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째 접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집에는 단편 한 편과 중편 두 편이 실려 있는데요, 역시 야스나리 선생의 작품과 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주 딴판으로 안 맞는 것은 아니구요, 몹시 좋다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정도입니다. 만약, 이 작품집에 이즈의 무희만 실려있었다면 별 넷이었을 터인데 천마리 학에서 조금 깎아먹고 호수에서 뭥미? 했기 때문에 별 셋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야스나리 선생을 두 번째 접해보니 하나 깨닫게 된 점은 있습니다. 이 냥반이 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었는지 말이죠. 정말이지 일본의 색채가 강렬한 작품들입니다. 그리고 고풍스러우면서도 묘하게 품격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은 이즈의 무희라는 짧은 단편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요.
한 고아 엘리트 학생과 천대받는 무희 소녀와의 애틋한 감정을 이야기는 묘사하고 있는데요, 그 느낌이 아주 고급스럽습니다. 풍경 묘사가 정말이지 절륜하고요, 일본만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일본인만의 고유한 감정의 색채가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적으로 표현하자면 영화 <서편제>같은 느낌이 좀 있었어요.
나긋나긋하니 조용하고, 찬찬히 산과 들을 둘러보니 그 시선이 여유롭고, 애틋하니 닿을 듯 말듯한 감정선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하고, 잔잔하고 따뜻하고 풍요로운 느낌의 작품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설국> 보다도 이 작품이 훨씬 나은 것 같았습니다. 야스나리 선생의 모든 작품이 이와 같은 느낌이었다면 한번 애정해 볼 만했을텐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그게 문제라면 문제였달까요?
이어지는 천마리 학은 말하자면 어쩐지 영화 <감각의 제국>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야스나리 선생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감각의 제국 같은 분위기를 조금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토속적인 문화 풍경이 살아있으면서도 뭔가 관능적인 느낌이 혈관의 맥박처럼 종종 펄떡이는데 그 관능이 뭐랄까, 퇴페적인 것은 아니고 좀 자연스러운 느낌이랄까요? 삶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잊고 잊다가 문득 뛰는 심장 소리처럼 말이죠. 이 작품은 센코쿠 시대 히데요시 정권아래서 부터 시작되었던 센 리큐의 다도 문화가 중점적으로 소개됩니다. 그리고 변태스러운 일본인의 성문화도 자연스럽게 소개되지요. 아버지의 정부를 아들이 응? 하고 정부의 딸도 아들이 쓰읍, 하는 뭔가 욕심쟁이 우후훗, 이상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너무 태연하게 자행되는 지라, 아하, 그리하여 일본의 AV 문화가 그토록 발전한 것이로구나, 하고 제 식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질펀한 정사씬이 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 것 같은 느낌이 오면 마치 70년 대 영화처럼 화면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장면이 바뀌고는 이미 끝났다! 20년 전에는 이런 식의 편집을 범죄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뭐, 남이 뭘 하든 크게 관심이 없는 야동 1테라바이트의 소장자입니다.
마지작 작품 호수는, 그야말로 조금 뭥미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미행하는 변태 기질의 요상한 긴페이께서 야동에서나 볼 수 있는 소프 샵에서의 마사지 씬을 필두로 이야기는 시작되는 데요, 뭔 얘기를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더군요. 전직 국어교사였던 긴페이는 자기 제자와 사랑 때문에 학교에서 짤리고 그와 인물만 연관되어 패전 직후의 일본 풍경을 그려내었다는데 글쎄요, 재미도 엄꼬, 뭔말인지도 모르겠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묘했던 건, 그런 상태라면 급격히 집중력이 분산되어 읽어나가는 시간이 점점 더뎌 졌을 터인데 그렇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게 뭘까, 하면서 줄줄 따라가다보니 응? 하고 끝나버려서 오히려 어라? 그런 느낌이었달까요?
어쨌거나 자살한 작가들의 작품에는 묘한 요기가 서려있는 듯 싶습니다. 제가 그렇다고 생각해서 더 그런 것 일테지만, 딱히 그래서 그런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뭔가 기묘한 공허와 손에 잡힐 듯 리얼한 고독이 정말이지 깊이, 아주 오래전에 옷에 베어버린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남아있는 느낌입니다. 흐음. 묘해.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처럼 음침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좀더 객관적으로 담담한 어른의 작품이라는 느낌이 있어요.
『이즈의 무희, 천 마리 학, 호수』
가와바타 야스나리(지음)/ 을유문화사(펴냄)
작가 본인이 소설처럼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가와바타 야스나리. 많은 분들이 사랑한 일본 작가. 소설 《설국》의 작가로 알려진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은 천재 소설가, 너무 짧은 삶을 살다간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단편 세 편이 실린 책. 책꽂이에 1년 넘게 꽂혀있던 책 『이즈의 무희, 천 마리 학, 호수』를 드디어 읽었다ㅎㅎ
무희의 움직이는 발동선을 따라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책표지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는데...
책의 저자는 일찍 고아가 되었고 조부모의 손에 성장하지만 열다섯 나이에 조부모가 모두 돌아가시자 천애 고아가 되었다. 늘 죽음을 생각한 작가, 병약함과 우울감, 고아 주의는 그의 작품에 드리워진 그늘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이즈의 무희》 주인공 역시 스무 살 나이 세상으로 나온 어쩌면 작가 본인의 삶을 보여준다. 우연히 알게 된 유랑 가무단의 뒤를 따라 그들과 함께 동행하게 된다. 당시 유랑 가무단은 천대받는 직업이었다. 책에서 가무단을 천시하는 사람들의 시각을 읽을 수 있었다. 성숙한 차림을 한 무희가 알고 보니 이제 열네 살의 앳된 소녀 가오루의 나체를 보게 되는 장면이 아마 클라이맥스 아닐까?
이후 이들은 허무한 여행을 마치고 헤어진다. 서로 끝없이 돌아보는 장면 여운이 남는다...아.. 사랑일까?
이즈는 온천이 유명하다고 한다. 작품의 배경이 된 곳에 한 번 꼭 가보고 싶네...
두 번째 작품 《천 마리 학》은 내게 충격으로 다가온 작품인데...
돌아가신 아버지의 정부 오타 부인과 사랑을 나누게 되는 기쿠지. 그리고 정부의 딸 후미코. 이들의 관계는 기묘하기까지 하다. 글쎼 이해? 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이런 삶도 있을 수 있구나 싶었던 작품. 마냥 치정극으로 보기엔 너무나 숙연하고 청아한 분위기랄까? 내겐 정말 일본 소설답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과연 내가 어떤 것을 '일본스럽다'라고 인식하고 있는지 선긋듯이 명확히 드러내 보이기는 쉽지 않지만... 가슴에 커다란 반점을 가진 여자라니 기억에 남는다.
마지막 작품 《호수》의 주인공의 위 두 작품의 도련님 느낌과는 다른 주인공 긴페이가 등장한다. 자신의 추함으로 인해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남자의 삶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위 두 작품에 비해 독창적이고 서정적으로 다가온다.
작가의 삶은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작품이 곧 작가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한 움베르토 에코 님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는 독자로서 일본 소설에 도전(?)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내게 일본 소설은 그들의 '다름'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매번 '이해하지 못한 채' 끝나지만... 섬나라 특유의 무한한 상상력은 정말 부럽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은 더 읽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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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떠난 여행 끝에 흘리는 눈물, 비움
여행은 그 형태도 방법도 다양하다. 미리 꼼꼼하게 일정을 짜기도 하고, 훌쩍 기분 내키는 대로 떠나기도 한다. 누군가와 동행할 때도 있고 혼자 떠나기도 한다. 홀로 떠나는 여행은 오로지 나 자신과 함께 하는 여행이고 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선 이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기도 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는 혼자 여행을 떠난 스무 살 청년이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무희 일행으로 인해 겪는 내면의 변화와 짧은 여정을 그린 단편 소설이다.
‘나’는 스무 살로 혼자 이즈 반도 여행길에 오른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이들은 도쿄 제일고등학교 모자를 쓴 ‘나’를 정중히 대한다. 나흘째 되던 날, ‘나’는 우연히 만났던 무희 일행 을 따라 잡고자 발길을 서두른다. ‘나’는 전날 묵던 유가시마 여관에서 춤추는 무희의 모습을 열심히 지켜봤다. ‘나’는 이들을 다시 만나고, 시모다까지 이들과 함께 가고 싶다고 한다. 가무단은 열일곱으로 보이는 무희와 사십 대 여자 한 명, 젊은 여자 두 명과 이십 대로 보이는 남자가 한 명이다. 이들은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며 친근하게 대한다. 알고 보니 가무단은 혈연, 부부 관계로 맺어진 사이였다. ‘나’가 이들 일행에 관심을 갖도록 한 무희는 풍성하게 올린 머리 모양 때문에 열일곱으로 보였지만 열넷이다. 무희는 ‘나’에게 수줍어하면서도 책을 읽어 달라고 하고, 활동사진을 보러 가자고도 한다. 무희의 오빠인 이십 대 남자는 유랑 중 낳은 아이를 잃은 사연을 털어 놓고 아이의 49일재를 함께 지내자고 권한다. 단순히 아름다운 무희에게 이끌렸던 ‘나’에게 어느새 일행의 유랑이 자연의 향기를 지닌 느긋함으로 느껴지고, 이들 사이를 잇는 애정이 보인다. 이른 아침 도쿄로 떠나는 ‘나’를 배웅하러 나온 무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다.
천대 받는 무희 일행과 동행하며 이야기를 들어 주는 도쿄 청년 ‘나’를 무희와 그 일행은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고아 근성으로 비뚤어졌다는 반성과 우울함에 여행을 온 ‘나’도 이들과 동행하면서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게 된다. ‘나’는 돌아가는 배에서 타인에게 선뜻 호의를 베풀고 낯선 이가 주는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다. 다른 사람의 친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변화된 모습을 깨닫고, 눈물이 흐르는 대로 둔다.
“그것은 머리가 맑은 물이 돼서 주르르 흘러넘치고, 그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달콤한 상쾌함이었다.” (46쪽)
고아 근성, 비뚤어진 마음을 비워내고 내려놓으면서 맑디맑은 눈물을 실컷 흘리는 만큼 ‘나’의 홀가분함은 커지지 않았을까.
<이즈의 무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20대이던 1926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도쿄 제일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18년에 떠난 이즈 여행길에서 악극단 일행을 만난 일이 있고, 이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나’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늦가을 이즈 반도의 풍경을 그려보게 되고, ‘나’에게 설렘으로 슬픔으로 들렸을 무희가 치는 북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며칠의 여행길을 그린 짧은 단편이지만 그 섬세한 아름다움이 잔잔하게 남아 자꾸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이 책에는 세 편의 작품이 담겨있다.
세 편을 읽는 데는 거의 아무런 무리도 없었다. 그러나 단순히 읽는 것 이상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 마음이 흐트러지고 무뎌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결국 세 작품을 다 읽고 나서도 마음에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남아서 움켜쥘 수 있던 생각이란 몹시도 편협한 데다 뻔한 것이라 낙담하기도 했다.
그 생각을 풀어 적으면 이런 문장이 될 거다.
"전 후 일본의 풍요롭고도 빈곤한 세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만큼 망가져 있던 게 분명하다."
전후의 충격은 여러 면에서 일본을 망가뜨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즈의 무희>와 <천마리 학>의 분위기가 전혀 다른 것처럼 느껴진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즈의 무희>에 남아 있던 모호한 아름다움이 <천마리 학>에서는 허무할 뿐 아니라 짓밟히고 침범당한 모습으로 그려진 것 같았다. 이제부터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아름다움보다 연민과 미련으로 가득한 미래를 끌어 안으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망령에 시달리듯, 과거의 꿈 같은 시절을 잊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세 이야기 가운데서 가장 재밌게 느꼈던 것은 <호수>였다. 국내에는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왔다고 하는데 이야기의 짜임새가 좋았다. 등장 인물 가운데 누구하나 버려지지 않고 두루 돌아가며 역할을 받아 쓰이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당사자 둘은 모르지만 사실은 둘 모두가 제각각, 나름의 인연으로 이어진 또 다른 사람을 공유하는 그런 형태였다. 그러나 그나마 <호수>까지 모호한데다 허무하기까지 한 결말로 이야기를 갑작스럽게 끝내버림으로써 허탈함을 부풀렸다.
잘 해내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순간에 결정적인 일격을 당해 허무하게 목적을 잃어버린 채 항복해버린 전쟁과 닮아 있는 결말이었다.
<이즈의 무희>에는 무희 일행을 뒤쫓는 학생이 등장한다.
<천 마리 학>에는 아버지와 무관해지려 하고, 아버지와 거리를 두려 하면서도 마치 아버지의 그림자를 좇듯 이끌려 다니는 남자가 등장한다. 물론 아버지의 환영에 이끌려 다닌다는 건 내 인상일 뿐이고 실제 이야기는 조금 다르게 전개된다. 그러나 '천 마리 학'에 이끌리면서도 멀리 하려고 하는 모순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건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끈질긴 인연의 그림자였다.
<호수>에서는 여자들을 미행하고 다니는 남자가 등장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도 분명 허무함으로 가득차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거기에 무엇인가를 끊임 없이 쫓거나 쫓겨다니고 있을 것도 같다. 이런 쫓고 쫓김의 원인은 다른 데가 아닌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내면에 있을 것이다. 그는 얼마나 고독했기에 끊임없이 무엇, 혹은 누군가를 쫓아다녀야 했을까.
이 세 이야기를 거의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를 길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느낀다.
아, 노벨상을 수상한 것이 1968년 이라기에 나이를 계산해보려고 작가 소개를 읽다가 알게 된 것이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899년 생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69세쯤이 된다. 작가 소개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두 살과 세 살 때 잇달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열 살 되던 해 누나를 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열다섯 살에 조부마저 잃어 완전한 고아가 되었다."
바로 앞에 적었던 '쫓거나 쫓겨다니고 있'는 것의 배경에는 상실과 고독이 숨겨져 있던 모양이다. 작품을 아주 헛 읽은 것은 아니구나 하는 위안이 들기도 하지만 뭔가, 그래도 그렇게 쫓겨다녀서는 안 되는 것 아니었나 하는 반항하는 마음이 움트는 걸 아주 막을 수가 없다.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하는 동정과 공감의 마음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자란다.
부모와 형제 자매, 조부모까지 모두 잃은 것만으로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삶은 고단했을 것이며 흔들렸을 거다.
거기에 나약해질 시기에 나라의 젊은이들의 무수한 죽음을 목격함과 동시에 전쟁의 패망에 더해, 전 후 나라의 타락까지 그대로 지켜봐야했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순간의 나라를 떠나 이상향을 찾아 가고 싶은 마음도 품었던 게 아닐까.
설국까지 읽고 다시 읽어보면 조금 더 나은 인상에 닿을 수 있을까 싶은 막연한 기대도 품어본다.
일본의 노벨 문학상 최초 수상자이자 <설국>의 저자로 잘 알려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중단편집인 <이즈의 무희, 천 마리 학, 호수>. 민음사의 <설국>과 을유문화사의 이 작품 둘다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잘 알려진 <설국>보다는 이보다 먼저 발표된 <이즈의 무희>가 포함된 이 책을 먼저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참고로 이들 작품의 발표 순서는 <이즈의 무희(1926년)> - <설국(1935년 연재 시작~1947년 완결)> - < 천 마리 학(1952년)> - <호수(1954년 연재 시작)>와 같다.
<이즈의 무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초기 작품으로서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작가의 자전적인 면을 투영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 역시 그의 작품에서 지식인의 고뇌 및 그가 겪은 영문학 전공에 따른 갈등을 많이 표현하였다면 <이즈의 무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어릴 적부터 고아로 생활한 이력으로 인하여 자신의 굴절된 인격을 치유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그가 제일고등학교 시절 이즈 방면으로 여행을 가면서 유랑 악단과 함께 한 기억을 되살려 쓴 소설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작품에서 이즈 방면의 여행을 소재로 하면서 그 여행의 공간을 주인공이 당시 천한 계급으로 취급받던 유랑 악단과 함께 하면서 그의 굴곡된 감정을 치유하는 곳으로 설정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요즈음 유행하는 힐링을 위한 여행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꼬불꼬불한 산길로 접어들면서 마침내 아마기 고개에 다가왔구나 싶었을 무렵, 삼나무 밀림을 하얗게 물들이며 매서운 속도로 빗발이 산기슭으로부터 나를 뒤쫓아 왔다." (p.9)
" 선이 시모다 바다를 나가 이즈 반도 남단이 두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난간에 기대어 앞바다의 섬 오시마를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무희와 헤어진 것이 먼 옛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p. 44)
언급된 이 두 문장은 바로 이 작품의 가장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나타내고 있다. 즉, 이 문장 사이의 공간을 일차적으로 생각하면 주인공과 젊은 무희가 소속된 유랑 악단이 함께 여행을 한 공간으로 볼 수 있지만, 좀더 다른 의미를 본다면 이 공간에서 주인공의 여행전 굴곡된 인격이 치유가 되는 속세와 단절된 공간으로 설정을 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책의 마지막에서 이 공간에서 벗어난 주인공의 한층 성숙해진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은 그러한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단순한 이즈 지역이라는 공간만이 주인공의 감정 치유에 영향을 준 것일까? 그와 함께한 유랑 악단의 공이 더욱 컸을 것이다. 가족 규모의 유랑 악단을 눈여겨 보던 주인공은 특히 가장 어린 젊은 무희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들과 합류하여 같이 여행길에 오르게 되는데, 비록 마을에서는 신분의 차이로 인하여 서로 다른 숙소에 머물게 되지만, 무희에 대한 주인공의 지속적인 관심은 어느덧 남에게 천대를 받더라도 밝고 낙천적인 이들 악단 가족에게 녹아들면서 점차 그의 감정은 따뜻하고 밝은 느낌으로 변모함을 보여준다. 여기에 자신의 눈길을 끌던 젊은 무희가 행여 공연이 끝나고 누군가의 수청을 들까봐 조바심을 내는 장면은 풋풋한 주인공의 사랑의 감정까지도 이끌어내는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더욱 재미있는 장면은 온천에서 젊은 무희와 대면하는 장면이다. 사실 이전에 읽은 나쓰메 소세키의 <돌베개>에서도 온천에서 주인공이 숙소의 주인집 딸과 만나는 장면이 떠올랐기에 좀더 기억에 남는다. <돌베개>에서는 성숙한 여인의 느낌을 통하여 묘한 매력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즈의 무희>에서는 오히려 젊은 무희가 생각보다 아직 어린 애였다는 것을 알고 실소하는 주인공을 통하여 무겁지 않고, 발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러한 낙천적이면서 서로를 위하고 심지어 주인공을 공손하게 받드는 무희 일행을 통하여 어느덧 주인공도 그들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과정에 이르게 된다. 아마도 실제 저자가 이즈로 여행을 갔던 때에 느꼈던 감정을 최대한 불어넣은 느낌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마지막의 이별 장면은 애절함마저 느끼게 해주고 있다. 아직 <설국>을 읽어보지 못하였지만, 이 작품과 일맥 상통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천 마리 학>은 다소 독특한 작품으로 다가왔다. <이즈의 무희>처럼 일본의 전통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서 '다도'를 매개로 한 인물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인물간의 갈등 자체가 독특하면서도 다소 우리의 정서와는 이질감이 있다고 생각된다. 주인공인 기쿠지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즐겼던 다도를 통하여 선친과 불륜을 맺었던 여인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특히 아버지와 불륜 관계였던 오타 부인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오타 부인의 딸과도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기쿠지의 행위는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고, 개인적으로도 다소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기쿠지와 오타 부인의 딸인 후미코와 관계를 맺기 전까지의 서로간의 절제된 감정 표현이라든지 이상하게도 오타 부인에게 여자의 느낌을 받고, 그녀가 자살하면서 유품으로 남긴 시노 물병과 찻잔을 통하여 기쿠지가 오타 부인을 떠오르는 장면은 심미적인 표현으로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미(美)로써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공감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제목인 <천 마리 학>은 지카코가 기쿠지와 맺어주려던 이나무라 아가씨의 옷의 무늬인데, 이나무라 아가씨는 작품에서 크게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점이 다소 아이러니하다. 기쿠지 역시 이나무라에게 마음이 있었고, 이나무라 역시 지카모에 대하여 마음이 있는 상황에서 기쿠지가 급작스런 오타 부인과의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그녀의 딸 후미코에 대한 관심으로 인하여 그들의 관계는 끝나게 된다. 어쩌면 <천 마리 학>은 기쿠지가 평범한 삶으로서 도달해야 할 목표로 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오타 모녀와의 비극적인 관계로 인하여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도와 더불어 곳곳에서 저자의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중동의 운치를 느낄 수 있는 표현이 많은 작품으로 생각이 되지만, <이즈의 무희>와 비교한다면 다소 문화적인 이질감이 상당한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라 보여진다.
<호수>는 앞선 두 편보다 좀더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이 아닐까라고 생각된다. 1950년대 초반의 작품인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기존 작품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을 다룬 작품이다. 여성을 미행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모모이 긴페이, 거꾸로 미행자를 의식하면서 말초적인 느낌에 흥분하는 미야코. 서로 단절된 공간에 살아가다가 우연히 이 둘이 만나면서 이야기는 급박하게 전개가 되고, 긴페이와 미야코의 주변 인물들도 여러 경로로 연결되는 과정도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작품이다. 과거 어릴적 호수 근처에서의 경험과 기억들이 현재의 삶에서 긴페이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설정이 독특하고, 이것이 어떻게 여성들을 미행하는 것으로 발전을 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콤플렉스(독특하게 못생긴 발)와 사랑에 대한 상실감을 묘사하고 있다. 긴페이와 미야코의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그들의 인생 이야기의 조각을 차곡차곡 맞추어 나가고 있다. 이 작품이 원래 연재되는 형식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구성은 독자에게 매회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초반의 긴페이의 범죄 아닌 범죄를 묘사하는 장면에서부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전 작품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을 주는 이 작품은 작가 특유의 절제된 표현은 거의 배제가 된 느낌을 주고 있다. 오히려 무언가 감추어서 내면의 미적 아름다움을 이끌어내던 기존 작품과 달리 현재의 장면에서 갑자기 과거로 바뀌는 서술 방식이라든지 극단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이 난무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호수나 반딧불과 같은 다양한 소재를 통하여 기존의 절제의 표현을 대신하면서 그 소재의 단어로부터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함으로써 그의 이전 작품에서 드러난 명맥은 어느 정도 남아 있다고 보여지는 작품이 아닐까라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을유문화사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초기와 원숙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초기의 절제된 아름다움과 작가의 자전적인 성장통을 소재로 한 <이즈의 무희>, 일본 전통 문화와 더불어 다소 에로틱한 소재를 차용하여 인간의 심리를 드러낸 <천 마리 학>, 좀더 복잡한 인간 내면의 심리를 다룬 <호수>로 구성된 이 책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호감이 있는 독자라면 관심을 갖고 볼만한 책이라고 생각이 된다. 또한 이 책을 통하여 처음 접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흔치 않은 인생(고아 출신,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 미시아 유키오의 스승, 노년의 가스 자살)도 알아보는 것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