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가의 작품 연표를 따라, 그 좋은 작품들의 역자들을 따라, 친구의 친구들을 차례로 소개받기라도 하는 듯이 꼬리의 꼬리를 무는 독서 생활은 아무리 과해도 견딜 수 있는 황홀한 번잡함이다. 어쩌다 브루노 슐츠에 이른 걸까? 스타니스와프 이그나찌 비트키에비치라는 뱀처럼 긴 이름의 폴란드 아방가르드 작가의 소설로부터 정보라라는 역자를 알게 되었고, 그러는 사이 정보라라는 이름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 시기가 있었고, 믿음직한 역자가 안내의 뜻으로 흔드는 손짓을 따라 덜컥 브루노 슐츠에게로 왔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의 매력이 내 심미안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면 거기서 끝이었겠지. 마침 이 책의 첫 구절이 내 가슴의 짚단에 불을 질렀다. 그것으로 다다. 때때로 첫 구절만 꺼내 읽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내 가장 가까운 자리에 꽂혀 있어야만 했다. 한두 해 책을 읽어 온 것도 아니니 그 정도 촉은 있다. 여러분에게도 있는 그 촉이.
기념비 같은 그 첫 구절을 나의 맨살에 새기듯 다시 한 번 써본다.
7월에 나의 아버지는 물가로 떠나면서 나를 어머니와 형과 함께 여름날의 희고 눈부신 뙤약볕의 제물로 남겨 두었다. 빛 때문에 어지러워하며 우리는 휴가라는 거대한 책을 훑어보았다. 그 책의 책장들은 모두 햇빛에 번쩍였고 바닥에는 속이 거북해질 정도로 달콤한 금빛 배의 과육이 깔려 있었다.
-- [8월], <브루노 슐츠 작품집> p.9
<브루노 슐츠 Bruno Schulz>
“7월에 나의 아버지는 물가로 떠나면서 나를 어머니와 형과 함께 여름날의 희고 눈부신 뙤약볕의 재물로 남겨 두었다.”
브루노 슐츠(Bruno Schulz)는 1892년 7월 12일 태어난 의류 상인이었던 야코프(Jakub)와 헨리에타(Henrietta)의 아들이었으며 아주 어린 나이부터 남달리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아이였다. 그는 1902년에서 1910년까지 드로호비츠(Drohobych)학교에 다녔으며 후에 리 폴리테크닉(Lviv Polytechnic)에서 건축학을 공부한다. 그의 학업은 1911년 질병에 의하여 잠시 중단되지만 2년이라는 요양생활 끝에 건강을 회복하며 1913년에 학업을 계속해서 수행하였으며, 그 후 4년 지난 후 1917년에는 비엔나에서 잠시 건축학을 공부한다.
이후 세계1차대전이 끝난 후 폴란드의 드로호비cm에 속해있던 갈라시아(Galicia)지방으로 귀향하게 된다. 그는 1924년부터 1941년 까지 고향의 김나지움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기간제 교사로 일하게 된다. 그는 그의 경력에서 선생이라는 직업을 몹시 싫어하였지만 그의 일할수 있는 유일한 생계 수단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그러한 직업을 유지하였으며,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그 직업을 수행하였다.
슐츠는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과 폴라드계라는 국적의 이중적인 카테고리 안에서 자신만의 고유의 상상력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폴란드인으로서의 사고를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폴란드어를 썼으며 독일어도 유창하게 구사했으나 이디시어를 쓰는 침례유대문화에는 끝끝내 동화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에 관해서 코스모폴리탄적 분위기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만이 특정한 지역과 민족의 대한 기원에 유일한 공급처였기 때문이다. 그는 전체적인 삶의 과정을 통해 그 자신을 두개의 정치 상태에 공존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 폴란드 제2공화국(제2차 세계대전동안 소련과 나찌 독일에 의해 점령된 폴란드)그 지역자체에다 자신의 고향으로 남아있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의 삶은 종종 평범한것이 대부분인 은둔의 아웃사이더로 인식되어졌다.
슐츠는 불행하게도 그의 첫 단편 소설을 출판되는 것이 영향력 있는 동료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가 친구에게 썼던 여러 통의 편지에 묘사되었던 그의 고독한 삶의 근원적인 이야기와 그의 가족과 친구의 상세한 삶의 묘사는 소설가 조피아 나토코와스카(Zofia Nałkowska)에 눈에 띄어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이후 이러한 사건은 그의 예술적 야망으로서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녀는 슐츠에게 그 편지들을 단편 소설로 출판하도록 격려하였으며. 1934년 ‘계피상점’이란 이름으로 (The Cinnamon Shops, Sklepy Cynamonowe)으로 출판되었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그 소설은 그 단편의 소설의 한 챕터 중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악어의 거리’로 자주 언급되었으나 3년 후 ‘계피 상점’이라는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그의 작품 원본에는 슐츠가 직접 그린 일러스테이션이 삽입되어있었으나 초판이후 버전에서는 종종 생략되었거나 제대로 재현되지 못한 채로 출판되었다. 1936년에 그는 그의 약혼녀 조제피나 스제린스카(Jozefina Szelińska)의 도움을 받아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번역을 하였으며 1938년에는 폴란드에서 가장 권위 있는 Golden Laurel award상을 수여한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찌와 소련의 폴란드 침공이 있은 후, Drohobych는 소련에 의해 점령당하였다. 그때 슐츠는 ‘The Messiah ’라고 불리는 소설을 작업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 흔적은 영원히 사리지게 되었다. 독일의 소련 침공이후 폴란드가 다시 나찌의 손에 점령당한이후 유대인으로서 Drohobych의 게토지역으로 내몰려졌다. 죽음의 위기에 가까워진 그에게 나찌 게쉬타포 장교였지만 그의 그림을 동경하던 펠릭스 랜도(Felix Landau)에 의해 일시적으로 보호되었다. 그의 삶의 마지막 주는 슐츠는 Drohobych 란다의 집에서 벽화를 그렸다. 1942년 11월 19일, 바로 벽화 작업을 마친 후, "Aryan quarter"라는 거리에서 한 덩어리의 빵을 걷고 걸어가던 중 다른 게슈타포 장교 칼 군터(Karl Gunther) 의해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권터는 "개인 유태인‘이라고 부르는 란다의 라이벌이었다. 그 후, 슐츠의 벽화에 그려지고 나서 오랫동안 잊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