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뫼르소는 끝내 사형 선고를 받는다. 끔찍한 단두대를 연상할 정도로 죽음의 목전에 이른 그는 감옥 안에서 자신의 최후를 머릿속에 그린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습관은 감옥 생활에서 기인한다. 감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하다. 활동 반경도 제한적이다. 자유가 엄격히 제한된 곳에서 그나마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만큼 자유로운 일은 없다. 엎어지면 코 닿은 비좁은 감옥이지만 생각의 나래를 펴면 반나절을 움직일 수 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칠 사소한 사물도 감옥 생활 안에서는 현미경으로 바라보듯 아주 촘촘히 생각해 낼 수 있다. 그래야만 감옥 생활을 버틸 수 있다.
뫼르소의 사형 선고는 억울한 면이 많다.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방인이기에 법정에서의 판정도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가 어울렸던 이들 모두 이방인이다. 실질적인 외국인이다. 프랑스 국적으로 살아가지만 옛 식민지 알제리가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파리지앵이 될 수 없었다. 피부색으로 억양으로 살아가는 방식으로 차별을 받아야 하는 이방인들은 결국 자신의 생사를 결정지을 법정에서도 소외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그는 알았다. 결국 항소를 포기하고 만다.
저자 알베르 카뮈도 알제리 출신의 이방인이었다. 그도 프랑스에서 살면서 뫼르소와 같은 소외를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법정에서 검사는 온갖 이유를 들이대며 뫼르소의 살인을 극악무도한 범죄로 몰아세운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의 죽음까지도 그의 성품과 행동에서 기인했다고 둘러댄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마치 가난한 사람들은 못 배운 사람들이라는 등식으로 연결 지어 그들의 행동마저도 불순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없지 않다. 이방인이라고 모두 범죄 유발자가 아닐진대 본토 프랑스의 가진 자들은 그들을 악의 축이라는 편견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나 싶다.
출신지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나의 행동을 보고 사람 전체를 평가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오늘날 이방인은 소외받는 자들이 아닐까. 가난한 자, 병든 자, 실직자, 외국인 노동자, 독거노인, 힘 약한 어린이와 여자들. 이방인을 품는 사회적 분위기, 법 앞에는 누구나 소명 기회를 평등하게 가질 수 있는 법 체계가 정의가 구현된 사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수많은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부조리한 삶의 편린들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매일매일 돌아가는 삶이 쳇바퀴처럼 느껴지고 그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겁게 느껴지거나 늘 해야 하는 일들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면 깊은 고독감에 빠져든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어지거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버리거나 나만 홀로 증발해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따라온다. 오래전 십 대 때부터 종종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럴 때면 밤에 잠을 잘 못 이루지만 어김없이 해는 떠올랐다. 날이 밝으면 늘 하던 대로 몸을 움직였고, 삶은 계속 굴러갔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고 썼다. 지독하게 귀찮고 힘겨운 삶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을 품고 여러 책들을 파고들기도 했다. 책에는 저마다 삶에 대한 관점이 담겨 있어서 때론 내 마음을 위로해 주기도 하고, 없던 기운을 샘솟게 하기도 했다. 어떤 책은 읽으면서 내가 이해받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땐 세상이 살만하게 느껴졌다.
카뮈가 남긴 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방인》에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뫼르소라는 젊은 남성이 등장한다. 소설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p.9)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시작하자마자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는데, 의아한 건 그에게서 슬픔을 비롯해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뫼르소는 사무적으로 장례 절차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한 여성을 만나 연애를 하고, 다소 무료하면서도 긴장감 있는 일상을 살아간다. 마치 아무 욕망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애인이 결혼하자고 하자 뫼르소는 아무 동요도 없이 승낙한다. 파리로 전근을 가볼 생각이 없냐는 사장의 말에 뫼르소는 인생에 어떤 변화도 추구하지 않는 인생관에 대해 말한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딱히 없는 그는 무채색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러다 뫼르소는 친구들과 놀러 간 휴양소에서 한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다. 어떠한 이유도 없이, 후에 그저 “햇빛 때문이었다”(p.124)라고 설명하는 살인을 저지른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절반이고, 나머지는 법정과 감옥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법정에선 뫼르소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취조와 증언, 변호가 오간다. 검사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과 그 후의 일상에서 아무 동요 없이 지내던 모습을 밝혀내고, 배심원에게 뫼르소는 불효막심한 사이코패스 같은 비정한 사람이 된다. 법과 도덕의 잣대 아래 그의 삶과 행동이 이해될 가능성은 점점 영으로 수렴한다. 뫼르소의 말처럼 “내 의견은 듣지도 않은 채 내 운명이 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p.118)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 비로소 감옥에서 “평온을 되찾”(p.144)는다. 절망하기보다 오히려 행복감을 느낀다. “나도 모든 걸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 (…)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다. 세상이 나와 아주 닮았음을, 결국 형제 같음을 경험함으로써 나는 내가 행복했었음을, 그리고 여전히 행복함을 느꼈다.”(p.145) 대체 이 아이러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쩌면 뫼르소는 이해될 수 없는 세상처럼, 자신도 이해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일찍이 눈치챈 것일까. 그러니 자신의 운명은 당연한 것이고, 죽음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일까. 햇빛 때문에 누군가를 죽였다는 것이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 없지만 자신에게는 자연스러웠듯이 사형집행일에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 또한 온전히 이해되지 않지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뫼르소는 어떻게 부서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에 갇혀 있지 않아 '이방인'이 되어 버린 뫼르소
뫼르소 입장에서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 전체가 '이방인'
뫼르소는 말한다.
사형을 당해도 죽고, 사면을 받아도 몇십 년 뒤에 죽는 것은 똑같은데
사형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고, 지금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사면을 받는다고 해서 기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항상 두려움 가득한 내일이지만 결국 그 내일도 오늘이 되고 과거로 남는다.
쌓여진 과거는 추억이 되고,
켜켜이 쌓인 추억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즐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