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페리온』을 읽어나가는데 있어 오늘의 시각만으로 접근해서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어렵다. 동시대(18세기 말)의 그 어느 작품보다 당 시대 조류에 대한 선행적 이해가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계몽주의의 이성 만능의 시대에 대한 강한 염증과 반발, 그리고 프로이센(오늘의 독일) 절대주의에 대한 저항의 시기라는 측면이다.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질풍노도(疾風怒濤' strum und drang)의 시대' 라 하며, 이의 독특한 특성이 이 작품의 중심 사상이라 할 수 있기에 그렇다.
작중 화자(話者)이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휘페리온(Hyperion)'의 정신적 구조는 이 질풍노도의 정신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하여도 그릇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그리스’와 같은 최초와 시원적 야성의 힘에 대한 동경, 충동이나 감정, 상상, 직관을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수단으로 보는 점, 정열, 사회비판, 자연의 동경 등 감상주의 태도, 또한 자신을 능가하려는 반인, 즉 신적 충동을 지닌 인간, 기존의 일신론적 신학관의 거부와 개인의 자의식과 범신론적인 종교에 대한 태도는 18세기중후반기 독일 젊은이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은‘휘페리온’의 삶의 여정에 대한 회고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어린 시절의 스승‘아다마스’를 통한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에 대한 배움으로부터 시작하여, 청년기의 스승이자 친구인‘알라반다’와의 우정과 연인‘디오티마’와의 사랑을 통한 정신의 아름다움과 숭고함, 예술과 종교, 범신론적으로 신격화 된 자연의 정신에서 비롯한 만물의 평등과 존재의 불변성에 대한 깨달음의 과정을 담고 있다. 특히,‘총체-자연’이라는 만물에 신성을 부여하는 범신론적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의 윤회사상과 닮은, 존재의 불가변성에 믿음이 아름다움과 사랑과 결합하여 독특한 삶의 태도를 형성하는 것은 이 작품의 주된 관점이라 할 수 있겠다.
전쟁에 참여한‘휘페리온’의 우유부단한 이별의 편지는 사랑하는 여인‘디오티마’의 죽음을 가져오는데, 이에 대한 휘페리온의 스토아적인 태도는 사실 당혹스러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죽음’ 즉 내면적인 기쁨 가운데서 죽는 것은 모든 것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고귀한 정신이라는 이해를 보이는 것이다. 전쟁에서 죽음을 암시한 연인의 편지를 보고, 존재의 불가변성에 경도되어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죽음을 택한 디오티마에 보내는 이 감정은 “내가 위대하다고 존중했던 내 청춘의 생각들, 그 사상들이 나의 디오티마를 독살했던 것이라네!”하는 믿음이 실리지 않은 독백처럼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아무래도 시대의 엄청난 괴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서구인들의 감성과 정체성에 그리 공감하기에 어려운 것은 이 작품도 다르지 않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제도, 인본주의적 태도, 그네들의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의 모습, 신적 아름다움과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절제의 미등 예술에 대한 찬양을 근간으로 하고 있어, 격심한 문화적 회의와 이질감을 일으키게 하는 것도 이 작품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게 하는 방해요소가 되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물론 호메로스와 그리스 신화, 독일의 화가‘빙켈만’, 작품의 배경이 된 그리스에 대한 묘사의 지침이 된‘리처드 챈들러’의 『소아시아와 그리스 여행』, 그리고 순수한 자연 속으로의 목가적 생활의 요구를 한 계몽주의 사상가‘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는 이 작품의 실질적 문장을 구성하고 있다하여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독해를 고달프게 한다.
“아! 아! 모든 것은 사랑의 복된 유희인 것을! ~ 서로 치켜세우는 말, 배려, 섬세한 반응, 엄격함과 관용 ~ 그 무한한 신뢰”와 같이 사랑에 빠진 휘페리온의 사랑 찬가처럼, 감정의 정당성에 대한 절대적인 옹호와 자유와 사랑 예찬, 자연인을 위한 자연적 질서의 추구를 하던 당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루소’는 완벽한 모델이었던 모양이다. 조화와 대립의 보편적인 화해라는 평화의 관념, 외적 결핍의 체험으로부터의 이상의 표상, 사랑의 자연스러움과 우정의 정신적-이상적 본질의 구분 등, 루소의 문학적 변주곡이 아닐까..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유일한 소설이라는 <휘페리온>을 전자책으로 구입했습니다.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의 양장본 시리즈가 아주 익숙한 저로서는 종이책으로 구입하지 않은 점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늘 가지고 다니는 전자책 뷰어 속에 소장하고 다닐 수 있다는 점은 든든해서 좋지요. 커버의 회화 작품은 저에게는 토마스 만의 다른 책 표지로서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을 이렇게 한 번 떠올립니다. 을유문화사의 같은 시리즈로 보았던 <마의 산>도 한 번 떠올리구요. 소위 교양소설이라고 나누는 소설 작품들은 저는 참 좋아합니다 (말은 우습습니다만). 추리소설, 공포소설, SF소설보다 몇 배는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휘페리온>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저에게는 죄다 즐거움이고 고민이고 쓸쓸함입니다. 산 정상에 서서 뜬구름을 바라보는 책표지의 남성, 얼굴을 모르는 그 남성이 제가 아니라고도 말 못 하겠습니다. 독일 소설들을 사랑하고, 교양 소설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휘페리온>은 가방 속에는 전자책으로, 가슴에는 뜨거운 문장들로 기억해 두고 싶습니다.
소설 데미안을 다 읽고 그에 뒤따른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 독일 문학 코너를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 불현듯 '이 책이 정말 읽고 싶다.' 라는 느낌이 들어 작가와 년도, 내용도 모른채 그냥 집어든 책이다.전반적인 구도는 휘페리온과 그의 친구 벨라르민과 연인 디오티마아와 주고 받는 편지들로 구성된 글이며, 그 안에서 휘페리온은 계속적인 자아 모색과 성찰을 통해 이상적인 삶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멘다. 마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데미안'을 합쳐 놓은 느낌이랄까?이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분명 소설을 읽고 있으나 시와 같고, 또한 희곡과 같으며, 어느 때는 수필 같은 느낌마저 든다. 마치 문학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소설이 메인음식인 코스요리를 먹은 듯 한 기분이 든다.다루는 내용 역시 단순한 교양 소설을 넘어 상당히 철학적이며, 또한 예술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아마도 지금까지 내가 읽은 문학 작품 중 가장 오랜 시간을 공들여 읽은 책 인것 같다. 단지 조금의 아쉬움이 있다면, 너무 많은 것이 표현되어서 읽는 사람입장에서는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는 정도? 나중에 더 지적 수준이 높아졌을 때,다시 읽고픈 마음이 든다. 청춘이 사라지고 난 때에 비로소 우리는 그 청춘을 사랑하며, 잃어버린 청춘이 다시 돌아왔을 때 비로소 그 청춘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법입니다.
한 청년의 고뇌와 성찰
미래를 향한 꿈과 희망으로 가득할 것 같은 청년시절, 누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과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온갖 물음을 하게 되는 시기가 바로 이때라 생각한다. 안으로는 자아에 대한 성찰을 시작하여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려고 하고 밖으로는 자신이 속한 세상에 대한 이상의 실현과정에서 부딪치는 한계를 느끼며 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시기 또한 청년기이다. 이러한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를 만난다.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휘페리온]을 통해서다.
[휘페리온]의 작가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괴테, 쉴러와 동시대 사람으로 독일 시인이다.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프리드리히 횔덜린 역시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존재 자체가 미흡할 정도로 평가 받지 못한 작가였다. 반평생 불후한 삶을 살았던 그의 삶이 이 소설 속에 담겨진 듯하다. 현대 서정시인의 선구자 횔덜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시 [반평생]을 비롯하여 유일한 소설 [휘페리온]과 미완성 희곡 [엠페도클레스]가 있다.
[휘페리온]은 그리스 청년 휘페리온이 친구 벨라르민, 연인 디오티마와 사이에 휘페리온이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를 이상의 세계로 생각하는 스승 아다마스와의 교류를 통해 신화, 역사, 수학, 자연, 천문학 등을 배우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로 삼았다. 한편, 혁명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알라반다라는 새로운 인간형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들은 네메시스 동맹에 참여하며 이상주의와 행동주의 사이의 갈등으로 표현되는 둘 사이의 차이로 갈라서고 만다. 휘페리온이‘미’라고 부르던 연인 디오티마와의 만남으로 그동안의 사상적 혼란을 종합하는 계기를 맞는다.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휘페리온]을 통해 크게 세가지 인간형이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세계의 본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던 시기의 스승 아다마스는 성찰주의자로, 네메시스 동맹에 가입하고 혁명투쟁 참여하는 알라반다는 행동주의자다. 이 둘은 인간의 지평에서 자유를 지향하는 인물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 안에서 막힘없는 자유를 구가하는 인상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이상세계 그리스 정신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연인 디오티마가 있다. 이러한 인간의 유형들과의 교류를 통해 휘페리온은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전일성의 관점]에 서게 된다. 그것은 신과 인간, 자연이 총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학문과 종교, 예술이 하나를 이루는 전일의 세계를 이야기 한다.
[휘페리온] 한 젊은이가 성장하며 일반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중요 요소를 편지글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 솔직하고 성실하게 전해주고 있다.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휘페리온이 자신의 일부라고 했다는 것처럼 이 소설 속에 프리드리히 횔덜린 작가의 자신을 사상적 흐름의 경험을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접하는 작가에 익숙하지 않은 문체까지 읽어가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아름다운 문장이다. 은유가 곳곳에 숨어 있어서일까. 내용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가기가 무척 어려웠다.
세상과 자신의 그리고 스스로 내부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이중성에 대한 생각에 깊이를 더하게 만드는 이 소설은 곁에 두고 은미하며 자신을 성찰하게 만드는 책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