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를 쓰면서 별점을 매길 때 마다 후하게 주지 말자, 별 다섯은 없는 셈 치자 다짐하나 쉽지 않다. 더군다나 이런 책을 읽을 땐, 첫 장을 넘기면서 한 방 먹은 기분을 느낄 땐 더욱 그렇다. 『콜리마 이야기』의 첫 번째 단편인 「설원을 걸으며」는 아주 오랜만에, ‘압도당하는’ 체험을 선사했다. 단 두 페이지, 24줄의 위력이었다.
수용소 문학이라 하면 떠오를 작품이 많겠지만, 내게는 도서관 한 켠에서 만난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3부작」이 처음이었고 이후로도 계속 관심을 둔 편이었다. 다양한 증언과 고발을 통해 알려진 대표적인 강제 노동 수용소(절멸 수용소)는 아우슈비츠이다. 그 곳에 가스실이 있었음은 모두가 알지만,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목격자’들은 그 곳에서 사라졌기에, 우리는 수용소에서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일들을 짐작만 할 뿐이다. 따라서 ‘살아남은 이’들은 그 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야 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이성적 한계를 넘어서는 그 상황을 전해야 한다. (영화는 오히려 생각을 제한한다. 『쇼아』가 그 긴 러닝타임을 오로지 ‘증언’으로만 채웠음을 상기해보자...) 그리고 아우슈비츠, 독일이 운영한 강제 수용소와 비교했을 때 소련의 굴라그(강제 노동 수용소)의 비극은 주목도가 덜하다.
굴라그를 증언한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군도』 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이다. 김학수 교수님이 번역한 『수용소 군도』의 경우, 범우사에서 열린책들로 판권이 넘어갔지만 전집은 절판이며 오로지 1권만 구입이 가능하다. 예전에 문의한 바로는 재출간 계획이 없다고 해 안타까울 뿐이다. 그의 작품도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솔제니친과도 교류했던 작가, 바를람 샬라모프의 작품을 읽고는 말 그대로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정말 좋다. 생전 두 작가는 서로 교류한 바 있다. 솔제니친의 작품이 사미즈다트(지하출판)으로, 그리고 프랑스에서 출간되어 그 비극을 알릴 수 있었다면 샬라모프의 작품은 자국에서조차 오랜 시간 출간되지 못했다. 『콜리마 이야기』는 작가가 사망한지 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출간되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에는 을유문화사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이 작품은 유기적인 짧은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샬라모프 전집 7권 중 1권이다. 작품들의 분량만큼 내용이 간결하며 명확하게 서술되는데, 러시아 문학을 읽을 때 까다로울 수 있는 이름들도 전혀, 독서에 방해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이 곳의 반역, 반체제 인물들은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했다. 콜리마는 극동이자 극북에 위치한, 스탈린 체제 하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강제 노동 수용소이다. 수인들은 광산에서 노동한다. 아무리 건강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이 곳에서 수개월이면 도호댜가(기진맥진하여 죽어 가는 사람)가 된다. '부실한 옷과 빈약한 배급 식량, 동상' 거기에 '엄청난 정신적 압박이나 절망'이 가세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는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양하며, 그들의 일상생활은 굉장히 상세하게 그려진다. 담담한 필치로 있는 그대로 묘사되기 때문에 콜리마의 삶(그것을 삶이라 할 수 있다면-시인 네크라소프 인용)은 더욱 잔인하게 느껴진다. 수용소 생활은 폭력에 취약하다. 권력은 깡패들이 쥐고 있으며, 지도부와 의사도 자유롭지 않다. 카드놀이에 걸 물건을 뺏기 위해 일어나는 살인, 도둑질은 일상으로 보인다. 무덤을 파 고인의 옷을 벗겨 속옷을 취하는 모습, 극도의 굶주림에 인육을 먹거나 얼어붙은 돼지를 훔쳐 그대로 입에 우겨넣는 모습, 광산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꾀병을 부리는 환자와 그를 적발하려는 의사(심지어 수인 출신)의 잔인성... 살아남기 위한 거짓말과 도둑질은 북극의 미덕이라 칭할 정도이다.
수인들은 생존을 갈망한다. 절망 속에서도 단 몇 시간의 노동하지 않을 자유, 잠깐 동안 몸을 녹일 수 있는 난로 앞에서의 특권, 빵을 하나 더 얻는 것과 같은 일을... 사랑과 우정, 연민으로 울어본 적은 있어도 배고파 울지는 않았다는... 아, 어떻게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쓸 수 있을까. 내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수용소가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언어를 넘어서는 그 비참함은 오로지 수인생활을 했고, 그를 증언하기 위해 살아남은 작가의 글로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샬라모프의 다른 작품들도 이어 출간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큰 아이처럼 행동하고 연극에 열중하는, 화내지 않고 어린애처럼 서로 말다툼하는 불행한 사람들의 행동을 눈치채고 감동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진짜 깡패 세계의 인간을 만나 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 그런 세계에 대해선 그 자신이 어떤 동정의 말도 못하게 했을 것이다.
수용소 내에서 강도들이 저지르는 만행은 수없이 많다. 불행한 사람은 강도에게 마지막 넝마를 빼앗기고 마지막 돈을 빼앗기는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고발을 두려워한다. 강도가 수용소 당국보다 막강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강도는 노동자를 구타하고 노동을 강제한다. 수만 명이 강도에게 맞아 죽었다. 수용소에 수감된 수십만 명이 강도의 이데올로기에 정신적으로 타락하여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깡패의 무엇이 수인의 영혼 속에 영원히 자리를 잡았고, 강도와 강도의 모럴은 모든 사람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영원히 남겼다.
수용소 관리는 난폭하고 잔인하며, 교육 담당자는 거짓말쟁이이고, 의사는 양심이 없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을 타락시키는 깡패 세계의 폭력에 비하면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수용소 당국은 그래도 인간이다. 그렇다, 그렇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인간적인 면이 보인다. 그러나 깡패는 인간이 아니다.
깡패의 도덕이 수용소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무한하고 전면적이다. 수용소는 완전히 나쁜 인생 학교이다. 유익하고 필요한 것은 누구나 아무것도 거기서 얻지 못한다. 수인 자신도, 그 관리도, 경비도, 우연한 목격자도, 이를테면 기사, 지질학자, 의사도, 수용소의 상관도, 그 부하도.
수용소 생활의 1분 1초가 독이 되지 않는 시간이 없다.
거기엔 인간이 알아서는 안 보아서는 안 될 일이 너무 많다. 만약 보았다면 죽는 편이 낫다.
수인은 거기서 노동에 대한 혐오를 배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채울 수 없다.
수인은 거기서 아첨과 거짓말, 크고 작은 비열한 행위를 배우면서 이기주의자가 된다.
자유의 몸으로 돌아갈 때 수인은 수용소 시절 동안 자신이 성숙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관심이 편협하고 부족하고 난폭해진 것을 안다.
도덕의 벽이 어디론가 옆으로 밀려났다.
비열한 짓을 하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거짓말하고도 살 수 있다.
약속은 할 수 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친구의 돈을 술값으로 써 버릴 수 있다.
구걸하며 살 수 있다! 걸식하며 살 수 있다!
사람은 비열한 짓을 하고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수인은 태만, 거짓,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증오하는 데 익숙해진다. 자기 운명을 슬퍼하며 온 세상을 비난한다.
사람에게 저마다의 슬픔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자신의 고통을 과대평가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동정을 잊어버린다. 그냥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회의. 그것은 아직 괜찮다. 그것은 수용소의 유산 중 아직 나은 편에 속한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배운다.
그는 두려워한다. 겁쟁이가 된다. 자신의 운명이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밀고를 두려워하고, 인간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도덕적으로 분쇄되었다. 도덕관이 변했는데, 그 자신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
『콜리마 이야기』, 「적십자」, 252-254쪽
우리 삶의 콜리마.
우리네 삶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뒤섞여 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콜리마 이야기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등장인물은 모두, 스탈린 체제하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강제 노동 수용소인 콜리마에서 수용 생활을 한다. 그들은 금광, 도로건설, 벌목 등의 강제 노동을 하며 하루하루가 추위와 배고픔에 내던져 진다. 이들의 죄목은 정치범 또는 인민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수용된다. 이들을 신고한 사람은 가족이나 주변인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죽음이라는 공포 아래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리고 만다. 결국 진정한 적은 자기 자신이다.
이들의 죄명은 정당한가. 누가 그들을 죄인이라고 얼굴을 마주하고 부를 수 있을까.
콜리마에서 수용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 즉 식욕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는다. 빵을 먹기 위해, 더 많이 먹기 위해서가 아닌 무엇이라도 먹기 위해서 끊임없이 계산을 하고 도둑질을 한다. 파손된 소포 상자에서의 설탕은 달콤한 욕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것임에도 내가 취할 수 없는 짐짝이 된다. 펄펄 끊는 냄비의 내용물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결국 누가 먹고 누가 쟁취하느냐가 그 날 밤을 지배한다.
너무나 혹독한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어떤 이는 장애인이 되려고 스스로를 해하기도 한다. 지금보다 나음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수용소 안에서는 소용이 없다. 생각은 망상이고 행동은 지나친 이기심일 뿐이다. 지금, 여기는 죽음보다 더 한 삶이기 때문이다.
잠 못 이루는 밤, 굶주림, 오랜 중노동, 얼음물 속의 금광, 겨울의 추위, 호송병의 구타, 이러한 것들은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오래토록 생채기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뼛속 깊이 차오르는 기억의 조각이 그네들의 밤을 타고 때론 고통으로 때론 아픔으로 때론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갈증처럼 남은 삶을 채워 나갈 것이다.
연중 9개월이 겨울이며 북극권에 속하는 콜리마 지역은 러시아 북동 지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어느 지점은 겨울의 냉기가 부는 빙하지대가 있다. 소소한 일상의 부분을 차지하는 아픔 혹은 고통이 밀집되어 있는 곳, 그곳이 콜리마 지역이다. 내 삶에 격리 시킨 사람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 실연당한 아픔 등등 콜리마 지역은 춥고 배고프고 아프고 쓰라림이 가득 쌓인 곳이다.
인간의 뇌는 힘들고 아픔 기억을 조각처럼 나누어서 기억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 같은 경험이 왔을 때, 대비하기 위해서 기억을 작게 작게 쪼개서 그 시간은 더 더디고 느리게 간다. 그러나 시간은 같은 비율로 나누어져 있고 항상 같은 속도로 지나간다. ‘이 또한 지나간다’는 말처럼 지나가기 마련인 것이다.
그 느림의 시간을 견디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더 단단해 진다.
작가는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최악의 삶이라 해도 그것이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의 교대로 이루어지며 실패가 성공보다 많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커다란 삶의 그림에서 우리의 콜리마 지역은 그 그림을 더 아름답게 해주는 부분이며 없어서는 안 될 우리의 모습이자, 나 자신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의 삶도 녹녹치 않다. 그 안을 어떻게 들여다보고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자세만 있을 뿐이다. 어느 정도의 작업량을 했든지, 우리는 끊임없이 땅을 파고 나뭇가지를 줍고 침대에 모로 누워 배고픔을 달랠 뿐이다.
콜리마 이야기는 스칼린 시대 콜리마 지역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17년 만에
기적적으로 생환한 작가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하는 소설이다.
수용소의 배경을 바탕으로 하다 보니 처음부터 소설은 참으로 무겁게 다가올 것
같지만 그런 선입견과는 달리 너무나 무심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하나
이야기를 던져 놓는다. 내용은 아무렇지 않은데 작가가 그 이야기를 주는 방식은
풀어놓는 것도 전달하는 것도 아닌 그냥 아무렇지 않게 던져 놓는 식이다.
이런 스타일이 처음에는 읽는 내내 불편하고 무겁게 다가오지만
오히려 여러 등장인물들에 대해 나에게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찬찬히 볼 수 있게 하여 뒤쪽으로 갈수록 이야기에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첫 대목부터 눈밭을 닦는 것은 작가의 몫이지만 그 길을 걸어가던, 차로 가던,
트랙터를 타고 가던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고 시작한 것처럼
나는 콜리마소설을 통해 작가가 겪었던 특별한 경험을 들으면서 오히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을 아니 나라는 인간 존재의 날 것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책이었다.
을유세계문학전집 76 <콜리마 이야기>
<콜리마 이야기>는 작가 바를람 살라모프가 17년간 콜리마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중노동을 하고 석방된 뒤에 그 체험을 가지고 쓴 글입니다. 많은 평론가들은 그를 “20세기의 도스토옙스키다”라고 말합니다. 상당히 비극적인 상황을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작가의 글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저번 달에 읽은 <인듀어런스>와 맞물려서 말이죠.
두 작품 모두 극한의 상황에서의 인간에 대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p26 비상 상황에서만 약자는 강자에게 욕을 하게 된다. 그것은 절망의 용기다.
특히 소설 내내 이 절망의 용기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콜리마 이야기>는 수용소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소설을 보면서 이것이 비단 수용소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도 극한의 상황 왕왕 만나곤 하니까 말이죠.
하지만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p62 우리는 최악의 삶이라 해도 그것이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의 교대로 이루어지며 실패가 성공보다 많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중략) 우리는 진실과 거짓이 자매 사이며 세상에는 수많은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63 우리는 약자가 되고 만다. 우리는 적은 것에 만족하고 적은 것에 기뻐하는 법을 배웠다.
<콜리마 이야기>를 읽으며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행복의 본질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지요. 너무나 바쁜 요즘입니다. 무엇을 위해 우리는 이렇게 바쁘게 사는 것일까요
너무 바쁜 우리의 일상이 꼭 콜리마 수용소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가며 우리는 종종 약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의 약자는 약한 의지력을 가지거나 삶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의 약자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거기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운 사람을 뜻합니다. <콜리마 이야기>는 그런 약자가 되는 방법에 대한 하나의 길을 말해주고 있는 책입니다. 어깨에 힘을 뺍시다. 힘을 빼고 약자가 되어 오늘 하루를 음미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합니다.
콜리마 이야기는 하나의 제목에 에피소드가 나오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주인공이 만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묘사한 글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가 써 놓은 한 줄 한 줄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춥고, 배고프고, 일을 해야만 하는 관계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걸까? 스스로에게 반문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내가 만약 콜리마에서 그들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내가 온전히 살아 남았을까?? 인권이라는 것이 없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침을 뱉으면 허공에서 얼음으로 변하는 바로 그 혹한은 인간의 마음에까지도 미쳤다.... 몸이 추우면 마음도 얼어버리게 된다. 혹한...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한 추위일 것이다. 그곳에서 추위를 견뎌내고 살아남는 것. 생존이 오로지 목적인 곳.
콜리마 이야기를 읽는 내내 감사의 마음이 절로 들었다. 지금 이렇게 따뜻한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우정도 느낄 수 있다는 것, 사랑도 있다는 것, 그리고 함께가 즐거울 수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의미로운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