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문학을 공부하면서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알게 되었고 그의 작품에 푹 빠졌던 지난 과거가 떠올랐던 이유는 막스 프리쉬를 설명한 한 줄의 문장 때문이었다. '브레히트 이후 최고의 작가'란 찬사를 받은 막스 프리쉬의 대표적 작품인 <호모 파버>는 탄탄한 구성과 밀도 높은 감정으로 비극으로 치닫는 주인공의 생애를 보여준다.
소설은 보고서 형식으로 되어 첫 번째 정거장, 두 번째 정거장으로 나눠 주인공 발터 파버의 우연이 빚어낸 필연같은 운명적 삶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더 깊이 몰입하게 해줄 수 있었던 디테일의 힘은 자전적 이야기가 가미되어 만들어진 에너지라 설명할 수 있다. 소설은 생각조차 거부하고 싶은 근친상간 모티브로 운명과 숙명이 지배하는 비극의 공간이 되어 버렸다. 비록 친딸 자베트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였지만 자볘트와의 만남과 사랑은 우연인듯 비극으로 치닫는다. 주인공 파버는 결국 위암 수술을 받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존재조차 몰랐던 친딸 자베트와의 사랑과 자베트의 죽음을 통해 파버는 과거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지만 중병에 걸린 그에게 남은 시간은 짧기만 했다. 파버라는 한 남자의 삶에 우연처럼 들이닥친 비극은 마치 아이러니한 인생 그 자체라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내리게 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을유세계문학전집
호모 파버
막스 프리쉬/ 을유문화사
책을 완독 후 한동안 서평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막스 프리쉬, 그는 많고 많은 사랑 중에 왜 오이디푸스적 사랑을 정면에 내세운 것인가! 자베트의 짧은 생이 주는 여운은 너무도 강렬했다. 일기와 보고서로 그려지는 이 책은 마지막 파국에서 정점을 찍는다. 책의 마지막을 읽은 사람이라면 내 말이 와닿을 것이다. 근친상간 소재를 현대 사회의 물질 만능주의와 인간 소외, 정체성의 모순과 인종에 대한 편견 등의 무거운 내용과 함께 담담하게 다룬 스위스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스위스 작가의 책은 신선하게 다가왔고 소설은 위대했다.
책의 주인공 발터 파버는 엔지니어로 그가 탄 비행기가 용설란과 모래뿐인 타마울리파스라는 곳에 불시착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난 숙명이나 운명 따위를 믿지 않는다. 엔지니어로서 난 개연성의 방정식으로 예측하는 데 익숙하다. 대체 왜 숙명이라는 것인가?』 과연 그의 생각은 끝까지 변하지 않을까? 그의 옆자리 승객이 최근 20년간 소식을 듣지 못한 친구 요하임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소설은 숙명이나 운명 따위를 믿지 않는다던 그의 삶에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쳐 보여준다. 그 우연은 치명적이고 파극이었다.
한나 란츠베르크, 유대인인 그녀는 한때 발터와 연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한나가 요하임의 아내였다.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과거에 한나는 발터의 아이를 임신했고 결혼하자는 발터의 청을 거절하고 떠났다. 발터를 거부하는 사연은 한나 입장에서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이후 두 사람은 헤어졌고 발터는 한나가 아이를 유산시킬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사악한 운명의 장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다.
발터는 배를 타고 유럽으로 가던 중 배의 선상에서 젊은 아가씨를 만난다. 발터가 '그 애'라고 부르는 그 애. 어쩐지 한나가 떠오르는 소녀였다. 여기서 전혀 상상도 못한 것일까? 젊은 여성만 보면 왠지 한나가 떠오른다는 발터.... 50살 생일날 자베트에게 청혼한다. "나랑 결혼할래?" 결코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파리의 오페라에 함께 한 그 젊은 아가씨와의 그 순간이 발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 차후에 발터는 일의 전후 사정을 다 알게 되었고, 다시 그날을 떠올려 보여준다. 소설은 우리에게 비장미를 선사했다. 한나와의 사이에서 여러 가지 형편으로 결국, 낳지 않기로 한 바로 그 아이라는 사실을... 이 쯤에서 독자들은 혼돈과 갈등을 겪는다. 이 비극적인 사랑이 결국 파국을 맞고 말리라는 것을 예상했을까?
20년 만에 재회한 한나, 그것도 자베트가 뱀에 물려서 치료하러 간 병원에서 만난 한나. 두 사람의 기분은 어땠을까? 읽는 내내 두 사람에 몰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보고서 형식의 2장 역시 담담한 문장으로 그려졌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무릎을 꿇고 우는 한나의 울음 장면에서 나또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 어쩌리!! 소설은 열린 결말로 끝난다. 막스 프리쉬는 결론을 가만 보여주기만 할 뿐 끝까지 결론을 제시하지 않았다. 기술과 통계, 신화와 운명 사이에 독자를 내던져 버렸다.이 짙은 잿빛 감정을 빠져나오는 데 한참이 걸릴 것 같다. 책을 닫으며 갈기갈기 찍어진 그들의 가슴을 그러모아 끌어안아주고만 싶었다. 운명을 거부한 자, 운명 속으로 걸어들어갔으나... 지독한 운명이여!
을유문화사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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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호모 파버>faber*이고 유네스코에서 ‘개발도상국에 대한 기술 원조’ 업무를 담당하는‘’엔지니어인 주인공 이름 역시 발터 파버faber인 것은 당연히 우연이 아니다.
*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환경을 개척하는 인간을 호모 파버Homo Faber라 일컬었다.
1957년에 기술문명과 과학에 대한 비판이라니, 현재에서 돌아본 그 시절에 대한 평가에 의아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예민하게 결과적인 문제들을 예견할 수 있는 이들은 존재하고 작가라면 이상할 것도 없다.
테크놀로지와 근대과학에 기반을 둔 문명에 필연적으로 야기될 환경 문제 역시 1970년에 이미 제기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더구나. 오히려 이성주의와 합리주의가 가진 결함을 목격하고 이해하는 후대로 이 책을 이제야 만난 일이 다행이라 여긴다.
주인공의 기능적인faber 면들을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묘사처럼 담은 문장들이 도입부터 내내 눈에 띈다. 숫자와 확률이 등장하고, 고립된 개인주의적이고 건조하고 피로하다.
“나를 예민하게 한 건 바로, 정지해 있는 비행기 엔진이 공회전하며 덜덜거리는 진동이었다.” “한 단계씩 가속치를 올리며 굉음을 내는 엔진 때문에 이름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녹색 점멸등마저 짧은 순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장님이 된 기분이었다.” “면도를 한 뒤 전보다 더 자유롭고 안정된 기분을 느끼며 - 난 면도하지 않은 상태가 정말이지 싫다.”
‘장님’이란 표현이 인상적이다. 신체의 연장으로서 기계를 인지하는 세계관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문장이다. 발터는 사람이 지겹고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다. 시선은 기계에서 발하는 신호에 고정되어 있고 창 밖 풍경 역시 기계 장치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엔진 고장으로 비상 착륙을 할 때까지의 상황을 철저히 기계적으로 보도하듯 전하는 묘사에 살짝 숨이 막혔다.
“난 숙명이나 운명 따위를 믿지 않는다. 엔지니어로서 난 개연성의 방정식으로 예측하는 데 익숙하다. (...) 모든 일이 그리된 게 우연 이상이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 하지만 그렇다고 숙명이란 말인가? 개연성 없는 일을 경험 가능한 사실로 간주하느라고 신비주의 따위가 필요하지는 않다. 수학이면 충분하다.”
호감이 가는 인물이나 흥미로운 서사에 끌리는 것도 아니지만 멈추기 싫은 기분으로 계속 읽는다. 문장이 짧고 깔끔해서 지치지 않고 한 문단씩 읽어 삼키며 달리는 기분이다.
쉽지 않은 대작이라는 명성을 듣고 읽기 전부터 엄청 긴장해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무척 재미있다. 아직 모를 뿐 인과를 설명할 수 없는 괴이한 일은 없다고 믿는 내 취향에 잘 맞는다.
한편으로는 주인공의 성향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수많은 여행 장소들이 갑작스럽기도 하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들이 끼어들 때마다 상상이 가능할 정도의 정보가 필요한 나는 일일이 찾아 보느라 읽는 속도가 느려진다.
과학과 합리성이 체화된 인물이 그 두 가지 모두가 부재한 신화와 운명의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장엄한 공간의 대비가 드라마의 클라이막스처럼 격렬한 갈등과 혼란으로 분출되리란 기대가 무척 컸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모든 장소의 의미는 발터의 내면을 상징하는 섬세한 활용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계획한 일정에 누구든 무엇이든 느닷없이 끼어드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그래서 삶에 끼어든 혼란과 과거와 만남에 대해 발터가 느끼는 혼란을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불편하고 불쾌한 내 일상의 균열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딸과 만나게 된다. 당연히 감동과 눈물의 재회는 없다.
스스로를 잘 훈련시켜 정돈되고 오류 없이 살아가려는 발터에게는 그 대가로 결여된 것이 있다. 내게는 결여보단 거래의 결과라 보이지만 인간 사회가 기대하는 것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인간이 아니라 선의를 베푸는 인간이다. 법을 어기지 않으면 벌을 받지 않지만 칭찬도 감사도 받을 수 없다.
시각 기능이 무척 중요하고, 자기실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이 무척 중요한 수단인 독자로서의 나는 남성이라는 것을 빼면 발터와 별반 다를 게 없어서인지, 그에 대해 내가 느끼고 구축한 감정은 선명하다. 이해한다는 기분이 들어서인지 그가 “(...) 모르겠다, 흔들린다, 분노한다, 울었다”라고 할 때에도 새삼스럽게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발터처럼 일에 자부심이 크다거나, 남성성을 찬미하거나, 인간의 기술문명이 자연을 극복하고 정복하기 위한 수단이라 믿지 않는다. 하나의 세계관에 큰 의미와 가치를 두어 다른 문명을 비교하거나 시혜적인 입장을 견지하지도 않는다.
다른 독자들은 그를 어떻게 여길지 무척 궁금해진다. 그가 지닌 결점으로 인해 경멸할까, 아님 동정할까. 혹은 공감할까.
완독 후 가장 부러워한 것은 그가 50세에 여행을 하며 새로운 출발을 맞이한 것이다. 어느새 틈만 나면 가능한 삶을 잘 정리할 생각을 하는 50세 이전의 독자로서 불쑥 무모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무척 부러운 기회이다.
?? 을유문화사 #서평단
*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도서제공 #도서협찬
인류에게 전하는 비극의 초행길,
비극적 서사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주인공을 ‘보통 이상의 인간을 모방의 대상’으로 정의했다. 보통 관객들과 달리 고귀하거나 신분이 높은 위치에 있는 한 사람의 파멸을 그리는 것이 비극이자, 이러한 원칙 때문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것이라 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잔잔하고 평범한 일상의 미디어 콘텐츠보다는 특정한 인물 혹은 집단의 몰락을 그린 콘텐츠가 더욱 인기를 얻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오이디푸스 비극의 현대적 부활이라 일컬어지는 「호모 파버」 또한, 오로지 기계 문명만을 추구하는 한 인물이 겪는 몰락의 여로를 보여주고 있다. 출판사 소개말에 적힌 ‘현대판 오이디푸스 비극’은 책을 읽는 내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떠올리게 한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자신의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오이디푸스는 어딘가 발터 파버와 닮아있다.
「호모 파버」의 주인공인 발터 파버는 유네스코 소속 엔지니어로 출장길을 비행하는 도중, 멕시코 타마울리파스 사막에 불시착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처럼 상상할 수 있었다. 주인공 ‘발터 파버’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야기는 상당히 짧고 급한 전개로 이어진다. 문단마다 장면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고, 흐름이 전환될 때마다 한 문장 정도의 독백은 마치 고전 영화의 투박하지만, 매력 있는 연출 같았다. 또한, 발터 파버의 합리주의적 독백들은 그가 얼마나 기술 문명을 신봉하는 ‘도구적 인간’-호모 파버-인지 알게 해줘서 이야기를 보다 농밀하고 세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난 숙명이나 운명 따위를 믿지 않는다. 엔지니어로서 난 개연성의 방정식으로 예측하는 데 익숙하다. 대체 왜 숙명이라는 것인가? ……… 중략 ……… 개연성 없는 일을 경험 가능한 사실로 간주하느라고 신비주의 따위가 필요하지는 않다. 수학이면 충분하다. (29쪽)
이러한 기술 문명 신봉자를 전면에 앞세워 어떤 식으로 그를 파멸시키며 인류를 비판할지 작가의 의도나 책의 후반부 내용이 더욱 궁금해지기도 했다. 발터 파버의 비극적 말로는 앞서 언급했듯이 오이디푸스와 비슷하다.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오이디푸스. 그의 비행기 옆자리 승객은 오래전 소식이 끊긴 친구 요하임의 동생이었고, 심지어 한때 발터와 연인 관계였던 한나 란츠베르크는 요하임의 아내란 사실. 설상가상으로 배를 타고 유럽을 항해하던 도중 사랑하게 된 연인 자베트는 한나와 발터 사이의 딸이었다는 사실. 운명의 기구함이란 무엇인가. 도구적 인간으로서 기계 문명을 신봉한 인류의 죄였을까. 아니라면 그저 ‘신’ 따위의 지나친 농 혹은 ‘숙명’ 이었을까.
나는 「호모 파버」 읽으면서 ‘오이디푸스왕’과 더불어 떠올리게 된 인물이 있다. 바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에 등장하는 ‘오대수’. 과거 자신의 죄로 인해 감금을 당하고 처절한 복수와 사랑했던 연인이 자신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인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주인공이 불행하게 되는 원인에 대해서 ‘주인공의 불행을 유발하는 요인은 개인의 어떤 과오나 과실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정의하며 ‘하마르티아(hamartia)라는 용어로 규정했다. 오이디푸스왕. 발터 파버. 오대수. 이들의 하마르티아는 ‘그들의 무지’ 였다. 친아버지인 걸 몰랐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 혹은 딸이란 걸 몰랐기 때문에 겪는 비극적 운명은 모두 무지에서 비롯되었고 결국 그들을 파멸시켰다. 「호모 파버」는 이런 비극적 서사구조와 인물 특성을 원칙에 맞게 하면서도 현대식으로 비틀어 인류와 물질문명을 비판하며 우리에게 자연과 기술 속에서 볼 수 있는 인간들의 이기주의에 강한 경고를 보낸다. 소설은 2부,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한 발터의 담담하고 건조한 상념으로 끝맺는다.
「호모 파버」. 고전 소설이기 때문에 완독에 대해 지레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만, 책을 읽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고 오히려 너무 술술 잘 읽혀서 번역이 정말 잘 되었다는 걸 느꼈다. 도구적 인간인 주인공의 비극적 말로를 보면서 나 또한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기계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성찰하여 막스 프리쉬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한 의도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인류에게 전하는 비극의 초행길 「호모 파버」를 걸어보는 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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