이 나누면서 해소할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게 너무 슬펐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가장 흥미가 갔던 인물은 로쟈도 아니고, 소냐도 아니고, 스비드리가일로프였다.
상권에서 몇 번 언급되면서 회생 불가한 완전히 막돼먹은 인물이구만 인식이 확고이 심어져있었는데,
웬걸,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상권과 하권을 나눠놓더니 흥미로운 모습을 잔뜩 보여준다.
물론 하권에서도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아직 못된 인물로 그려졌지만
라스콜니코프보다 먼저, 그리고 두냐에 의한 구원이 아닌 두냐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통해 스스로 구원받는다.
그리고 그 구원의 과정이 매우 눈길을 끈다.
이 을유문화사 버전은 뒷 부분에 작품 해설이 담겨있는데 그 해설부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구원의 과정이 매우 깊이 있게 다뤄져 있어서 좋았다.
자신의 방으로 두냐를 데리고 가서 문을 잠근 것은 실제로는 두냐가 아닌 스비드리가일로프 자신을 감금한 것이며,
저항하는 두냐와 총을 던져버리고 눈물 흘리는 두냐를 보면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애욕이 아닌 동정심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이전의 나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지위를 박탈당한 것으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권총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더라. 그리고 그 마지막 날까지로 가는 중에 일어나는 일들도
뭐라 해야하지... 내 표현력이 너무 짧다... 하여튼 저절로 넋놓고 집중하게 되더라.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다쓰다보면 얼마나 길어질지 감도 안 온다.
라스콜니코프의 비범한 사람에 관한 논문, 루쥔같은 인물의 특징이나 그런 것들 다 말하고 싶은데 도저히 어떻게 정리가 안 된다.
기약없는 다음으로 미뤄야지.
그는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두 여인이 그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도 못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바지에 이를 데까지 호기를 부린 것이었다. 이런 확신을 북돋워 준 것은 허영심과 함께, 오히려 자만심이라고 부르는 게 더 옳을 자신감이었다. 53
자만심에 가까운 자신감, 돈이 권력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며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자신의 약혼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마땅히 자신에게 바쳐야 하는 절대적인 충성을 기대하고 있다. 절대적인 충성의 힘이 돈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었던 그. 돈이 갖는 일정 부분의 절대적 힘, 돈으로 사람을 지배하고 마음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그와 같은 사람.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사랑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은 온갖 수단과 노력을 통해서 번 자신의 돈이었다. 돈은 그를 그보다 높이 있는 모든 것과 대등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53
돈이 대등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발상. 이러한 천박한 발상이 가능했던 것은 애초부터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는 돈이 자존감을 형성하는 기초였기 때문이다. 그는 애초부터 돈과 자신의 존재를 결부시키는 게임을 시작했다. 존재의 확인이 돈으로 가능하다는 이런 인식은 단순히 저열한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보통의 삶에 익숙한 것이라고 하는게 더 적합하다. 돈과 나 자신을 결합시키는 인간의 기괴한 상상력. 돈과 자존감이 하나가 되는 기묘한 합체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러한 창조적인 상상은 그 자체로 무서울뿐더러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가 마주친 것을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근심에 잠겨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길이었다. 기기엔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증오는 환영처럼 사라졌다. 그것을 증오가 아니었다. 그는 한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잘못 받아들인 것이다. 그건 다만 그 순간이 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230,1
자기 감정을 직면해야 할 때, 되도록, 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던 어떤 상황을 마주해야 할 때 보통 그러한 불안과 불쾌감을 상황이나 상대방에게 넘기고 싶어진다. 라스콜니노프는 살인했다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용서를 구하고 싶었으나 동시에 그러한 죄를 인정할 때 나타날 일들에 대한 공포감도 가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느껴지는 당연한 공포감 말이다.
죄와 벌은 폭력성이 정당화되는 이념과 그러한 기괴한 이념을 만들어낸 가난이라는 극단적 상황, 그리고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한 개인의 분열적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 내고 있다. 대학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라스콜니노프가 벽에 부딪힌 현실을 타개할 방법으로 고안해낸 것은 나폴레옹과 같이 대량 살상을 합리화할 수 있는 광기의 이념이었다. 허나 그 이념을 실행한 후에 찾아오는 괴로움은 자아를 분열시키고 이전 보다 더 비참한 상황에 처하도록 그를 이끈다. 이런 상황에서 구원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 지식인인 주인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불행한 처지의 여인인 소냐는 로쟈(라스콜니노프)를 구원한다. 가족의 막연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몸을 파는 일을 하고 있지만, 영혼만큼은 악에 내어주지 않은 소냐를 통해 로쟈는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있었음을 자각하게 되고,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어떤 희망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2권은 1권과 달리 본격적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각기 다른 성격과 가치관으로 인한 갈등이 극에 이르게 된다. 1권이 개인의 심리적 미시사를 다룬다면 2권은 로쟈를 중심으로 거미망처럼 연결된 이들의 이야기가 전개 된다.
소냐와 로쟈의 관계는 내게는 퍽 인상깊게 기억되는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상기시켰다. 일과 가정 모두에서 실패한 후 술에 취한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시나리오 작가와 길거리 여인 간의 만남과 사랑을 다뤘던 이 영화의 모티브가 어쩌면 죄와 벌에서 오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식인과 도덕적인 오욕을 안고 살아가는 몸파는 여인과의 만남을 다룬 이 영화 역시 여자는 구원이고 막연한 희망이다. 물론, 죄와 벌처럼 희망적인 결말로 치닫지는 않는다. 남자 주인공 벤은 세라와의 마지막 섹스를 하며 술에 취한채 죽음을 맞는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최악의 변두리에 사는 두 사람의 사랑을 슬프게 결말짓는다. 그럼에도 그것이 슬프지 않은 까닭은 그 안에 실존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다. 서로의 처지를 연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의연함이 이 영화의 강렬한 주제의식인 반면에 죄와 벌은 신앙적 메시지를 중심에 둔다. 로쟈의 구원은 소냐가 상징하는 영혼의 순결,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인한다.
죄와 벌,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모두 소외된 이들의 삶을 세밀히 묘사한 수작이다. 어느 쪽으로의 선택이 진정한 구원일까를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로쟈와 소냐의 구원이 벤과 세라의 구원보다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비슷한 설정, 다른 결말을 찬찬히 보면서 자신은 어떤 결말에 이르기를 원하는지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