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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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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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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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페리온
프리드리히 횔덜린 저/장영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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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테로와 나 - 을유세계문학전집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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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 을유세계문학전집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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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기병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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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
알렉산드르 라디셰프 저/서광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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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세 - 을유세계문학전집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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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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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재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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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마 이야기
바를람 샬라모프 저/이종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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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희곡선 - 을유세계문학전집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저/박현섭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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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벤구르 - 을유세계문학전집 57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저/윤영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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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주머니 속 이야기
카렐 차페크 저/김규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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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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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 역정
존 번연 저/정덕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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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 존 니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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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혼
니콜라이 고골 저/이경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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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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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하 - 을유세계문학전집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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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상 - 을유세계문학전집 55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저/김희숙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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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문 전원교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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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플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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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 을유세계문학전집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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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베르터의 고통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저/정현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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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의사의 수기 모르핀
미하일 불가코프 저/이병훈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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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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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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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 을유세계문학전집 47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저/김태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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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잡극선
관한경 외저/김우석,홍영림 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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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더링 하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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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짜르의 사람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저/박종소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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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객
헤르만 헤세 저/김현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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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외 - 을유세계문학전집 42
소포클레스 저/김기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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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 을유세계문학전집 60
제인 오스틴 저/조선정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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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스테이아 3부작
아이스퀼로스 저/김기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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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브게니 오네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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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브게니 오네긴
엿보는 자
알랭 로브그리예 저/최애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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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 이야기 - 을유세계문학전집 66
스노리 스툴루손 저/이민용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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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연
조지프 콘래드 저/이석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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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비얀 빌딩
알라 알아스와니 저/김능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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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통행증·사람들과 상황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저/임혜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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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시몬 드 보부아르 저/강초롱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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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저/안미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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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비극 (하)
시어도어 드라이저 저/김욱동 역
아메리카의 비극 (하)
아메리카의 비극 (상)
시어도어 드라이저 저/김욱동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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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로베르토 볼라뇨 저/김현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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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 을유세계문학전집 51
로렌스 스턴 저/김정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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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슐츠 작품집 - 을유세계문학전집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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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 을유세계문학전집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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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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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티그
프랭크 노리스 저/김욱동,홍정아 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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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 지 안드라지 저/임호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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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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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저/홍성광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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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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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맥베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이미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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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소설 전집 - 을유세계문학전집 12
루쉰 저/김시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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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대니얼 디포 저/윤혜준 역
로빈슨 크루소
로미오와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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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로르카 시 선집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저/민용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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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밤
블라지미르 오도예프스키 저/김희숙 역
러시아의 밤
라이겐
아르투어 슈니츨러 저/홍진호 역
라이겐
라셀레스티나
페르난도 데 로하스 저/안영옥 역
라셀레스티나
돈후안 외
티르소 데 몰리나 저/전기순 역
돈후안 외
돈키호테 성찰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저/신정환 역
돈키호테 성찰
도화선
공상임 저/이정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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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 을유세계문학전집 65
헤르만 헤세 저/이영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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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저/송상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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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저/서은혜 역
개인적인 체험
갈라테아 2.2
리처드 파워스 저/이동신 역
갈라테아 2.2
1984년 - 을유세계문학전집 48
조지 오웰 저/권진아 역
1984년 - 을유세계문학전집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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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이야기 - [개인적인 체험]을 읽고 평점10점 | YES마니아 : 골드 k*****o | 2023.05.27 리뷰제목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이야기 <개인적인 체험>을 읽고       한 남자가 서점에서 '수그린 남자의 두개골 모양'을 닮은 아프리카 대륙 지도를 사서 나온다. 그의 별명은 '버드(bird)'이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그의 작고 마른 몸매와 얼굴 생김새는 새의 이미지를 닮아 있다. 그가 직면한 현실은 마치 새장에 갇힌 새가 그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날아가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리뷰제목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이야기

<개인적인 체험>을 읽고

 

 

  한 남자가 서점에서 '수그린 남자의 두개골 모양'을 닮은 아프리카 대륙 지도를 사서 나온다. 그의 별명은 '버드(bird)'이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그의 작고 마른 몸매와 얼굴 생김새는 새의 이미지를 닮아 있다. 그가 직면한 현실은 마치 새장에 갇힌 새가 그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날아가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곧 출산을 앞둔 아내와 학원 강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아프리카를 향한 버드의 로망(혹은 도망)은 아득히 멀기만 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멀게만 느껴졌으리라. "지금 바로 병원으로 와 주세요. 아기에게 이상이 있어 의논해야 합니다.(31쪽)" 잠결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은 지난 밤 버드가 마주친 남창, 용무늬 점퍼를 입은 청년들, 꿈속에 아프리카 멧돼지와의 해프닝이 결코 우연이 아닌  불길한 징조였음을 상기시킨다.

 

내 아들은 아폴리네르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 찾아왔다. 내가 모르는 어둡고 고독한 전장에서 부상당하여. 나는 아들을 전사자처럼 매장해야만 한다. 버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48)

 

  버드의 아들이 두개골 이상으로 '뇌 헤르니아(腦 hernia)'라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것이다. 신생아를 '겐부츠(現物)'라 부르며 '물건' 취급을 하는 산부인과 원장(의 말이 가이부츠(怪物), 즉 '괴물'로 들리는 버드)부터 뇌 헤르니아인 신생아와의 만남을 행운으로 여길 뿐아니라 해부 참관을 기대하는 산부인과 의사, 아기의 분유량을 조절하거나 분유 대신 설탕물을 주어 쇠약사를 유도하려는 대학병원 소아과 의사, 딸에게 아기가 심장병으로 숨진 것으로 하자는 장모에 이르기까지, 눈앞에 벌어진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한 버드에게 주위 사람들의 시선과 말은 위로는커녕 불안과 혼란을 가중시킨다. 특히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 태어나는 편이 좋은 건지 어떤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시대(63쪽)"라는 장인의 말을 통해 장애아 출산에 대하여 (소설이 쓰여진) 1960년대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부모가 자식(장애아)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보게 만든다.

  버드는 방황한다.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고 대학시절 여자친구를 만나 성적 욕망을 표출하며 (술기운을 빌어) 잠도 잔다. 처음에는 내 예상을 빗나간 전개에 당혹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독자이기에 앞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버드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고이자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라고 자위하지만, 파도처럼 밀려드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안도감과 공포감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무기력의 바다 속으로 빠져드는 버드를 보면서 다시금 '이것이 인간(인생)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작가는 극한의 상황에 처할수록 식욕, 성욕, 수면욕 등 기본 욕구가 더 절실해짐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또한 그의 행위에 윤리적 잣대를 대자면 독자마다 공분과 공감이 엇갈릴 듯하다.

  여기서 오해보다 이해를 위하여 버드의 여자친구이자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히미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도 '개인적인 체험'을 겪는다. 결혼한지 1년만에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부터 낮에는 명상에 잠기고 밤이 오면 스포츠카로 거리를 질주한다. 버드와 히미코는 개인적인 체험과 (버드에게는 다소 왜곡된) 공통의 추억을 공유하며 몸과 정신의 대화를 나눈다. 그 중에서 히미코가 설파하는 이른바 '다원적 우주론'이 눈길을 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또 하나의 우주에선 죽지 않고 살아 남은 버드의 아기를 둘러싼 세계가 있으며, 그곳에는 행복한 아빠(버드)로부터 경사로운 소식을 듣고 그(히미코)와 함께 축배를 들고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 이미 요즘 유행하는 평행우주(멀티버스) 이론을 차용한 작가의 센스도 놀랍지만, 어쩌면 히미코가 힘든 나날들을 버티려고 만든 자기 체면(혹은 주문)과도 같은 소설적 장치로도 읽혀진다. 과연 버드는 계속 살아 남은 존재로 자기가 바라는 우주를 찾아갈 수 있을까?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인간은 그가 죽어 버려서 그와는 관계가 없어진 우주와 그가 여전히 살아 나가면서 관계를 이어가는 우주라는 두 개의 우주를 앞에 두게 되는 거야. 그리고 옷을 벗어 버리듯이 그는 자신이 죽은 자로서밖에 존재하지 않는 우주를 뒤에 버려두고 그가 계속 살아가는 쪽 우주로 찾아오는 거지."(81쪽)

 

  이 소설의 제목은 <개인적인 체험>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2023년 3월에 세상을 떠난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버드의 아들은 (현재 음악가로 활동중인) 오에 히카리에서 '촉발'된 것이 맞지만, 버드와 작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소설에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문제라는 작가의 시선을 담아낸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후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제이며, 오에 겐자부로의 사회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소설을 통해 이렇게 힘주어 말한다. 어떠한 '개인적인 체험'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개인의 몫으로만 남겨둘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가 같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민하여 인식의 전환과 현재보다 나은 미래로의 길을 모색하는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그에 응답하여 우리의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회복하는 인간'이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기도 한 까닭이다.

 

12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2 댓글 3
종이책 슬픔은 냉소를 이기는 유일한 힘이다 평점8점 | 2*****h | 2013.02.19 리뷰제목
슬픔은 냉소를 이기는 유일한 힘이다   소금 그릇에서 나왔으나 짠맛을 알지 못했다 절여진 생선도 조려놓은 과일도 아니었다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고 서성거렸다, 꽃이 지는 시간을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가랑비에 젖은 자들은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언제나 가뭄이었다   진은영 「청춘 1」에서
리뷰제목

 

슬픔은 냉소를 이기는 유일한 힘이다

 

소금 그릇에서 나왔으나 짠맛을 알지 못했다

절여진 생선도 조려놓은 과일도 아니었다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고

서성거렸다, 꽃이 지는 시간을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가랑비에 젖은 자들은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언제나 가뭄이었다

 

진은영 청춘 1에서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슬픔과 마주한다.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치명적인, 그런 슬픔과의 조우. 가족이라는 내밀한 울타리 안에서, 혹은 내면의 어두운 곳에서 비롯되는 슬픔은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대다수의 인간은 그러한 슬픔을 외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도주와 외면을 택한다. 자발적인 망각과 위악 그리고 냉소는, 바로 슬픔을 외면하려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면이다. 많은 고백들은, 그러한 가면을 쓴 다음에야 가능해지기도 한다. 인간은 나약하고 쉽게 붕괴되는 존재에 불과하니까.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에는 개인적인 슬픔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는 한 사내가 등장한다. 작가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 버드의 개인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을 기록한다.

 

 1964, 삶의 유일한 희망은 언젠가 떠날 아프리카 여행일 뿐인 학원 강사 버드(27)의 내면은 지금 복잡하다. 그의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젊은 나이에 아버지가 된다는 부담감은 행복한 고민에 불과하다. 버드가 신생아실에서 마주한 아이는 머리에 커다란 혹을 달고 있었으니까. 뇌 헤르니아(hernia)라는 결함을 지니고 태어난 아이는 당장 수술을 견딜 체력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태다. 입원한 아내에게 버드는 아이의 내장에 이상이 있다고 둘러대며 진실을 감춘다. 버드는 아프리카 여행을 위해 모아둔 돈을 생존이 불투명한 아이를 위해 써야 한다는 사실이 괴롭고, 아내와 장인이 알게 된 이후에 벌어질 상황이 두렵기만 하다. 아이가 차라리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마음과 일말의 자책감이 충돌하면서 버드는 이기적인 불안에 시달린다. 바깥 세계에서는 소비에트가 핵실험을 재개하고 원폭 반대 운동이 격렬히 전개되고 있었지만 버드에게는 개인적인 운명을 지배하고 있는 아기 괴물의 요람”(252)가 유일한 고민이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과음하고 대학 동창 히미코와 가학적인 섹스에 몰두하는 버드의 방황을 비웃듯이 신생아실의 아이는 끈질기게 숨을 이어간다. 마침내 수술을 포기하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병원에 통보한 버드는, 히미코의 섹스 파트너 중 한 명인 어느 낙태 의사에게로 향한다. 아이의 목숨을 끊은 다음에 히미코와 아프리카로 떠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버드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아이를 수술시키기로 한다. 만약 아이가 죽는다면, 자신이 살아온 27년의 삶이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으므로.

 

 한 젊은 아버지의 방황과 고뇌가 작품에서 생생하게 묘사된 것은 바로 작가 오에 겐자부로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담고 있기에 가능했다. 오에 겐자부로의 아들은 실제로 뇌 헤르니아 증상을 지닌 채 태어났고, 이 노작가는 지금까지 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작가란 개인적인 고통을 문장으로 해소하며 감추려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훌륭한 작가는 자신이 관통한 개인적인 고통을 세계의 고통과 끝내 연결시킨다.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고통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자들이 겪은 고통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세계의 약자들이 겪는 고통을 응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인의 고통이 세계의 고통과 연계되는 지점에서 개인적인 체험보편적인 체험으로 확장된다.

 

 괴물 같은 아이를 보고 그 존재를 감당하는 것이 두려워 술과 섹스에 탐닉하는 버드의 모습은 ‘1960년대 일본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미일안보조약 개정 반대 운동과 전공투(전학공투회의)’가 활약했던 1960년대에는 일본 사회에 전후 진보적인 국가 건설에 대한 기대를 불어넣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계속된 일본의 경제호황은 정치적 요구를 경제적으로 해소시켜 버렸다.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사회는 전반적으로 우경화되었으며 전공투를 비롯한 진보세력은 쉽게 와해되고 만다. 고도의 소비사회에 적응하면서 일본의 진보세력은 더 이상 정의와 평등, 분배, 약자의 고통에 관심을 두지 않는,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파편화된 개인으로 전락한다. 인간과 역사를 신뢰하지 않게 된 일본의 지식인들은 환상으로 도피(196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의 비약적인 발전은 환상으로 도피하던 당시 지식인들의 무의식을 반영한다)하거나 심각한 냉소주의에 빠졌다. 아프리카 여행만을 꿈꾸며 자식을 외면하는 개인적인 체험의 주인공 버드의 방황은 현실을 도피하며 개인의 밀실에 유폐되었던 1960년대 일본 젊은이들의 무의식과 맞물린다. 1960년대 이후 일본 사회에 등장한 수많은 버드, 그러니까 소비를 즐기며 비극 따위와는 거리를 두고자 했던 젊은이들의 무의식이야말로 일본 사회가 감당해야만 할 장애였던 것이다.

 

 버드와 같은 나이에 뇌 헤르니아를 앓는 자식과 마주했던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실제로 퇴폐적이고 절망적인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취재 여행을 통해서 원폭 피해자들과 그들을 치료하고자 애쓰는 의사와 자원봉사자들과 만나면서 오에 겐자부로는 개인적인 고통이 어떻게 세계의 고통과 맞물리는지를 깨닫는다. 장애를 앓는 자식을 마주한 절망은 오에 겐자부로의 다른 소설 만엔원년의 풋볼에서도 반복된다. 인간은 개인적인 슬픔을 겪으면서 기어이 상처를 받는 존재에 불과하지만 상처의 치유는 개인적인 체험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회복하는 인간에 대한 응시는 오에 겐자부로 문학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아이를 살해하고 아프리카로 도피하려다가 갑자기 변심하는 개인적인 체험의 결말이 작위적이라는 비판은 소설이 세계를 냉정하게 반영하지 않았다는 지적일 터이다. 더구나 아이가 앓던 뇌 헤르니아가 단순한 육종으로 판별되어 쉽게 수술로 제거할 수 있었다는 해피엔딩은 불행을 손쉽게 타파하는 작가의 미숙함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작위적 결말에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작가의 안간힘을 느낀다.

 

 나는 아기 괴물에게서 수치스러운 짓들을 무수히 거듭하여 도망치면서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하고 버드는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기가 막혔다. 답은 제로였다.(296)

 

 아이를 살해하고 히미코와 도피하는 결말이야말로, 고통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무의식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오에 겐자부로는 애써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다. 그는 인간이란 회복할 수 있는 존재라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곁에서 살아 있는 자식을 활자로 죽일 수 없었던 절박함도 작용했을 것이다.

 

 개인의 고통과 세계의 고통을 병치시키는 것이 문학의 윤리임을 수긍한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질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우리는 지금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거리를 두면서 애써 냉소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오로지 자신의 이기적인 불안만을 부여잡고 그것이 세계의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랑과 연대라는 단어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단어는 바로 냉소다. 냉소가 지배하는 세계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좋다. 지금의 세계가 바로 그러하니까. 폐쇄적인 개인, 불안한 미래, 차단된 감각, 이기적인 불안. 1960년대 일본 사회의 무의식과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대변하는 무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슬픔은 상처를 낳지만, 상처의 틈은 타인과 세계가 우리 자신에게 다가오는 입구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인 체험의 작위적인 결말을 지지한다. 아직도 살아 있는 장애의 존재(자식)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눈물에 대한 연민, 그리고 슬퍼지거나 상처를 받고나서야 비로소 주변을 돌아보는 나약한 자신에 대한 회의가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어떤 울림 때문이다. 냉소로 바꿀 수 있는 세계는 없다. 냉소가 지배하는 세계와 맞서는 유일한 힘은 개인적인 슬픔이라는 사실. 오에 겐자부로는 자신의 삶과 글로써 그것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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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은둔에서 광장으로, 개인적인 운명 너머로 평점10점 | s********d | 2017.08.20 리뷰제목
2014.10.12. 올 초에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었으니 작가의 소설로는 이번이 두 번째다. <개인적인 체험>을 읽기 바로 전에 산문집 <말의 정의>를 읽었다. 최근에 나의 독서취향에 큰 변화가 생겼다. 예전 같으면 찾아 읽지 않았을 남성작가의 소설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가를 성별로 분류하는 나의 말이 누군가에게는 유치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솔직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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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2.

 

올 초에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었으니 작가의 소설로는 이번이 두 번째다. <개인적인 체험>을 읽기 바로 전에 산문집 <말의 정의>를 읽었다. 최근에 나의 독서취향에 큰 변화가 생겼다. 예전 같으면 찾아 읽지 않았을 남성작가의 소설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가를 성별로 분류하는 나의 말이 누군가에게는 유치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솔직히 편향적인 독서를 해왔다. 이렇게 반대로 걷기가 어느 순간 느닷없이 시작되었고 걷다보니 뭔가 균형 잡히고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지금 마음상태로 둘 중 더 좋은 것을 꼽으라한다면 나는 작가가 '청춘소설'로 분류한 <개인적인 체험>(이하 <개체>로 줄여 표시)이라고 답하고 싶다. 온갖 문학적 기제와 장치로 완숙미를 더한 소설보다는 작가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화두에 대한 무조건적인 몰입과 파고들어가기에 마음이 가기 때문이다. 전자가 뒤로 갈수록 무겁게 공생과 이상향의 건설을 말한 반면에 처음부터 끝까지 질주할 듯 몰아가다가 마지못해 '갱생'의 가능성 정도만 열어둔 것이 이상하게 더 끌리고 미덥다.

 

 <개체>를 한마디로 줄여 말한다면 '버드의 마지막 여름에 생긴 일'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새라는 별명을 가진 주인공 때문인지 <데미안>이 떠올랐고, 기형아 아들을 대하는 부분에서는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문장들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아프리카에 대한 선망과 <무기여 잘 있거라>의 부분인용에서는 헤밍웨이와 작가가 포개져 보였다(전쟁과 성적 판타지를 병렬구조에서 대입한 것과 성적 불능자/ 엑스퍼트를 등장시킨 점들이 유사하다). 처음 <개체>를 읽고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오직 버드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버드는 에고이스트고 소설의 중심핵이라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밑줄친 부분들을 다시 읽으니 그가 만났던 외교관, 여자친구, 옛 게이친구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보통 인간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따르는 '외부적인 시간'을 거스르는 인물들인데 하나 같이 버드가 신인이 될 수 있도록 중요한 말을 건넨다.

 

 소설에서 이름부여가 굉장히 예민한 문제로 부각되는데 별명으로 호명되는 버드와 달리, 델체프, 히미코, 기쿠히코라는 분명한 이름으로 존재한다. 델체프는 외교관이라는 대의 대신에 뒷골목의 여자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더 중시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버드를 "아주 가엾고 작은 사람"으로 칭하며 '희망'이라는 단어를 곱씹어보게 한다. 히미코는 남편의 자살을 견디는 방법으로 '다원론적 우주관'을 믿는다. 지금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는 그는 죽고 없지만 다른 우주에서 그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것이 외교관과 달리 히미코(목재 창고)와 기쿠히코(광인 체포)는 과거에 상처를 주고 어설프게 관계가 종료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히미코의 다원론적 우주관은 우연한 혹은 필연의 계기로 재회하는 실제적 관계까지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버드가 에고이스트로 타락할 순간에 두 행성과 다시 충돌함으로써 아주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 잠식되어버릴 위기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의 수면 위로 나와 숨 쉴 수 있게 된다.

 

 세 사람 모두 버드와 만날 때 어둡고 밀폐된 공간에 처해 있는 반-유령 상태이다. 어둠 속에서 잠식된 그들은 사회가 정상으로 규정한 것밖에 머무는 벌로 감옥 같은 공간에 처해있다. 그러면서 역설적이게도 그들 나름의 삶의 철학(관용과 여유)에서 우러나온 버드에게 해줄 말들을 지니고 있다. 일례로, 히미코는 버드에게 “완전히 불모인 고통이라는 건 없는 것 같아.”, “이번 체험을 수혈식으로부터 샛길이 있는 동혈식으로 바꿀 수 있었으면 해.”,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해선 안되지. 버드, 그런 것을 했다간 미쳐버릴 거라구.”(마지막 인용은 <맥베스>의 대사이며, <말의 정의>에서 작가가 다시 언급했다.)라는 말을 전한다. 하나 같이 핏기를 잃고 뱀파이어처럼 창백한 모습인데도 그 암흑과 절망에서 버드를 비추어보게 하며, 그가 마침내 유예의 어정쩡한 시간을 종료하고 본래 집으로 돌아가도록 돕는다(히미코는 좀 다른 경우일 수 있지만 적어도 이해해준다). 과거 알코올에 빠져 몇주간 움막생활을 한 전적이 있던 버드는 반사회적인 인간이 될 소지를 충분히 갖춘, 아내의 집보다는 여자친구의 침대 또는 후미진 선술집 또는 뒷골목 쪽방으로의 유폐가 더 어울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알고 보니 아프리카도 멀리서 동경하며 단독자로 떠날 때만 버드에게 의미 있다. 히미코가 아프리카로 함께 떠날 것을 제안하지만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로망을 깨뜨린다. 버드는 결혼과 직장생활에 묶여 경비만 마련되면 떠날 참이었지만 막상 돈문제가 해결되니 아프리카의 본래 의미와 이상의 물거품화를 알아차린다. 버드에게 히미코와의 관계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 짧게 허락된 유예의 시간 안에서만, 즉 외부시간(시계)이 멈춘 상태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다. 정작 병원에 입원한 것은 버드의 아들과 아내인데, 버드는 히미코의 암실에서 위로받고 ‘회복’되는 단계를 거친다. 다시 말해, 회복된 인간이 되면 퇴원해야 하는 원칙대로 그는 히미코가 제공했던 병실을 나와야 한다. 히미코의 시아버지의 등장과 (아기에게 서툰) 햇빛 아래로 나온 히미코, 한쪽으로 기운 오픈카는 그들의 관계종료를 알리는 경종 역할을 한다.

 

 사실 아버지 되기에 장애를 겪고 여성혐오론자가 될 뻔했던 버드는 히미코라는 암실을 만나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정신력과 건강한 몸을 회복한다. 이십대이지만 사십대의 근력을 가지고 시궁창 쥐처럼 움츠러들고 작아졌던 버드는 인간다움과 존엄성을 회복하기에 이른다. 공포에 떠밀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벌어진 일에 감응하고 책임지는 어른의 태도를 취한다. 버드가 여행가이드라는 절충점을 찾고 집으로 돌아가는 행보를 과연 이상적인 결말 혹은 해피엔딩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아프리카행을 버드가 충동적인 욕구와 막연한 이상이 뒤범벅되어 꿈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라면, 그리고 결국 그곳도 또다른 퇴행적인 은신처와 다를 바 없다면, 그의 망상과 떠남의 갈망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버드가 불현듯 희망을 발견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단어를 '인내'로 수정하는 행위는 단순한 성장이 아닌 성숙의 자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의 정의>에서 작가는 절망과 희망이라는 말이 '허망'이라는 같은 우산을 쓰고 있다고 분석한다. 절망과 희망은 매우 쉽게 전치될 수 있어 절망 못지않게 희망도 인간을 가두는 고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까지 새와 같을까? 열다섯 살부터 예순 살에 이르기까지 같은 얼굴, 같은 자세로 사는 수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인간인 걸까? 그렇다고 한다면 버드는 지금 장식장 유리 속에서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이어질 자기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버드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절실하고 구체적인 혐오감에 빠져 몸서리쳤다. 그는 하나의 계시를 받은 기분이었다. 기진맥진 파김치가 된, 아이들이 줄줄이 딸린 늙어빠진 새..... (11-12)

 

 <개체>는 어떤 의미에서 생명의 존엄성과 개별성 회복으로도 볼 수 있다. 버드가 기형아 아들의 죽음을 기다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에 대한 공포는 자기혐오로 바뀌고 그것은 근원적인 여성혐오의 함정의 나락으로 떨어질 사태를 빚어낸다. 아버지 되기의 공포와 여성혐오의 근원지인 여성의 자궁은 생명탄생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버드의 여성의 몸에 대한 긍정은 생명에 대한 온정으로 이어지고, 이는 자기혐오의 덫과 죽음의 당위성을 떨쳐내게 한다. 소설 속 버드의 아버지와 히미코의 남편의 자살이, 작품 밖 소설가의 매부(영화감독)와 여러 문학가들의 자살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자살과 죽음 반대편에 있는 것에 대해 집착하여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돌파구와 출구를 찾지 못한 한 개인이 자기유폐와 어둠으로 계속 잠입하면 미쳐버리거나 스스로 생을 끊는 길밖에 없다고 경고하는 듯하다. 술과 수면제와 잠의 시공간은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기 위한 회복과 준비 방안으로 일시적이고 한정된 시간이어야 한다고 일러준다. 인위적으로 불러들인 잠은 최종적인 잠이 아닌 이상 결국은 현실 반영적 악몽의 “깔대기”를 빠져나오게 경로화되어진다.

 

 마지막에, 몸과 정신의 연령에 균형을 되찾은 버드가 현지 여행가이드로 변신하는 모습에서 좌절된 비극적인 청년소설 너머의 건강미를 응축하고 있어 좋다. 주인공은 버드의 별명을 떼어내고 온전한 한 인간으로 거듭날 뿐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에서 생명존중이라는 보편적인 화두를 끄집어내어 차후 작가가 활동할 ‘(일본 헌법)9조 모임’의 태동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아프리카 지도에 마음을 뺏긴 한 가장이 기형아 출산을 통해 생명과 죽음의 선택 귀로에서 괴로워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내용이다. 절대적으로는 짧은 시간의 고군분투이지만 상대적으로 매우 길었던 성장통을 담아낸다. 물론 그것을 진정한 인간되기의 시험무대로 볼 것인지, 미성숙하고 객기어린 한 남자의 자기연민과 투정 더하기 자기정당화로 볼 것인지는 독자의 눈에 달려있다. 당연히 나는 주인공이 '버드'라는 말의 갇힘과 대상화된 이미지를 벗고 진정한 인간의 형상을 되찾는(아들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해피엔딩으로 보고 싶다. 한 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말하는 듯 설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생명과 죽음 아래 놓인 보편적인 인간의 운명을 다루고 있어 결코 작은 이야기일 수 없다. 작가가 전후세대라는 점에서 또 피폭의 위험을 목도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버드는 일개 개인이 아닌 제국주의적인 야욕에 사로잡힌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 이기심, 무지, 그로인한 성찰 없는 만행의 결과를 들여다보게 하는 돋보기 역할도 한다. 어떤 운동의 슬로건처럼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울림이 실린 제목이다.

 

 문학작품은 대개 훌륭할수록 여러 겹으로 읽힐 여지가 있는데, 많은 경우 성적인 은유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심연으로, 내부로 계속 들어가면 남자의 페니스와 여자의 유방과 자궁만 남는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이 외향적으로 돌출된 그것들의 껍데기에 함몰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혹시 <개체>를 읽다가 당혹스럽고 <데미안>스럽게 난해하거나 아니면 퇴폐적이고 불쾌해 읽기를 중도에 포기했다면 다음과 같이 접근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것은 최근 나에게 일어났던 몇몇 일화를 토대로 정리한 말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버드와 히미코가 나누는 정사를 팩트로, 실제적인 것으로 읽기보다는 히미코라는 인물이 메시아적인 구원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봤으면 한다.

 

 히미코를 은유적인 구원자의 위치에 놓자는 말은 소설과 현실을 혼돈하지 말자는 말이다. 소설에서 심층적으로 계시화되는 히미코의 이미지는 어디까지 남자들이 만든 성적 판타지이자 신화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현실에 그런 인물이 실재하지 않을뿐더러(낙오자에서 성녀로 탈바꿈되는) 현실에서 히미코와 버드의 관계 이후에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쾌락의 끝, 암묵적인 파멸이지 현실로 꿋꿋하게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윤리의식이 투철하고 약간의 결벽증과 완벽증까지 겸비한 아내가 그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나는 다만 소설 속 버드는 무지하게 여복이 많은 아주 특수한 경우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누군가 정의한 주이상스(향유)라는 개념도 성적인 함의를 결부시킨 하나의 판타지이자 신화적인 개념일 수 있다. 꿈에서라면 모를까 주이상스라는 등불을 향해 달려든 나방은 결국 몸이 타들어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할지니, 다 가질 수 없는 게 삶이라면 이제 남은 것은, 피해갈 수 없는 개인적인 선별의 문제라는 결론 아닌 결론이다.

 

나는 아기 괴물에게서 수치스런 짓들을 무수히 거듭하여 도망치면서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대체 어떤 나 자신을 지켜 내겠다고 시도한 것일까? 하고 버드는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기가 막혔다. 답은 제로였다.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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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개인적 체험] 평점8점 | c******m | 2012.12.31 리뷰제목
2012년에 읽은 마지막 작품이 되겠다.   장애아를 둔 아버지의 고군분투가 눈물겹게 그려지지않나 했더니...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의 주체(버드)가 주인공이여서, 은근 짜증이 났다. 와이프가 장애아를 낳았는데, 그 곁에 있어주기는 커녕, 옛연인에게나 찾아가고..또 그 연인은 받아주고, 술먹고 강의실에서 토웩질을 한다던지...대책없이 허세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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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읽은 마지막 작품이 되겠다.

 

장애아를 둔 아버지의 고군분투가 눈물겹게 그려지지않나 했더니...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의 주체(버드)가 주인공이여서, 은근 짜증이 났다.

와이프가 장애아를 낳았는데, 그 곁에 있어주기는 커녕, 옛연인에게나 찾아가고..또 그 연인은 받아주고, 술먹고 강의실에서 토웩질을 한다던지...대책없이 허세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좀 밥맛떨어지는 인물.  

 

졸라 힘들었으나 어쨌든 잘 살았대더라,는 내가 원하는 판타지였나.

 

 

도무지 예뻐할 수도 없고, 공감도 되지 않는 인물의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요 근래 읽었던 일본 문학이 죄다 그저 그래서 그냥 폄하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마지막, '도망치기를 그만 둔' 부분에서 나는 조금 상쾌함을 느꼈던 것 같다. 

 

현실과 전혀 상관없는 '아프리카에 가길 꿈꾸는' 부분은 나의 어떤 것과 닮아 있는듯 했고...그가 히미코에게로 도망갔듯이...나는 자연을 '벗'이라 생각하여 줄창 등산만 다녔고, 백화점에 쫓아다녔던 것은 아니였는지...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다던  마지막 부분의 해피 엔딩 부분은...나 역시도 사족으로 생각된다.

우리의 해피엔딩은 그냥...희망사항일뿐. 진짜 현실은 살벌하지 않던가.

차라리 그가 히미코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다면...이 작품은 상상초월의 엽기 소설이 되었었을까?

 

위에 상쾌했다고는 썼으나...

지우개로 빡빡 지워버리고 싶은..혹은 이렇게 도망치고 싶은 순간에...

항상 정면도전 해야하는 것,만이 정답인지에 대해서도 살짝 의문이 든다.

뭐,내년되면 한 살 더 먹을테니...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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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 오에의 일생 평점8점 | t******2 | 2010.01.06 리뷰제목
오에 겐자부로의 대표작,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그의 초기작. 거의 완벽에 가까운 소설이라 극찬받은 소설. 개인적인 체험을 읽었다. 아마도 대학입학을 앞둔 시점이었으리라. 오에의 노벨상 소식을 접하면서 세계문학에서 일본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을 실감했고, 국문과를 원했던 고3 시절, 반드시 오에의 작품을 읽어보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던 것이 15년의 세월을 훌쩍 넘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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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의 대표작,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그의 초기작. 거의 완벽에 가까운 소설이라 극찬받은 소설. 개인적인 체험을 읽었다. 아마도 대학입학을 앞둔 시점이었으리라. 오에의 노벨상 소식을 접하면서 세계문학에서 일본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을 실감했고, 국문과를 원했던 고3 시절, 반드시 오에의 작품을 읽어보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던 것이 15년의 세월을 훌쩍 넘겨 버렸다.

 

오에는 일본 내에서도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뉘는 작가이다. 특히 전후 민주주의자와 장애 아들을 둔 아버지란 두 개의 큰 축이 오에의 일생을 관류하고 있다. 1964년 발표된 '개인적인 체험' 이래로 현재까지도 많은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다. 거의 모든 소설들이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과 아버지의 공생관계를 다루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문제적 작가로서 핵무기, 이라크 파병, 팔레스타인 문제 등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만약 내가 지금 아기를 구해 내기 전에 사고로 죽는다면 지금까지 27년의 내 삶은 말짱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다고 버드는 생각했다. 일찍이 맛본 적이 없는 끔찍한 공포감이 버드를 사로 잡았다. -P273

 

이 소설의 결말 부분이다. 자전적인 체험이 바탕이 된 이 소설은 27살의 젊은 나이에 뇌 헤르미아(뇌 일부분이 머리에 혹처럼 돌출되는 기형)를 앓는 아들을 얻게 된다. 그때부터 시작된 세상 누구에게도 해당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에 몸서릴 치며 도주한다.

 

주인공 버드는 어린 아이같은 별명으로 27년을 살았다. 도쿄의 명문대를 나왔지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며 늘 아프리카로의 도주를 꿈꾼다. 그러던 중 기형아로 태어난 아들을 마주하며, 철저히 죽어버리기를 희망한다. 병원 의사에게 노골적으로 아기가 쇠약사할 수 있도록 분유를 끊게 하는 한편, 자신은 철저히 상황적인 모반을 꿈꾸며 옛친구인 히미코를 찾는다. 히미코는 결혼한 지 일년만에 남편이 자살을 했고, 역시 일상의 결락 속에서 철저히 어둠속에 사는 여인이다. 성의 엑스퍼트로서 버드를 위로하며 끊임없이 성교를 해댄다.

 

뇌 헤르미아로 태어난 아기가 끝내 쇠약사하지 않자, 병원에서 아기를 데리고 낙태전문의사에게 데리고 가던 날. 어떤 동기도 없이 버드에게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다. 더이상 도망치지 않겠다고, 그것은 부성이 아닌 철저히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소설의 흐름상 이 부분이 생뚱맞다. 결국 아기를 살리기 위해 병원엘 찾았고, 뇌 헤르미아가 아닌 단순 이상으로 수술을 무사히 마친다.

 

일본 문단에서도 느닷없는 해피엔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우리에겐 할복자살로 유명한 시대의 좌파, 미시마 유키오는 오에의 마음 속에 어떤 불행한 사건도 결국 '명랑한 결말을 만들어야 해'라고 지시하는 주인이 있다고 토로한다. 단순히 오에의 대표작인 이 소설을 놓고만 보자면, 오에의 글쓰기는 어렵다. 후에 '오에 악문'이란 관념적이고 난해한 문장들이 등장한다고 하지만, 글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번역 또한 만만치 않았으리라.

 

특히 이 소설은 번역이 조금 미흡했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이 소설을 통해, 이후 그의 작품 세계를 평가하여 노벨문학상을 줬다는 사실 또한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왜 이 소설이 훌륭한 소설인가? 이러한 가치 판단은 또 다른 몫이겠지만, 작품 외적인 그의 일관된 삶(장애아를 둔 아버지의 생애, 전후 일본 민주주의 투사라는 생애)이 조금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오에의 전작을 읽으리라 다짐했던 15년 전의 약속은, 이쯤에서 접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지극히 아쉬우면서도 후련한 몇 일을 보냈다. 세상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의 삶들이 모여있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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