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을유문화사에서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을 새로운 번역으로 내놓았다. 작가의 처녀작인 <시스터 캐리>를 인상적으로 읽어 이 작품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서평단 모집을 해 과연 당첨될까 반신반의하며 신청했는데 감사하게도 을유문화사에서 선정되었다는 메일을, 이튿날엔 책을 보내주었다! (이렇게 서평단으로 책을 받은 적은 처음이라 무지 설렜고 여기저기 자랑한 건 안 비밀!^^) 그렇게 만난 이 작품은 역시 시어도어 드라이저가 시어도어 드라이저 했다. 자연주의 소설답게 작가는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인물들은 거침없이 움직인다. 이야기가 우리네 삶과 맞닿아 있어 어렵지 않게 술술 넘어간다. 무엇보다도 워낙 흡인력 있어서 책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길이는 대략 1500쪽으로 긴 편이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해본다. 평소엔 최대한 스포가 없이 적지만 아무래도 서평을 적으려다 보니… 양해 부탁드린다. 총 3부로 이뤄져 있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클라이드 그리피스이다. 1부에서 클라이드의 유년시절과 청소년기가 나온다. 가난한 길거리 전도사 부부의 아들인 클라이드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길에서 보는 잘 살고 부유한, 사치스럽고 화려한 사람과 세계를 선망하며 그들처럼 되고 싶어 한다. 그런 클라이드는 호텔 그린데이비슨의 벨보이로 취직한다. 클라이드는 가난하지만 화려하고 쾌락적인 삶을 쫓아가는 천박한 벨보이 친구들과 어울린다. 그러다 수습할 수 없는 사고를 치고, 라이커거스로 도주한다. 2부에서는 클라이드의 큰아버지인 새뮤얼 그리피스가 나온다. 카라 제조 공장을 운영하는 그는 라이커거스의 부유한 명문가이다. 클라이드는 큰아버지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그 연줄로 공장에 취직한다. 여직공을 관리 감독하는 직책을 맡게 된 클라이드는 여직공과 연애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어기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난한 배경)인 로버타 올든과 몰래 사귄다. 한편 라이커거스의 사교계에서는 클라이드의 성 '그리피스'에 대한 아첨으로 그를 여러 모임에 초대한다. 그런 모임에서 클라이드는 예쁜 부잣집 딸 손드라에게 반한다. 사랑과 허영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손드라는 클라이드와 철없이 어울린다. 손드라와의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실현할 수 있겠다는 희망에 찬 클라이드는 로버타와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한다. 그런데 로버타가 임신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여러 번 낙태를 시도하지만 잘되지 않자 로버타는 클라이드와 절대 헤어질 수 없으며 당장 결혼할 것을 요구한다. 클라이드는 손드라를 포기할 수 없었고 로버타가 수영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 착안, 호수 뱃놀이를 가장하여 로버타를 살해한다. 3부에서 클라이드는 살인 혐의로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다. 지난한 재판 과정에서 클라이드는 변호인단과 사형을 면하기 위해 여러 준비를 한다. 하지만 배심원과 여론은 '가난하지만 성실한' 아가씨를 꾀어 임신시킨 후 자신의 출세를 위해 살해한 번드르르한 클라이드에게 등을 돌리고 사형 선고를 받는다. 모두로부터 외면받은 클라이드는 종교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한 채 죽는다.
루카치는 현대 소설이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문제적 개인 의 이야기라고 본다. 이 작품이 나온 1925년 <위대한 개츠비>는 이 명제를 따라가지만 <아메리카의 비극>은 조금 다르다. 작품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개인은 없다. 또한 욕망과 허영, 자신의 입장 등을 사회적 상황이라는 맥락과 총체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문제적 개인 역시 없다. 하나의 세계 속에서 오로지 하나만을 알고 돌진하는 불나방들만이 존재한다. 이 작품 속 모든 인물은 오로지 하나의 원칙만을 갖고 있다. 타인을 이용해 자신의 출세, 이기적 행복, 물질적 성공을 성취하는 합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본래 미국의 이상은 벤저민 프랭클린과 청교도의 믿음이다. 신분이 비천하더라도 근면 성실하게 살고 용기와 의지를 갖고 살면 물질적인 성공이 따라온다는 믿음. 이 믿음을 가진 수많은 이민자는 미국으로 건너오고, 미국이란 나라의 발전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이 믿음은 거짓이 되어버린다. 본래 정직한 삶이란 목적에 경제적 성공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되며 경제적 성공이란 목표에, 정직은 거짓 형식으로 남는다. 부의 세습과 경제적 신분의 철옹벽화 때문이다. 앞서 말한 욕망의 삼각형 이론에서 말한 개인과 중개자의 먼 거리가 사라지게 된 것은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이다. 프랭클린과 청교도들은 개인이 근면하게 살아도 행복할 수 없게 가로막았던 신화나 신분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 이후 사람들은 다시 그 폭력의 굴레를 반복한다.
여기서 잠깐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을 빌려 이야기를 이해해보자. 한 개인은 어떤 가치(돈, 성공, 사랑 등)를 원한다. 그런데 이 욕망은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개인 자체에게서 나오는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중개자)을 통해서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클라이드를 보자. 클라이드는 호텔에서 익명의 무수한 사람들을 보며 자신도 부유하고 화려해 보이기를 막연하게 소망한다. 그리고 자신과 닮은 사촌 길버트를 보며 자기도 돈만 있으면 그처럼 화려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이런 출세에 대한 소망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욕망은 개인과 중개자 사이의 먼 거리, 신화나 신분이라는 건널 수 없는 금지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동경 혹은 존경으로 끝날 뿐이다. 예를 들어 돈 키호테는 기사 소설을 통해 기사가 될 것을 다짐한다. 그렇다고 소설 속 기사를 질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상, 혹은 신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신분제 사회에서 아래 계급의 사람은 절대 상류 계급의 사람을 시기하지 않는다. 신분이란 극복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는 다르다. 여기에서 비극이 시작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것을 욕망하든 그것을 교환할 수 있는 사회이다. 즉 돈만 있으면 된다는 것. 개인과 욕망 가치(돈, 성공, 사랑 등)은 과거와는 다르게 아주 가까워진다. 그렇게 되면서 개인은 욕망의 중개자인 사람을 선망하면서도 미워하게 된다. 예를 들어 클라이드는 길버트를 보며 자기도 부유한 부모님을 두었으면 그 못지않았을 텐데 하는 질투심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거만한 길버트를 동경한다. 이런 양가적인 감정은 다른 믿음에서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돈만 있으면 자기도 멋진 인간이 되리라는 확신. 돈만 있으면 예쁜 여자를 가질 수 있고, 멋진 차를 탈 수 있고, 비싼 음식과 술을 즐길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어느샌가 자신의 자아가 되어버린다. 이미 자신은 그런 화려하고 멋진 인간인데 돈이 없어서 이런 초라한 삶을 살아간다고. 그러다 보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미워하고, 자신의 현실을 증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폭력적 굴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심지어 로버타도 그러하다. 독자는 로버타가 안쓰러우면서도 마냥 불쌍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클라이드에게 감정 이입하며 읽다 보면 로버타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이유에서 로버타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엔 로버타나 클라이드나 똑같은 인간이다. 로버타는 일단 자신과 결혼하고 나중에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면 이혼해 주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그리피스'라는 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로버타가 '그리피스'라는 성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나, 클라이드가 손드라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나 내 눈에는 똑같이 보인다. 물론 성격과 성별의 차이로 둘의 운명은 다르게 흘러갔으나, 비극적이란 점에서 일치했다는 거 역시 똑같다. 낙태는 권리이니 아니니 왈가왈부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로버타와 클라이드 모두 타인을 자신의 이기적 행복을 위해 도구화하는 태도가 근본적인 문제라는 말이다. 저때 낙태가 합법이라고 한들 이기심이 남아 있는 한 제도적 자유는 인간적 자유를 실현할 수 없다. 신분은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이기심으로 경제적 계급이 다시 생긴 것처럼. 지방 검사 메이슨 역시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목 아래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겠다는 저의가 있다. 그리고 클라이드를 살인죄에 격분하는 일반 시민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클라이드가 분명히 잘못했다. 도덕적 지탄과 비난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시민들은 감정적으로 클라이드를 미워한다. 로버타에게 이입하여 가난한 저들을 기만하고 저버린 클라이드를 사형할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런 폭발적인 분개심은 현실에 대한 증오심을 반증한다. 그들에겐 상류에 속하는 클라이드는 그들에게 잡혀서 갈기갈기 찢긴다. 상류계급을 넘보기는커녕 질투조차 못하고 내적 체념과 자기 포기에만 시달린 이들이다. 그들의 격분은 현실에 타협하며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스러운 삶의 히스테리컬 한 표출로 보인다. 제 딴에서는 정의심에 불탄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막상 진짜 잘 사는 상류층 사람들은 여기저기 꽁꽁 숨어 잘 살아간다.
한편 부르주아 사람들도 흥미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길버트 먼저 이야기해보자. 클라이드의 사촌인 길버트는 클라이드와 매우 닮았으나 그보다는 인물이 처진다는 묘사가 나온다. 길버트는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클라이드를 차갑게 대한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그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운이 좋아 부유한 집에 태어났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클라이드 신세라는 것을.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시종 거만하지만 나중에 살인죄로 체포된 클라이드 소식을 듣고 내심 찔려 하는 길버트는 부르주아가 얼마나 속 빈 강정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손드라 역시 이기적이고 철없는 부잣집 아가씨이다. 손드라는 허영에 가득 찬 인물이다. 손드라는 클라이드가 아니라, 클라이드의 사랑을 받는 손드라 자신을 사랑한다. 이건 뭐 클라이드의 체포 소식을 듣자 자기에 대한 소문이 도는 것을 걱정하는 모습만 봐도 그러하다. 손드라는 길버트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는데, 그녀의 허영심을 채워주지 않는 길버트 대신 클라이드를 이용한 것 같다.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는 손드라의 모습은 어리석으면서 귀엽기도 하고,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해서 여러 감정이 들었던 인물이다. 말 나온 김에 몇 자 더 적자면 소설 속에 여러 연애 관계가 나오지만 그들 중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사랑에 빠진 자신을 사랑하거나, 연인의 맹목적인 사랑과 숭배를 받는 자신에게 빠져있거나, 예쁘고 발랄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신에게 취해있을 뿐이다. 내지는 신체적 매력에 반하는 욕정뿐.
책을 읽으면서 2가지 독서를 했다. <아메리카의 비극> 이야기 자체를 읽는 것, 그리고 인물들의 행동을 보며 즉각적으로 드는 내 생각을 읽는 것. 예를 들면 클라이드의 누나, 로버타를 보면서 신세 망치지 않으려면 몸간수를 잘 해야지라는 생각, 클라이드가 사고 친 후 당혹스러워하는 새뮤얼과 길버트를 보며 못 사는 사람들이랑은 어울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 손드라를 보며 비슷한 계층끼리 어울리는 게 신세에 좋다는 생각, 클라이드의 신분 상승 욕구에 공감하면 로버타가 밉고, 로버타의 처지를 생각하면 클라이드가 밉고 등등 - 나도 이미 철저하게 자본주의화된 사람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일 먼저 드는 이기적, 혹은 합리적 느낌이 있다. 그 느낌을 나 스스로 다시 읽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다. 본래 이성은 행복을 얻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이성적일수록 행복은 없어지고 이성적 사고와 이기심만 남는다. 몸간수를 잘하고 나보다 못 사는 사람들과 안 어울리고, 나랑 비슷한 혹은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과 사귀는 것 - 이런 이성적 사고 끝에 무엇이 있는가? 그 종착지가 클라이드에게는 전기의자였다. 이런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 이성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 걸까. 이건 나도 모르겠다. 타인을 도구화하지 않기. 존중하기. -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나를 등쳐먹는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서 나 혼자 정직하게 살겠다 는 어불성설. 그렇다고 다들 그러니까 나도 통수 치면서 살래~하는 건 제 살 깎아먹는 짓이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천정부지 오르는 집값 문제만 봐도...
중요한 것은 이성적인 삶으로는 행복할 수 없어 종교로 돌아가야 해, 하고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 소설 속에서 클라이드의 어머니와 맥밀런 목사는 클라이드를 이해하지 못한다. 당연하다. 종교적 세계에서 욕망은 이미 실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대 클라이드의 욕망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에필로그에서 암담한 씨앗, 러셀을 남겨둔 채 이야기는 끝난다. 그런데 난 작가가 이 종교계는 약간 쉽게 생각하고 간과한 것 같다. 스님 생활 잘 하려면 처세술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 있던데…. 종교계, 문학계, 학계 등 '여기는 사회의 원칙이 통용되지 않는 외부 공간이에요' 하는 곳이 더 철저하고 엄격한 시스템이 있는 거 모르는 사람 있나? 종교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품에서야 신과 구원, 회개밖에 모르는 모지리로 그려지지만 현실에서는 더한 인간들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났던 작품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크로노스는 자신의 권좌를 뺏기지 않기 위해 자식들을 먹어치운다. 내게 그림 속 사투르누스는 미래의 가능성을 먹어치우는 낡고 사라져야 할 추한 것으로 보인다.
클라이드는 자신의 물질적 성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속인다. 엄마, 누이, 로버타, 손드라, 큰아버지 등등. 이런 기만은 미래에 자신이 다다르고 싶어 하는 행복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결국 그의 종착지는 전기의자였다. 그 까닭을 2가지로 생각했다. 개인적 문제와 사회적 모순이다. 클라이드 개인은 타인을 이용하여 자신의 행복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도구화라는 수단으로는 결코 행복을 잡을 수 없다. 클라이드가 설령 범행에 성공하여 손드라와 결혼한 들 행복할까? 그다음이 있고, 또 그다음이 있다. 자신의 욕망 구조에 대한 성찰 없이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클라이드는 어쩌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었을 선택을 먹어치운다. 어머니가 누이를 위해 돈을 달라고 물어보았을 때, 로버타의 처지에 공감하며 연애를 시작했을 때 - 그가 정말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생각해보았더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부가 정말 공평하게 분배되는 사회였더라면. 처음 미국의 꿈처럼 성실과 정직이 성공을 보장해 준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자식들에게 부를 그대로 물려주고, 경제적 계급을 만들어나가고 고집하는 기득권의 모습은 사투르누스의 그것과 일치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 비틀린 꿈이 클라이드를 먹어치웠 듯이 말이다.
자연주의 소설이 매번 그렇듯 그저 현상의 표피만 묘사할 뿐, 성찰이나 방향성에 대한 제시가 작품 속에는 없다. 그저 암울한 결말만 있을 뿐. 자연주의 소설은 그래서 읽을 때는 재미있지만 어째 뒤끝이 찜찜하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표층만 이야기하고 끝내버리는 게 마음에 안 든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그렇게 살아간 인물,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절로 든달까. 비판하면서도 비판하는 대상이 사라져 있는 모순.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사회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야 했는지 독자가 따로 성찰해본다면 또 달라질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다 떠나서 이 소설 참 재미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내달리는 작품 속 인물은 우리네의 삶의 원칙과도 일치한다. 서평단 선정되어서 좋게 좋게 '재미있어요~~' 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시스터 캐리> 읽고 이 작가 재미있는 걸 아니까 신청한 거지, 제임스 조이스나 보르헤스처럼 어려운 작가였으면 신청도 안 했을 거다. 그러니 이 재미있는 책을 어려운 작품이 다수 포함된 을유세계문학전집 중 절대 놓치지 마시길. 길이가 부담스럽겠지만 술술 넘어가기 때문에 독서 초보도 맘 놓고 도전하시라. 서점 가서 앞에 30쪽만 읽어봐도 이건 뭐 다들 알 거 같다.
더불어 을유문화사에서는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욕망 3부작'도 이번 기회에 출간해달라는 요청까지 적어본다.ㅋㅋ 미국 자연주의 문학으로 <맥티그>도 같이 나와있던 데 그것도 읽어보고 싶다.
+ 3부는 거의 이야기 안 하고 넘어갔지만 법과 정의의 문제와 연관 지어 생각해보기 좋다. 이만큼도 쓰기 지쳐서 쓰다 말았지만.. 아도르노는 정의가 법으로 몰락한다고 말한다. 법이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모습이 이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죽은 로버타가 정의를 실현하겠다면서 검찰에게도 어떻게 이용당하는지 눈여겨보자. 감성팔이로 로버타의 불행이 이용당하는 걸 보면 클라이드나 메이슨 검사나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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