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미완성이란다. 그의 친구 브로트가 카프카의 명을 어기고 출간하게 됨으로 세상에 알려졌단다. 이 소설이 미완성이라지만 내게는 그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제자리 걸음을 걷는 듯한 이야기 전개에 독자로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지만 이 소설은 아주 집중력있게 읽혔다. 다시 말해, 스토리나 기법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이 소설의 그로테스크한 면이 나에게는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많은 여자에게 쉽사리 흔들리는 듯한 K 그리고 마치 그를 오래 알아온 것처럼 K를 대하는 여자들(뷔으스너터, 세탁부, 레니, 엘자), 그림보다 법원 일에 밝은 화가, 피고를 위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듯한 변호사, 유부녀와 바람난 법대생, 음란도서를 즐기는 예심판사, 성당 신부, 하숙집 여주인 등. 이 처럼 많은 등장인물들 역시 모호하다. 이 뿐 아니라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들 역시 의아한 곳이 많았다. 예를 들면, K의 하숙집 방에서 심문을 하고 가정집과 법정이 연결되어 있고 다락방이 법원 사무처이다. 이것 역시 의문이자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하지만 카프카는 이것들이 왜 그러할 것이라는 유추를 거부하고 단순히 그냥 그 사실을 독자로 하여금 받아 들이게 한다.
K가 소송에 휩싸였고 독자는 그의 소송 내용이라든지 누구로부터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런데 K가 서서히 소송에 집착하게 되기 시작하면서 그의 일상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혹자는 K는 소송을 게의치 않고 법원 출두 명령도 무시하지 않았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역시 K가 소송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하고 그 긴장의 상태들을 여자들을 통해 풀어버리곤 하는 것 같았다.(여자들과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들과의 '정사'는 전혀 없었다. 이 역시 의문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K는 왜 그토록 그녀들에게 집착하는지) 그가 신경질을 부리며 분노하지만 않지만 그의 모든 행동은 소송으로 인해 아주 불안한 상태임을 여러 곳에서 보여준다. 이는 K 뿐만 아니라 소송을 당한 다른 자에게서도 볼 수 있는 모습니다. 또 다른 소송중인 상인 블로크를 보면 이 불안의 상태가 더욱 극대화된 것을 알 수가 있다. 블로크는 변호사를 여럿두고 있다. K가 해당 변호사로부터 변호를 중지하기 위해 그 곳을 갔을 때 블로크는 거의 정신병자와 같은 정도의 행동을 한다. K 앞에서는 무력한 변호사를 힐책하고 나무라더니 변호사 앞에서는 거의 개처럼 엎드려 굽신거린다. 이는 권력에 대한 소시민들의 무조건 적인 복종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지.
뿐만 아니라 K 주변의 모든 이들이 법원과 연관관계를 갖고 있는 자들이다. 제조업자나 부지점장(확실친 않지만 그렇다고 본다. 법원 신부에게 K를 보낸 것으로 봐서) 그리고 법원 신부, 화가 등. 그리고 화가는 가장 이와 같은 인간관계 형성에 대해 아주 적절한 변을 길게 늘어 놓았다. 이런 인맥이 실제 소송사건에서 판정을 보류하거나 가상적 무죄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실제로 프란츠 카프카는 법학을 전공했단다. 그렇기에 법원의 구조나 소송에 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관한 부조리한 면이나 환멸을 느낄 법한 것들을 열거함으로 이 사회 권력에 대한 부조리, 법원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더욱 기이한 것은 K는 채석장에서 두 사나이로부터 칼에 찔려 죽음을 맞게 된다. 어떤 소송이 피고를 무참히 살해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일까? 이를 보았을 때 K는 아주 큰 법적 세력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이렇게 피고를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법의 권한 밖(사형집행이 아닌)에서 죽게 한 것이 아닐지 싶다. 이처럼 이 소설은 모든 것이 불명확하다. 알베르 카뮈는 "모든 것을 제시하지만 아무것도 확증하지 않는 것이 <소송>의 운명이자 위대함이다" 고 말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카프카가 왜 그가 소송을 당했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주력하는 이야기로 풀어갔다면 그것은 법정소설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이 소설 역시 독특한 방식으로 쓰여졌다. 카프카는 소설의 시작과 결말을 미리 써 둔채 가운데 이야기들로 살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쓰다 미완성으로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대개 작가들이 죽음으로 작품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름) 그렇기에 인물에 대해 묘사(수염색깔등) 가 바뀌기도 한다. 어찌보면 완전무결한 작품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 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지고 오늘날까지 그 명을 이어오는 것을 보면 바로 카프카만의 매력이 녹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카프카의 작품들을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프란츠 카프카의 이야기는 역시 소설가답게 참 특이하다. 예전에 읽은 변신도 그랬지만 이번 [소송]에서도 왠지 나른한 기분이 느껴지는 스토리이다.
모순 투성인 세상의 요약판인 법정과 능력을 인정받은 은행 차장인 나는 1년 동안 싸운다. 어느 날 아침. '당신은 소송을 당했고, 체포 되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반 건달같은 사람들이 그의 방으로 쳐들어왔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체포'와는 거리가 있다. 자유로운 생활은 하면서 법원에 정기적으로 출두해야하고 소송에서 이겨야지 지금까지 일궈놓은 삶의 지위를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죄목은 없다. 누구에 의해 소송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모순이고 이 모순은 간결한 사형으로 끝을 맺는다.
그를 도울 것으로 예상되는 세 명의 여인과의 이야기는 나른한 기분이 드는데 한 몫을 했다. 약간의 긴장감이 돌기도 하고, 또 약간 에로틱한 순간이 연출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고, 기상천외한 인물들과 배경들이 프란츠 카프카만의 세계이다.
[변신]을 읽을 때에는 책 자체만 읽었지 작가는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의 장점. 작가나 작품에 대해서 심도있는 해설이 있다는 것. 그래서 알게된 카프카의 문학 세계와 그의 평온하지 못했던 삶. 더욱이 세 여동생의 아우슈비츠에서의 죽음 등은 그의 작품에서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지만 그가 더 오래 살아 작품을 썼더라면 분명 그것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었을텐데..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작품들은 뭔가와 투쟁하고 있고 패배한다. 왜 그럴까? 부조리하고 어둡고, 모순덩어리인 세상에 한 인간은 너무 나약한 존재인 것일까? 작은 인간들이 모여 이 세계가 있는 것인데 세상은 인간을 공격한다. 주인공처럼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또 빨려 들어간다. 그리곤 비참한 모습이 된다.
이런 책을 읽으면 세상은 살 맛나게 살 정도로는 아름답지 않은 것 같다.
카프카의 작품은 그리 친절한 편은 아니다. 그레고리 잠자를 이유도 없이 거대한 벌레로 '변신'시키고-[변신]- 측량기사로 임명한 K를 정작 '성'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던 것처럼-[성]-, 이번엔 요제프 K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소송을 건다.
서른의 나이로 은행 차장에 오를만큼 성공가로를 걷던 요제프 K는 그의 서른 번째 생일날 아침 갑작스럽게 체포된다. 직장 동료들의 짓궂은 장난 정도로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던 요제프는 심리가 진행되고 자신의 소송건을 알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점차 소송건에 집착하게 된다. 숙부가 소개시켜 준 변호사, 은행 고객의 소개로 찾아간 화가, 변호사 집에서 만난 또 다른 의뢰인. 소송을 원활하게 해결하려는 요제프의 노력은 별 소용이 없다. 소송이 제기된 이유 자체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누가 소송을 걸었는지, 그의 죄가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비단 요제프만이 아니다. 그가 만난 다른 피고소인들도 자신의 죄목이 무엇인지 모르기는 매한가지이다. 불공정한 법원을 향한 항의도, 사건 해결을 위한 노력도 무용했을까. 서른한 번째 생일날 저녁 요제프 K가 즉결처형 받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은 무척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준다. 이유 없는 체포, 빈민들을 위한 임대 거축 꼭대기층에 위치한 법정, 법원 사무처의 기묘한 분위기, 의뢰인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변호사, 그런 변호사의 집에 기거하는 의뢰인, 화가의 방과 연결된 또 다른 법원 사무처, 고객의 관광안내를 위해 찾아간 대성당에서 만난 교도소 신부 등. 요제프를 둘러싼 소송은 법정이라는 거대 권력의 횡포를 드러내는듯 하면서도 한편으론 요제프만 모르게 진행되는 한바탕 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더 게임'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의 연극이 주인공을 구원하기 위한 동생의 연출이었다면 [소송]의 연극은 주인공 요제프를 파멸시키기 위한 거대 권력의 음모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겠다.-요제프 한사람을 파멸시키기 위한 연극치고는 좀 거창하긴 하지만-
요제프의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요제프 자신과 변호사, 그를 체포한 감시인과 감독관 등 아무도 소송의 진상을 모른다. 요제프의 첫 심리를 맡은 예심 판사조차도 그의 죄목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요제프의 직업도 엉뚱하게 알고 있는 처지에 무엇인들 제대로 알겠는가?- 그의 죄는 무엇인가?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는가?
그를 심문하는 법정은 확실히 권위적이고 불합리하게 비친다. '법원의 서열과 진급 체계는 끝이 없어서 그 세계를 잘 안다는 사람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이고, 어떠한 불만 사항이 있더라도 '법원에 어떤 개선할 점을 제의한다거나 관철시키려 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변호사는 이와 같이 얘기하면서 '눈 앞의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늘 보복의 길을 찾고 있는 관리들의 각별한 주의'를 끌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조언한다. 제조업자의 소개로 찾아간 화가나 변호사 집에서 만난 한 의뢰인의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법정은 피고인의 입장에서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이다. 피고인의 싸움은 가망없는 몸부림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가 도움받을 가능성도 마땅찮아 보인다. 요제프가 선임한 변호사는 자신의 능력과 과거의 성과를 자랑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소송 해결 방법은 '판사와의 개인적 유대 관계' 정도이다. 하지만 이 마저도 -패소시의 자기 변명을 위해서인지- 수많은 변수를 언급하면서 불확실성을 내비친다. 제조업자의 조언으로 찾아간 화가도 크게 다르지 않는다. 법원 화가로 일하면서 판사 초상화를 그리는 그 또한 판사와의 '개인적 관계'를 강조하지만 실효성은 없어 보인다. 그가 제시하는 구제법은 소송의 무효화가 아니다. 무효화 자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종적 판결의 '지연' 뿐이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렇다면, 요제프는 정말 무죄인걸까? 법원의 호출을 받을 만한 잘못은 소설상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성당에서 교도소 신부와의 대화는 인간의 '원죄'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이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죄. 이미 지은 죄와 앞으로 지을 죄를 모두 포함하는, 인간 내면에 잠재한 악의 가능성. 너무 멀리 갔나? 하지만 요제프가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법원 정리 아내의 유혹에 흔들리고, 숙부의 권고로 찾아간 변호사의 집에선 숙부, 변호사, 사무처장을 남겨두고 시중드는 아가씨와 노닥거린다. 소송에 집착하는 나머지 자신을 찾아온 은행 고객들을 홀대하기도 하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쉽사리 경멸한다. 이러한 태도가 그의 죄와 직결된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의 불안정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해답은 없을 것이다. 법원의 정체, 요제프의 죄, 갑작스러운 처형까지. 그로테스크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수많은 물음표를 던져주며 끝이 난다. 어쩌면 카프카 자신이 묻고 싶었는지 모른다. 부조리라면 부조리고 불완전성이라면 불완전성이라 할 수 있는, 사회와 한 개인의 관계와 갈등을. 그가 느꼈을 혼돈은 소설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카프카의 소설에는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등장한다. 존재적 불안과 관료기구의 폭력성은 카프카 자신의 가족생활과 당시 시대적 분위기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물론 작가의 자전적 요소를 전혀 모른다 해도 카프카의 이야기 자체에서 나오는 문학적 창의성과 철학적 감수성을 만끽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카프카의 문학세계는 현대성의 본질로 소외와 부조리를 강조한다. 요제프 K를 주인공으로 한 중편소설 《소송》도 악몽과도 같은 비인간적이고 관료적인 세상에서 인간 존재의 본원적 불안감을 표현했다. 카프카식 세계는 수수께끼, 미궁, 환상성, 난해성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카프카식 현대성 체험은 비리, 모순, 부조리로 얼룩진 문제적 현실상황이다.
카프카는 현대성의 문제를 '소송'이란 법적 절차를 배경으로 부각시킨다. 가령 법적 영역에서 소송이란 자신의 정의와 명예를 지키고, 세상의 불의와 불공정에 대항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카프카의《소송》은 관료기계의 폐쇄적 형식주의와 절차주의가 인간에게 미치는 극단의 부조리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우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법정은 죄 없는 사람을 무고하고 불법을 자행하는 권력기관으로 그려진다. 또한 법학박사 출신답게 카프카는 법조계나 공직사회의 비리를 풍자하고 있다. 카프카가 생각하는 법의 정신이 문득 궁금해진다. 역자 이재황은 이 소설을 놓고 '마치 표현주의 영화의 과장되고 그로테스크한 영상을 보는 듯하다'고 평한다.
주인공 요제프 K는 전형적인 소시민 스타일이다. 은행차장으로 안정적인 삶을 지향하는 30번째 생일날에 두 명의 감시인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체포된다. 체포는 물질적인 유형의 구금이나 구속은 아니지만 지속적인 감시관이 따라붙는다는 의미에서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한다는 의미의 체포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유형의 체포에 민감하다. 가령 어느날 영문도 모른채 지하 밀실에 갇히거나 어두운 취조실로 불려가는 공포를 은연중에 가지고 있다. 카프카는 이러한 불합리한 공권력에 의한 사적 자유의 침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관료주의에 의한 프라이버시 영역의 박탈을 묘사한다. 저자는 처음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차츰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되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고 한다. 체포에는 아무런 인과적 연관성도 없고 합리적 설명도 불가능한 상태로 주인공의 법적 수순은 결정된 상태였다.
소송이라면 죄목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요제프 K를 사형으로 인도하는 뚜렷한 죄목이 공개되지 않는다. 이것은 고의적으로 불투명성을 유지하여 인간 본연의 원죄적 물음을 던지게끔 만드는 문학적 장치가 된다. 주인공이 소송에 휩싸인 연유는 존재 자체가 곧 ‘죄’라는 카프카적인 존재론적 사고를 반영한다.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는 구약의 욥기와 연관지으며 종교적 해석을 하는데 카프카의 죄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는 실존적 개념이다. 원죄란 말이 종교적 뉘앙스를 풍기지만 요제프 K의 죄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 보다 보편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어 인간의 본질적 존재 양식과 연계된다. 사회의 규범에 적응한 유죄의 인물에게 작가는 법률적이고 도덕적인 기준만으로는 정의 내리기 어려운 죄, 나아가 실존적 차원 내지 종교적 차원까지 암시하고 있는 죄의 문제를 묻고 있다.
개 같은 종말
사회가 거대한 몸짓으로 커지고 발달할수록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규정하는 규범이나 제도는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제도적 장치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생활을 제한하거나 사람들 사이의 소통의 기반을 만들어 가는 것이리라. 이렇듯 사람들의 일상을 규정하는 여러 가지 사회규범이나 제도들은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심리적 거리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것들 중에서 사람의 생활을 대표적으로 제한하거나 구속하는 것으로는 ‘법’과 관련된 일이 아닌가 싶다. 사람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취지는 이해하나 현실에서 법과 관련된 일련의 경험들은 보호라기보다는 오히려 개인의 권리를 구속하는 것으로 나타나기에 심리적 거부감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이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소송’은 ‘성’, ‘아메리카’와 더불어 고독의 삼부작으로 불린다고 한다. 아마도 카프카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주요관심사가 현대 사회 속 인간의 존재와 소외, 허무라는 것으로 볼 때 이해할만하다.
잘 나가는 은행의 중견간부 K는 30살이 되는 생일날 아침 법원의 감시인들로부터 체포된다. 누구에 의해 어떤 사건으로 소송이 제기되었는지도 모르고 당하는 황당한 사건으로 시작된다. 시작부터 오리무중인 이 소송에 대처해 가는 k는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직접적인 노력 보다는 변호사, 법원 대리인, 제조업자, 화가 등의 도움을 받고자 하지만 누구하나 자신과 관련된 정확한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없다.
그저 막연하게 K가 소송 당한 자신의 처지를 헤쳐 나가기 위해 길고 멀게 만 느껴지는 그 길을 제 삼자가 따라가는 듯 무관하게 그려가고 있다. K가 법정과 그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 역시 그저 무기력하기만 하다. 무엇하나 명확한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법원과 소속되어 있다는 화가의 말처럼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길고 지루하게 그려지는 이 소송과 관련된 전 과정은 거대한 사회구조로 대표되는 법정과 관련되어 한 인간이 겪게 되는 사회적 소외를 극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듯 보인다. ‘모든 것을 제시하고 아무 것도 확증하지 않는 소설’이라고 평가했다는 알베르 카뮈의 표현이 아닐지라도 ‘문제는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 시켜주지 않은 것’이 작가 카프카의 의도라고 하지만 그렇기에 전반적으로 읽어가는 독자에게 답답함을 벗어버리지 못하게 한다.
‘소송’의 흐름은 사회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잘 짜여 진 각본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굴러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는 사회적 구조, 그러한 구조에 편승해 개인의 이익을 얻고 유지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소외된 개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사회와 사람들의 소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그 무엇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채석장 한 구석에서 가슴에 칼을 맞고 죽어가는 K의 ‘개 같은 종말’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은 카프카를 생각하는 동안 늘 함께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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