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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세르반도 테레사 데 미에르 수사의 삶으로 정말 그러했듯이, 그럴 수도 있었듯이,
그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삶이다.
역사소설이나 자서전보다는 단순한 소설이고자 한다.
- R. A.
휴전 직후인 1953년 북한에서 처형당한 임화가 살아생전 썼던 소설이 70여년이 지난 현재 발견된다면 그 소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물론 임화는 시인이자 평론가였기에 시와 평론을 주로 썼지만,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회고록 형식으로 남겼다거나 혹은 자전적 소설의 형식으로 남겼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그 글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혹은 1958년에 숙청된 김원봉이 죽기 전에 회고록을 남겼다면 그 글은 어떤 내용일까
레이날도 아레나스(Reynaldo Arenas)가 살았던 당시의 쿠바도 한국의 식민시대나 해방전후, 그리고 한국전쟁 전후처럼 격동의 현장이었다. 아레나스가 태어난 1943년은 바티스타 독재 정권 시기였다. 우리가 잘 아는 체 게바라가 혁명군으로 활동했던 것이 바로 쿠바 혁명전쟁이고, 이들이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려서 쿠바 혁명에 성공하게 된다. 아레나스 역시 혁명에 가담하여 몇 년간 반군에 협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아레나스가 접한 카스트로 정권은 그의 이상이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아레나스는 이에 환멸을 느끼고 카스트로 체제를 비판하는 소설을 썼고, 이로 인해 카스트로 정권에 쫓기는 삶을 살게 되었다. 평생 그를 따라 다닌 수식어는 ‘반체제 인사’였다. 쿠바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던 아레나스는 결국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지만 그곳에서도 순탄치 못한 삶을 살다가 1990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목숨을 끊을 당시 아레나스는 에이즈 말기였다. ‘동성애자’라는 꼬리표는 ‘반체제 인사’와 더불어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낙인이었다.
아주 간략하게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삶을 요약해보았다. 한국 독자에게 매우 생소한 쿠바의 작가 레이날도 아레나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쿠바의 현대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필요하고, 작가에 대한 이런 배경지식을 기반으로 할 때 『현란한 세상』에 대한 오독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레나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거론했던 게 임화나 김원봉이었는데, 만약 이 둘을 잘 모른다면 최인훈의 『광장』을 떠올려봐도 될 것 같다. 『광장』의 주인공인 이명준의 삶과 그가 선택했던 것들, 그리고 그의 최후를 떠올려본다면 레이날도 아레나스라는 낯설고 생소한 작가가 좀더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을 테고, 그가 살았던 당시의 쿠바나 그가 정치적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오독을 방지하기 위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사실 이 작품은 독자의 입장에서 아주 잘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이야기가 관점을 달리해서 거듭 반복되곤 하는데, 따라서 집중해서 줄기를 따라가지 않으면 이야기 속에 빠져 허우적대거나 익사할 수도 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작가의 의도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 이 소설을 통해 아레나스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책의 독서 방법이 책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소설 역시 소설의 내용이나 형식에 따라 독서 방식이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여러 의미에서 ‘매우 생소한’ 이 소설을 읽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이해와 집중이란 생각이 든다. 이것은 결코 쉬운 글읽기의 방식은 아니지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는 ‘낯선’ 것이 주는 ‘새로움’의 여운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이걸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차도 별로 없는 안전한 포장도로만 운전하다가 처음으로 오프로드를 달린 경험 같은 거라고 해두자. ‘다시는 오프로드는 안 간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프로드의 매력에 흠뻑 빠진다면 또다시 오프로드를 운전할 날만 고대하게 될테니까.
라틴 아메리카의 복잡한 역사나 정치 등을 다뤘다는 점에서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도 접점이 있어 보이고, ‘실재는 환상이 되고 환상은 실재가’ 된다는 측면에서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와 겹치는 부분도 있다.
한마디로 『현란한 세상』이 표면적으로는 중남미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세르반도 테레사 데 미에르라는 신부의 회고록을 패러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용적으로 봤을 때 이 소설은 아레나스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란한 세상』에서 내용보다 중요한 건 이 소설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레나스가 이 소설을 쓰면서 차용한 쿠바문학의 전통들, 바로크 문학적 요소들을 수용한 네오 바로크 문학적 성격들 말이다. 1969년 프랑스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과 함께 이 소설이 최고의 외국어 작품상을 받았을 때, 몇몇 평론가들이 『현란한 세상』이 『백년 동안의 고독』의 마술적 사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평가를 했는데, 아레나스는 이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 소설 속에서도 다소 강한 어조로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반박하는데, 실제로 『백년 동안의 고독』이 1967년이 출간된 반면 『현란한 세상』은 1965년에 쓰였으니 직접적으로 마르케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당시 라틴아메리카의 전반적인 경향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겠지만, 쿠바 문학의 전통 안에서 『현란한 세상』을 이해하는 편이 더 타당한 듯하다.
소설가로서 아레나스는 이런 오해를 상당히 불쾌해하며 경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을 ‘오독’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또다른 이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소설을 오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설명하자면 형식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이 소설은 평역(評譯) 같은 작품이다. 평역이란 무엇인가? 평역의 사전적 의미는 ‘재해석하여 번역함’이다. 번역을 할 때 원본에 없던 것을 구성하여 넣거나 있는 것을 삭제하는 등 번역자가 자신의 관점으로 원본을 재해석한 것을 평역이라고 한다. 독자들이 가장 잘 알만한 평역 작품으로는 이문열의 『삼국지』가 있다. 원본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 원본을 번역자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는 ‘평역’은 따라서 번역자의 관점이나 시각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세르반도 테레사 데 미에르라는 신부의 회고록을 패러디한 이 작품은 작가인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관점이나 시각이 상당부분 반영되고 개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방식을 선택한 것일까?
레이날도 아레나스는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밝혔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밑줄은 원본에 없는 것인데 강조를 위해 삽입했다)
1. 오래 전에 집필해서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소설의 서론인 이 글에, 세르반도 수사와 에레디아의 인생 역정을 기록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그럴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중요한 순간처럼 '공식' 역사라는 것이 기록하지 않는, 시인과 모험가가 유사한 불명예를 많이 겪고 앞으로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광대한 파노라마를 앞두고 멕시코에서 만나는 그 순간을 생각한다. 두 사람 다 사랑하는 조국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무엇을 보았나?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p.12)
2. 나는 항상 '상세하고 정확한' 자료라는 '역사적인' 것을 불신했다. 역사란 결국 무엇인가? 대략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문서철인가? (중략) 충동, 동기, 인간에게 밀려드는 비밀스러운 생각들은 등장하지 않고 역사에 의해 수거되어 등장할 수도 없다. 이것은 외과의조차도 고통받는 환자의 아픈 감정을 절대 포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는 전쟁이 일어난 날짜나 전쟁을 빛낸 사망자, 즉 명확한 것만을 기록한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방대한 책은 순간적인 것만을 요약한다(그리고 충분하다), 원인이 아닌 영향을. 그래서 나는 역사보다는 시간에서 찾는다. 그 영원하고 다양한 시간에서. 인간은 비유다. 왜냐하면 비록 외견상 역사를 수정하려 시도하고 어떤 이들에 의해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결국 역사의 비유이기 때문이다. (pp.13-14)
3. 시간을 순서대로 나열하려는 인간의 천진함, 점진적으로 '진보주의적'이기까지 한 의도로 배열하려고 하는 것조차 시간은 거부한다. 어떻게 영원한 것을 정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은 공포스러운 이 일을 단념하지 않는다. 그래서 계속 고사본, 날짜와 축일 같은 것에 많은 중점을 둔다. 우리가 어떤 시간에서건 진실되고 비통한 인간을 발견할 때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가 시간을 초월한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의 현재성, 즉 무한성이라는 것이다. (p.14)
4. 나는 하나의 현실이 아닌 모든 현실 또는 적어도 몇 가지 현실을 반영하고자 했다. (p.16)
이 소설의 번역가인 변선희는 이러한 아레나스 소설의 특징을 ‘현실 세계에 대한 고정 관념으로부터의 탈피’라고 요약적으로 설명했는데, 그녀는 아레나스의 이러한 소설쓰기 방식의 연원을 쿠바의 바로크 문학의 전통에서 찾았다.
아레나스는 삶과 현실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바로크 미학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으며, 17세기 바로크 시인들이 환멸을 느낀 것과 마찬가지로 중남미의 척박한 현실과 쿠바 혁명 초기의 기대에 대한 실망으로 환멸을 느낀다. 언어밖에 기댈 것이 없던 16세기와 17세기 바로크 작가들처럼 중남미의 유일한 주인공은 언어라고 하며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한다. 현실 재현을 거부하고 다양한 측면에서 현실을 파헤치면서 언어적 층위보다는 바로크 사고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 즉 과장, 풍자, 그로테스크, 아이러니, 알레고리 등의 바로크 미학을 통해 영원한 인간 비극을 동정적인 아이러니를 갖고 완화시킨다. (pp.378-379)
정통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온갖 핍박과 추방을 당하고 여러 차례 투옥까지 됐던 세르반도 테레사 데 미에르 신부의 삶은, 쿠바의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라 교육도 거의 못 받고 절대적으로 빈곤한 삶을 살았을 뿐더러, 쿠바 혁명에 대한 초기의 믿음이 깨지면서 실망과 환멸을 느끼며 카스트로 정권하에서 쫓기고 투옥까지 당했던 아레나스의 삶과 매우 흡사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아레나스는 소설의 다양한 시점 변화를 이용한다. 왜 일까? 한 가지 사건을 서로 다른 시점으로 반복해서 서술하는 것은 반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기실 이를 통해 아레나스가 말하고 싶었던 건 반복을 통한 메시지의 강화는 아니었다. 아레나스는 시점이 달라지면 관점이 달라지고 이야기도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오서독스(orthodox)에의 회의와 의문을 제기하기 위한 장치로 이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다. 소설을 통해 하나의 현실이 아닌 모든 현실 또는 적어도 몇 가지 현실을 반영하고자 했던 아레나스의 의지와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오서독스(orthodox)에 대한 강력한 회의와 의문을 제기하는 것.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현란한 세상』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이로부터 거의 20년 후가 될자기 자신의 비참한 말로와 정확히 일치하는 결말이다.
세르반도 테레사 데 미에르 수사는 죽어서도 평안을 얻지 못했다. 자유당이 수사들을 수도원에 가두고 성당과 수도원을 점령했을 때, 보물을 발견하리라는 기대감에 산토 도밍고회 수사들의 무덤을 파헤쳤다. 기대했던 것을 찾지 못하자 격노한 카레온이라는 작자가 무덤에서 미라 열세 구를 꺼냈는데, 세르반도 수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사제복 조각이 발견되었다. 이 미라들은 며칠 동안 노천에 으스스하게 진열되었다. 한 이탈리아 사람이 이 바짝 마른 약탈품 몇 개를 구입해 아르헨티나로 가져갔다. 세르난도 수사는 바로 바다를 건너야 했다. 아르헨티나어서는 어느 서커스 단장이 수사의 미라를 사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져가 종교 재판의 피해자로 전시했다. 지난 세기말, 바로 그 미라가 벨기에의 가장 우화적인 서커스 중 한 곳에서 전시되었다. 실제로 그의 유골은 합당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실재가 환상이 되고 환상이 실재가 되는 이야기들을 통해 아레나스가 극복하고 싶었던 것은 집단적이고 정통적인 것들이 아니었을까? 끝끝내 현실과 타협하지 못했던 아레나스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조차 그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부디 이제라도 그의 영혼이 합당한 휴식을 취할 수 있기를.
[덧붙임] 이 소설이 여러 의미에서 마음 깊이 남아 있는 독자라면 그레이엄 그린의 『권력과 영광』을 추천한다.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현란한 세상>에 동물이 있다. 쥐, 사자, 나귀, 콘도르, 전갈, 뱀, 고래... 동물은 말을 하고 수사를 움켜 쥔다. 동물들은 수사를 구속하는 장면에서 나오고, 동물한테서 부각되는 것은 끔찍한 것. 이를테면 흉포함, 위압감, 간교함이다. (그래서 동물이라기 보다는 짐승이라고 부르는 게 나을 것 같다.)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삶에서 짐승을 보곤 했는데 짐승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뒷통수 치는 직장 동료가 나한테는 뱀이었고, 당신이 했잖아. 떠넘기는 직장 상사가 사나운 침팬지였고, 눈치 없는 직장 후배가 곰이었다. 그때 나는 그들의 눈에 생쥐, 돌맹이, 잡초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뱀, 침팬지, 곰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양이었다고 믿고 싶지만...소설에서 짐승이 말을 하는 대목이 환상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이었던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소설의 시점 변화가 매우 흥미로웠다. 1인칭, 2인칭, 3인칭. 다양한 시점이 나오는데, 특히 1인칭 시점으로 사건을 서술하고, 이야기가 끝나자 같은 장면을 3인칭 시점으로 다시 서술하는 대목은 정말 좋았다. 두 가지 시점이 한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러자 소설은 객관적이면서 주관적이 되었고, 일기면서 역사서가 되었다. 들은 이야기면서 말하는 이야기가 되었고, 내 이야기이면서 남의 이야기가 되었고, 환상이면서 실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