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기사문학에서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이름은 분수령 겸 원동력과 동의어다. <아발론 연대기>에서 자료 출처를 보아도 작가란에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이름이 적힌 문학작품이 빼곡히 나오고 있다. 프랑스 작가였지만,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 창작된 기사문학의 태반은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작품을 다른 작가가 개작했거나 모티브를 얻을 것들이다.
중세 기사문학도 국내번역으로는 아주 드물게 소개되었고, 그나마도 여러 작품은 지난 몇 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나왔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중세 기사문학에서도 특히 황량했던 쪽이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작품이었다. 2009년을 한 달여 앞두고 출간된 <그라알 이야기> 이전에는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었던 것이다. 많은 저술을 남긴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걸까, 아니면 방대한 기사문학의 선구자라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걸까. 아마 에셴바흐의 <파르치팔> 등의 번역본이 나온 것이 국내에서는 기적적이라는 쪽이 더 맞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라알 이야기>가 나온다고 했을 때 내 눈을 의심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지금도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작품이 나온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왜 <그라알 이야기>가 첫 출판작으로 선택된 걸까. 성배의 기사 이야기가 국내에서 특히 유명한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바그너 작품 <파르지팔>이 널리 알려진 것도 아니고, 게다가 미완성이기까지 한데!
주인공 '페르스발'은 너무나도 천진하게 자라 기사도의 법도는커녕 세상 물정도 제대로 모른다. 때묻지 않은 심성을 가졌다는 점 때문에 성배를 탐색하는 기사로 정해지고, 성배를 찾기 위해 이런저런 모험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천진난만한 나머지 천연덕스러운 면모까지 보이던 페르스발은 조금씩 기사도의 법도를 배우며 성배의 비밀에 근접해간다. 그 과정이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그라알 이야기>는 미완성인 채로 끝나버린다. 페르스발을 다룬 후대의 작품들이 각자 다양한 결말을 지닌 데에는, 아서왕 전설 문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원작'이 미완성인 탓도 클 것이다.
후대의 성배 이야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럴까? 프랑스식으로 표기된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금세 적응했고(퍼시발/영국, 파르치팔/독일, 페르스발/프랑스 등) 널리 알려진 버전과는 다르게 펼쳐지는 세부 전개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막상 위화감을 느낀 것은 산만할만큼 수더분하면서도 어딘지 뻣뻣하고 경직된 분위기였다. 잘 만든 리메이크작품을 본 뒤 원작을 볼 때 받는 위화감이 바로 이런 것일까. 그런데 그런 분위기에 막상 적응하니, 덜 다듬어지고 거칠게 보이던 부분이 담백하고 덜 가공된 분위기로 다가왔다. 기사 문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인데, 후대 작품을 먼저 보고 뒤늦게 접하니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하기야 신선함은 낯선 것을 대할 때 느끼지, 오래된 것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유려한 번역이 돋보이며, 주석도 충실하고 작품 설명도 상세하다. 이렇게 정성들인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독자로서 큰 기쁨이다. 그리고 앞으로 조금씩이나마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도 반갑다.
여담이지만, 아서 왕 전설이 유럽에서 문학작품으로 재창조된 과정은 언제 보아도 묘하다. 배경은 영국이건만 본격적으로 서사문학을 창조한 것은 프랑스에서였고, <파르치팔> 등 지금도 회자되는 작품을 낳은 것은 독일이었다. 막상 영국에서는 뒤늦게야 아서왕 전설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막연한 무국적 분위기가 '배경지역'과는 어울리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잉글랜드 본토가 아닌 웨일스 지방의 전설을 주제로 해서 그래서였을까.
아더왕과 그의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릴 적부터 읽고 들었던 수많은 흥미로운 소재들 중의 하나이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기사들의 모습은 악을 물리치고, 정의를 지키며, 약한 자들을 돌보는 즉 우리의 옛 신화, 전설 속에 등장하는 권선징악의 룰을 지킨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인간의 마음은 차이가 없는 듯하다. 이러한 기사들의 모험담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에 사용한 성배(이 성배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장사는 지낸 요셉이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를 찾아나서는 이야기가 더해져 신비로운 전설의 분위기를 더욱 더 비밀스럽게 만든다.
<그라알 이야기>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어리석고 상황 판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페르스발은 창 끝에서 피 한 방울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그라알을 가진 자들의 행렬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런 기사 페르스발의 이야기 또한 정리가 되지 않고 고벵 경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렇게 이야기가 서로 연관을 가지고, 원인과 그에 따른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 이야기가 정확히 마무리 되지도 않는다.
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고벵경은 페르스발과는 전혀 다른 기사의 모습을 지녔다.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오르크넬레스성의 여왕이 아더왕의 어머니인 동시에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정작 ‘그라알’이야기는 결말이 나지 않는다.
‘성배’라는 소재 자체가 주는 신비tm러움은 그 어떤 것으로도 깨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미완성이라기보다 의도된 미완성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야기가 인과관계에 의해 전개되는 것도 아니고 약간은 뒤죽박죽하며 연결되지 않고 끊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아더왕을 비롯하여 여러 기사들의 무용담에 기독교의 성배를 결합시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완전한 플롯을 만들어가기 위한 작가의 노력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시원하고 재미있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지만 아더왕과 여러 기사들의 모습, 성배의 행렬 등을 통해 중세만이 가진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켈트 신화와 그 문화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중세 기사와 신화의 탄생
우리가 살아가며 누리는 온갖 유, 무형의 문화유산은 어느 한순간 뚝딱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한 순간 어느 한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역사와 시간과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느 특정인의 노력만을 생각하게 된다. 책 속에 담긴 이야기 역시 저자의 순수한 창작물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 저자가 살아오는 동안 영향 받았던 모든 문화유산과 경험의 총화라고 보는 것이 합당한 평가가 되리라 생각한다.
특히, 정신문화의 총화라고도 할 수 있는 ‘신화’라는 것 역시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더하기 빼기를 반복하며 시대정신과 호응하며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유, 무형의 정신문화나 신화, 문학작품들이 이렇게 인간의 역사와 그를 온 몸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것을 모으고 기록하며 새롭게 만든 한 사람의 노고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기억 속 수많은 위인이나 위대한 사상가, 작가들이 오늘까지 그들의 창작물과 더불어 당당히 살아있는 근간이리라.
중세문학의 대표적인 이야기 거리가 종교와 신화가 아닌가 한다. 그 중에서도 브리튼의 역사와 켈트족의 신화 그리고 기독교적 요소가 결부되어 있는 아더왕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아더왕과 그라알이라는 ‘성배’의 효시가 되는 작품을 접하게 된다. 12세기 무렵 프랑스에서 활동한 작가,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그라알 이야기’다.
[그라알 이야기]는 크게 두 사람의 이야기가 중심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하나는 자신의 이름이 페르스발 루 갈루아라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소년이 자신이 살던 숲에서 어느 날 무장한 기사를 만나 호기심을 발동하기 시작하면서 출발하고 있다. 빛나는 갑옷과 무기들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는 기사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기사가 되는 방법이 아더왕으로부터 임명되는 것을 알고 왕을 찾아 홀어머니를 떠나 여행을 하게 된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기사로써 용맹성을 떨치게 된 소년은 어머니를 찾아가는 길에 낯선 곳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창’과 ‘그라알’을 보게 된다. 창과 그라알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갖지만 물어보지 못하고 이것이 훗날 불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이야기의 흐름과는 달리 또 하나의 이야기는 아더왕의 조카이자 기사인 고뱅으로 그는 무고죄에서 벗어나 기사와 가문의 명예를 찾는 길을 떠난다. 기사의 영예를 찾는 길에 ‘항상 피가 흐르는 창’과 연관이 되어 지고 그 창을 찾아가는 여정이 펼쳐진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려가는 ‘그라알 이야기’는 다소 허무하게 결말도 없이 끝나고 만다. 역자의 작품해설을 보고서야 이 이야기가 미완성의 작품임을 알게 되지만 그렇더라도 혼란스러움은 멈추지 않는다. 그라알 즉 성배에 대한 이미지 형성만 있을 뿐 구체적인 제시도 없고 단지, 중세 두 기사의 용맹성과 명예를 찾는 험난한 여정만이 들어올 뿐이다.
어떤 이야기가 구전되어 오는 동안 특정 신화로 완성되기까지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이 ‘그라알 이야기’가 바로 훗날 ‘아더왕의 이야기’와 ‘성배 이야기’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이야기 구성의 미완성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다소 혼란스러운 이야기의 진행이지만 거침없이 흘러가는 줄거리는 매우 흥미롭다. 영화나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중세 기사와 아더왕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갖게 하는 근본적 힘과 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아더 왕 이야기는 음악, 영화, 게임, 문학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에 모티브를 제공했다. 원탁의 기사는 사내 아이의 가슴을 뛰게 하고, 성배 이야기는 미지의 환상적인 세계를 꿈꾸게 한다. 그라알 이야기는 성배 이야기의 효시이다. 페르스발과 고뱅의 모험은 중세의 분위기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성배 이야기를 정립된 형식으로 접하고 싶었던 나에게 이 책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번역도 탁월하며 찬란한 광휘를 발하는 신비한 그릇인 그라알에 대한 해설은 또 다른 상상의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페르스발(퍼시발)과 같은 순진하고 꽉막힌 뚱딴지 유머 캐릭터의 가능성이라든가 스토리 전개 상의 전근대적인 괴이함 속에서 새로운 픽션 작법의 블루 오션 같은 걸 감지했다.
의외로 기대하지 못한 타이밍에서 깔깔거리며 읽었다.
최애리 역자님의 책은 어떤 것이든 신뢰할만하다.
판타지 같은 중세유럽기사의 좌충우돌을 이렇게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니 번역이 대단하다.
미완성에다, 수수께끼까지 남겨주어 더 매력적이다.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