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에게 공감 받는 문학작품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품에 투영된 작가의 삶과 독자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 속에서 느끼게 되는 무엇이 있어 시간이 지나도 회자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명하고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받는다는 것이 꼭 나에게도 똑 같은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책을 선택하고 읽어가며 매번 스치는 생각이 읽어가는 독자인 나의 상황에 따라 너무도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된다. 내 수준이 아직은 작품의 배경을 이해하고 분석하며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점이 무엇인가를 세심하게 살펴 작품을 평가하기 보다는 읽어가는 동안 내가 받게 되는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 더 중요하다.
저자 헤르만 헤세는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시대상황, 아픈 몸과 그를 괴롭혔던 전신병력, 순탄치 못한 가정생활과 몇 번의 결혼의 실패 등 일생을 통해 순탄치 못했던 생활을 보여준다. 이러한 헤르만 헤세의 삶을 통해 짐작되는 것은 그가 몸담고 살아가는 현실 세상과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과 괴리에서 오는 거리감을 시와 소설, 그림으로 메워가는 삶이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한 [요양객]은 헤르만 헤세의 작품으로 방랑, 요양객, 뉘른베르크 여행이 함께 실려 있다. [방랑]은 가이엔호펜과 베른에서의 삶을 떠나 남부 스위스 테신의 자연적 삶으로 옮겨 가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열 세편의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방랑은 농가, 산길, 마을, 다리, 나무, 비오는 날, 한낮의 오후 등 자신을 둘러싼 자연환경과 자신을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요양객]은 아픈 몸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육체적 고통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자신의 심리적 변화를 자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치료 목적으로 찾아간 온천에서 새롭게 만나는 환경, 사람들과 자신의 구체적 상황을 연결하며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지만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가는 자신만의 비법을 보여준다. 다른 환자와 자신의 비교, 음악회에 대한 인상, 네덜란드 사람에 대한 반응, 자신이 묵고 있는 방 등에 대해 다른 기준으로 바라보는 자신에 대한 성찰의 과정처럼 보인다.
[뉘른베르크 여행]은 헤르만 헤세가 시낭송회 초빙을 받고 여행을 하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행을 결정하기까지의 마음의 갈등, 여정에 대한 기대와 실망, 만남과 위로와 행복감에 대해 세심하게 그려가는 자신의 심리적 변화가 잘 나타나고 있다.
요양객에 실려 있는 방랑, 요양객, 뉘른베르크 여행에는 묘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괴리감, 이방인,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는 사람, 때론 땅으로부터 발을 빼서 허공에 머무는 것 같은 느낌이 그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단절에서 느끼는 심리적 변화나 세상과 자신을 분리해 내서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드러나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 뿐 아니라 책을 읽는 독자도 현실의 삶 속에서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현대인이 일상에서 느끼는 점, 살아가야 한다는 이유로 현실과 타협하는 자신과 도덕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신 사이에서 오는 갈등도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가장 매력적인 인간이 열두 사람 중 나머지 열 한명과 구분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한 가지 면을 보고 그을 알아본다] (본문 157페이지)
사람들 속에서 열두 사람 중 한명을 구분해 내는 유의미한 나만의 기준이 뭘까? 아니 그런 기준이 있기는 한 걸까?
[요양객 / 헤르만 헤세 / 김현진 / 을유문화사]
11월을 지나 12월이 되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몸도 움츠러들고,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면서 마음도 허전해진다. 때마침 읽게 된 ‘요양객’은 이 계절의 분위기 - 쌀쌀함과 허전함 - 와 잘 어울렸다. 내가 생각하는 ‘요양’은 뭔가 힘에 부치고, 활동이 느리고, 허전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요양객’에게도 그와 같은 느낌이 든다. 사람들은 요양객을 측은하게 바라본다. 요양객들도 자기 자신을 측은하게 여길까. 요양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생의 즐거움을 찾는 이들도 있다. 삶에는 겉보기와 다른 일들이 많다.
헤르만 헤세는 48세 때 좌골신경통으로 요양을 하게 된다. 헤세는 요양지 바덴에서 지내는 동안, 다른 요양객들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 요양소의 일들을 글로 쓴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요양소의 생활이 따분할 것 같지만, 헤세는 나름 재미도 찾고, 진지한 대상도 찾고,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도 정화하고 다양화시킨다. 일상과 감상으로 엮은 산문은 그의 소설과는 다른 느낌이다. 소설이 딱딱한 느낌이었다면 산문은 더 틈(여유)이 있고, 부드럽다.
헤르만 헤세.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시인이고, 철학자이며, 구도자이다. 현대문학의 획을 긋는 작가다. 헤세에게선 ‘방랑’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그것은 ‘구도자’와 ‘자유인’의 의미와도 같다. 한때 헤세의 ‘방랑(자유, 구도)’에 이끌려 그의 작품을 찾아 읽었는데, 그 당시의 생각은 ‘글이 좀 어렵다.’, ‘우울한 느낌, 가라앉은 느낌’, ‘많은 상처를 안고, 그 상처를 숙성시키는 사람.’ 이었다. 헤세의 글에는 혼란스러운 시대상황과 헤세의 성장, 순탄치 않은 개인사가 그대로 스며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우울한 느낌과 상처가 떠오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한 헤르만 헤세의 [요양객]은 헤세의 산문집이다. ‘방랑’, ‘요양객’, ‘뉘른베르크 여행’의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방랑’에는 13편의 산문이 묶여있다. 헤세의 젊은 시절 글들보다 연륜이 묻어난다. 우울한, 고민하는, 힘겨운 그의 초기 작품들보다 나이들어감의 여유와 그 여유에서 비롯하는 능글맞음과 재치있는 입담이 글을 어렵거나 지루하게 하지 않는다.
요즘의 글들이 가볍고, 짧고, 거칠고, 얕다면, 예전의 작품 - 흔히 말하는 고전 - 은 삶의 진지함을 무겁지 않게 담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이감을 지니고, 표현이 속되지 않다. 글이 곧 그 사람을 나타낸다고 한다. 찬찬히 읽어보면 헤세의 글에서 헤세를 만날 수 있다. 치열한 삶을 사는 생활인,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선구자, 탈속의 은둔자, 철학자, 구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헤르만 헤세. 그의 이름에서 풍기는 문인적 향기는 작품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싯타르타도 그랬고, 수레바퀴 아래서(이건 읽은 지 너무 오래되었지만...)도, 그리고 이번에 만난 작품 요양객에서도 편안한 분위기의 섬세한 그의 필치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이 책엔 방랑, 요양객, 뉘른베르크 여행. 세 개의 중, 단편이 실려있다. 일본의 어느 한적한 온천 마을(생각해보니 [설국]의 느낌이 난다.)이 떠오르는 요양객보다 헤세의 눈이 닿는 곳마다, 머무르는 곳마다 깊은 사색과 시가 어우러지는 '방랑'을 읽는 시간이 더 좋았다.
'요양객'은 매우 자전적인 소설로 스위스의 어느 온천마을에서 헤세가 요양했을 때 적은 수기이다. 나이듦의 여유와 재치스러운 입담이 문장마다 스며있어 재미있게 읽었다. 독일 작가이지만 한때 독일인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되고, 아버지의 사망, 아내의 정신병. 그리고 두 번의 결혼 실패, 개인적으로는 건강 악화 등 순탄치않은 삶이였지만 요양객에선 그런 고뇌가 가벼운 농담에 묻혔다. (중에는 작가의 신념이나 습관, 성격들을 알 수 있는 것도 많이 있다.) 연륜의 자연스러움. 그리고 [싯타르타]에서 느꼈던 해탈의 느낌도 받을 수 있었다.
'방랑'속에 담긴 시들은 나의 마음을 유혹하였다. 쉽게 읽을 수 있어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시때문에 이 작품을 자꾸자꾸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그가 하는 말은 모두 옳은 것 같다. 나도 나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