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짧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큰 기대를 했다가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실망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절경을 기대하고 찾아간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가 그랬고(큰 산불 이후 잘 정비된 인공적인 모습이 역으로 아쉬움으로 남았다), 전국에서 유명한 짬봉 맛집이라 찾아간 중식당도 그랬다(굳이 상호명을 밝히지 않겠지만 흔한 동네 맛집 짬봉보다 면의 찰기도, 국물의 깊이도 없었다). 그 외 좋은 리뷰평만 믿고 찾아갔던 전주 한옥마을의 게스트하우스, 관객 수만 보고 관람한 영화 등 그동안 큰 기대를 했다가 실망한 것들이 많은데 이번 독서도 아쉽지만 큰 기대를 했다가 실망을 안긴 책이 되었다.
이번에 아쉬움을 남긴 책은 아무튼 시리즈에서 28번째로 나온 정혜윤 작가의 <아무튼, 메모>이다. 아무튼 시리즈는 취향, 사물, 취미 등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소위 한 분야의 덕후들이 쓴 에세이로 작은 판형에 휴대성도 좋고 소소한 재미를 주던 시리즈였기에 이번에도 큰 기대를 안고 책을 펼쳤다. 첫 장은 메모의 중요성을 재미있는 일화를 통해 담아내서 다음장에 대한 기대를 한껏 올렸으나 책장을 넘길수록 기대했던 메모의 방법이나 메모를 통해 경험했던(첫 장처럼) 재미있는 에피소드보다는 저자가 팟케스트 출연을 위해 준비했던 메모나 글을 쓰고 싶어 모아두었던 메모 속 문장들과 연계한 이야기, 메모주의자가 된 이유 등을 위트 보다는 조금은 진중한 문장들로 풀어나간다.
책장을 넘길수록 문장은 머리에서 겉돌고 책장을 쉽게 넘기기가 쉽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동안 읽었던 아무튼 시리즈의 전개와는 다른 서술 방식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아무튼 시리즈가 자기계발서는 아니지만 소위 말하는 덕후들의 자기 취향을 애정있게 담아낸 에세이이기에 이번 독서를 통해 저자의 메모 노하우 등을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감도 있었지만 책은 저자만의 메모 노하우 등 실용적인 정보보다는 저자가 메모주의자가 된 이유나 메모의 중요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고 위트보다는(물론 위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진중한 문장들로 채워져 있어 기대와는 다른 독서였다.
물론 기대에는 조금 미치지 못한 독서였지만, 저자가 열심히 메모하게 된 생각(메모)들을 읽다보면 책상 위 연필을 찾아 메모를 하고 싶어 질 수 도 있다.
ㆍ나의 내일은 오늘 내가 무엇을 읽고 기억하려고 했느냐에 달려 있다.
ㆍ내가 밤에 한 메모,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ㆍ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나의 메모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 35쪽
이 외에도 "메모에 관한 열 가지 믿음"이나 "메모는 나를 속인 적이 없다" 등의 장에서 메모의 중요성에 공감하게 되는데, 책장을 넘기다보면 코끝을 흐리게 하는 문장도 만나게 된다. 바로 저자가 세월호 유족에 선물 받은 달력으로(저자는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라디오 피디다), 달력에는 국가기념일이나 공휴일이 아니라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아이들, 선생님들, 김관홍 잠수사의 생일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몇 개만 옮겨본다.
ㆍ7월 1일. 조향사가 되어 첫 번째 향수는 언니를 위해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해맑게 잘 웃는 배향매
ㆍ7월 4일. 우리 애기들 살려야 해요. 마지막까지 학생들 생각을 먼저 한 전수영 선생님
ㆍ7월 25일. 아버지께 물려받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카메라 감독을 꿈꾸는 한고운
ㆍ8월 25일. 모든 생명이 아프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수의학과에 가고 싶은 장혜원
ㆍ11월 25일. 소리가 들리지 않는 분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들려주는 수화 통역사를 꿈꾸는 조서우
ㆍ12월 4일. 언제나 전교 1등, 사회의 잘못을 가려내고 약자들을 보호하는 판사를 꿈꾸는 박성빈 - 75쪽 ~ 77쪽
<아무튼, 메모>는 독서 전 기대했던 내용과는 달라서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메모의 중요성과 필요성에는 공감하게 된다. 단, 실용적인 정보를 원한다면 이 책은 맞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번 독서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아서 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나중에 재독을 통해 이번 독서 때 느끼지 못한 책의 감흥을 좀 더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끝으로, <아무튼, 메모>를 읽다가 마음에 와닿아 노트에 메모해 둔 문장으로 오늘의 리뷰를 마무리 한다.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메모는 'ㅁ(네모)'이다
<아무튼, 메모>를 읽고
"메모 남겨 드릴까요?" 같은 사무실에 동료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를 찾는 전화가 걸려오면 으레 하는 말이다. 전화를 받는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이, 전화를 건 사람에게는 중요한 일이 메모지에 남겨진다. 그렇다. 메모는 '일'이다. 일하는 직장생활자로서 날마다 출근하면 컴퓨터를 켜고 (어떤 날은 카톡 메신저 혹은 예스블로그를 가장 먼저 열 때도 있지만) 메모장부터 연다. 퇴근 전까지 수시로 업무 관련 내용을 일지처럼 기록하기 위해서다. 아주 가끔 메모들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살고, 아니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단어를 읽지만 그 단어를 살아낸다."
-보르헤스
"아주 좋은 생각(이야기)이에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이 휘발되지 않도록 어딘가에 단단히 붙들어 매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야기에 홀려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 메모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아무튼, 메모>를 쓴 정혜윤 피디는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풍경이 아름다우면 카메라를 꺼내는데 자신은 이미 풍경 속으로 들어가 있기에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마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히말라야에서 찾아낸 전설의 사진 작가가 눈표범을 보고도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고 오롯이 그 순간 속에 머물렀던 것처럼 말이다.
"아침볕이 흐릿하게 사라질 때 해변을 걸으며 상상하는 것이 진실"
-휘트먼
저자 역시 좋은 이야기를 마주할 때면 어디든 메모해둘걸 하는 후회를 한다. 곧이어 상실의 고통이 시작되지만 그는 싫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즐기며 자신의 하루를 심문한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어디가 어떻게 왜 좋았는지를 복기하면서 마침내 이야기와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예전에 스스로를 문장 수집가로 부르며 자기만의 인생을 담아놓을 가치가 있는 문장들만을 쫓았던 그가 현재는 듣는 자이자 이야기 채집가로 살면서 최고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전달하기 위해 메모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메모는 관능적인 일이기도 하다. 내 몸에 좋은 이야기를 붙이고 그 이야기에 몸과 마음이 섞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메모는 좋은 쪽과 한편이 되어 치르는 모험 이야기이기도 하고, 하나씩 하나씩 답을 찾고 그 작은 답을 모아 새로운 삶의 이야기를 만들려는 사랑스러운 흔적이기도 하다. 메모는 자기 생각을 가진 채 좋은 것에 계속 영향을 받으려는 삶을 향한 적극적인 노력이다.
(63~64쪽, 「메모는 나를 속인 적이 없다」中)
그에게 메모는 '알'이다. 그 알 속에는 가장 좋은 삶으로 부화될 재료와 준비가 차곡차곡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메모는 '꿈'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꿈, 누구도 혼자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 꿈에 관한 메모를 수없이 쓰고 지우며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한다. 메모는 나 그리고 우리 모두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각자가 소중히 여기고 싶어하는 가치를 품고 있다고 믿는 저자의 신념은 『새벽 네 시의 궁전』, 『남겨진 이들의 선물』, 『조선인 전범-75년 동안의 고독』 등 여러 편의 라디오 다큐멘터리에서 우리 사회를 향한 고요한 외침이 되어 청취자들에게 울림을 전해준다. 책의 후반부에 '나의 메모'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아직 노래하지 않은 작은 단어들"
-네루다
에필로그에서 앞으로 삶에서 길을 잃으면 메모장을 펼쳐보겠다고 저자는 말한다. 헨젤과 그레텔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뿌렸던 조약돌과도 같은 메모가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일러주는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메모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덧붙인다. 말 그대로 메모는 '길'이자 '삶'인 것이다. 책을, 아니 메모장을 덮으려는데 문득 오래 전 읽었던, '메모' 하면 퍼뜩 떠오르는 수필 한 편이 생각났다. 어쩌면 <아무튼, 메모>가 메모광의 계보를 잇는 메모주의자의 '메모예찬' 시리즈의 최신작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직 끝나지 않은 메모에 관한 다음 이야기가 사뭇 궁금해진다.
내 메모는 내 물심 양면(物心兩面)의 전진하는 발자취며, 소멸해 가는 전 생애의 설계도(設計圖)이다. 여기엔 기록되지 않는 어구(語句)의 종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광범위한 것이니, 말하자면 내 메모는 나를 위주로 한 보잘 것 없는 인생 생활의 축도(縮圖)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하윤作(1958년), 『메모광』中]
우리가 생각하는 메모란 지극히 사적이면서 다분히 비밀스러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수첩이나 노트에 수기로 작성하던 메모의 장소 혹은 영역이 스마트폰으로 옮겨 갔을 뿐이다. 그러나 글씨 쓰는 일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대인에게 있어 메모 장소의 변화는 단순한 행위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감각에서 사각거리는 손글씨의 느낌마저 사라지게 했다. 건조한 종이 위를 연필 혹은 볼펜의 검은 선이 '글자'라는 추상적 문양을 그리며 미끄러져 나아가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자태인 것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붉은색 혹은 파란색 선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사라져 가는 듯 보였던 메모의 풍경이 최근 들어 되살아나고 있다. 맘에 드는 문장이나 책을 한 장소에 여럿이 모여 필사를 하는 모임이 생겨나고 있으니 말 다했지 뭔가. 물론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이 모임으로써 나태해지려는 자신을 붙잡을 수 있고, 필사에 좋은 여러 아이디어를 취합할 수도 있고, 필사를 핑계로 친목 모임도 이어갈 수 있는 등 여러 장점이 있겠지만 자신의 손으로 노트에 글씨를 쓰고 자신이 기록한 문장의 의미를 곰곰 되짚어 생각해 본다는 건 디지털 전환의 시기에 아날로그 감성을 되살리는, 이른바 시대를 역행하는 시도일 수도 있다.
"그때의 노트들은 이제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메모들은 지금의 내 삶과 관련이 깊다. 나였던 사람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노트에 쓴 것들이 무의식에라도 남아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어느 날 무심코 한 행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믿는다. 이게 메모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에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에 찌들지 않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서." (p.35~p.36)
CBS 라디오 피디이자 작가인 정혜윤 피디의 <아무튼, 메모>를 읽으면서 중간중간 책장을 덮은 채 한동안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그동안 몇 권의 아무튼 시리즈를 읽어 보았지만 출판사의 기획 의도에 맞게 작가는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에 어울리는 제목을 뽑아 친구에게 수다를 떨듯 가볍게 풀어가는 게 일반적인지라 책이 출간될 때를 기다려 모두 읽어왔던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정혜윤 피디가 쓴 <아무튼, 메모>를 꼭 읽어봐야지, 하고 생각했던 건 꽤나 특별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정혜윤 작가의 열혈 애독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내가.
"인생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이런 정의는 어떨까? '말과 몸'이 협력해서 빚어내는 이야기. 몸은 여러 모로 신비한 요소가 있다. 몸은 노화를 겪으며 낡는데 그 낡은 몸이 겨로 낡을 수 없는 기억을 담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인간의 몸을 가리켜 피를 담는 자루가 시간을 담는다고 했다. 시간은 어디론가 우리를 데리고 간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가 가는 공간은 자신의 몸이다. 쿤데라의 말대로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몸과 단둘만이 남겨진 시간을 마주한다. 몸에 관한 한 우리는 시작과 끝을 먼저 알고 중간 부분을 나중에 아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p.115)
사람들이 메모를 하는 데는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전제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 전제가 모든 메모의 동기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메모를 하는 모든 주체의 동기는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위해서'가 될지도 모른다. 밤낮으로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동기는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어떠한 미래, 그 간절한 소망이 지난한 작업의 동기였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의 메모는 그 행위 자체가 결코 사소하거나 가볍지 않다. 메모에 실린 간절함의 무게는 기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메모장이 꿈의 공간이면 좋겠다. 그 안에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이 있다면 더 좋다. 그 안에서 나는 한 해 한 해 나이 들고, 곧 잊힐 상처와 결코 잊히지 않을 슬픔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알게 된다. 내가 무엇 때문에 슬펐는지 어떻게 버텼는지 알게 되고, 나를 살피고 설득하고 돌보고 더 나아지려 애쓴다. 반대로 내가 언제 행복한지 언제 심장이 뛰는지도 알게 된다." (p.162~p.163 '에필로그' 중에서)
지금 불행한 사람들은 훗날의 행복을 기약하기 위해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온 마음을 담을 수밖에 없다. 퇴근 후에 갖는 필사 모임도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더 나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 그것이 비록 허위에 그칠지라도 우리의 몸 어느 구석에는 그때의 흔적이 지문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껏 단 한 번도 필사를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런 모임이 꽤나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은 처음이니까.
한바탕 비가 쏟아지려는지 하늘이 어둡다. 에어컨 바람을 쐬며 책을 읽다가 문득 그리운 얼굴들을 하나둘 떠올려 본다. 호사스러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