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 역정을 신앙 서적으로 볼 수 도있지만 고난의 인생길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색채가 적은 을유문화사 판본을 택하였다.
주인공인 크리스찬은 무거운 짐을 들고, 머나먼 길을 간다. 가는 중에 친구도 잃고, 배신도 당하지만 목표를 이룬다.
한 걸음씩 나아가는 크리스찬과 그 뒤를 따르는 크리스티나는 참 인내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본 받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을유세계문학전집 #존번연 #성경 #교훈 #베스트셀러
작가 존 번연은 처음 작가의 번론에서 부터 작품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들어낸다. 그것이 이작품을 처음접하는 이들에게도 믿음을 줄수있을것이며 더불어 종교적 성격이 짙었던 기존의 번역서들과는 다르게 문학성에 더 집중하여 번역 및 편집하였다는 을유출판사의 이야기로 볼때 많은 독자들이 조금더 편하고 즐겁게 천로역정을 읽을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본인도 역시 무교임에, 기존의 서평및 주변의 이야기에서 종교적인 부분이 많아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 을유 출판사의 고마운 번역으로 부푼기대감을 가지고 책장을 넘길수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소설이 말하고자하는 내용들을 내포하고 있고 서로간의 만남과 헤어짐으로 편하게 풀어주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또한 인간의 관념들로 표현하면서 개개인의 인식차이도 생각해볼수있으며 그러므로써 글을 읽어가는 내내 그들의 연결과 상징성들을 끊임없이 반추하게 만든다
처음 이야기속의 크리스찬은 인내심있는 ‘유우부단’과 다를바없는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점은 바로 인내심이라는 것이다. 처음만난 ‘유유부단’과 다르게 그는 틀렸음을 인정하고 올바른길로
계속 정진 한다는것이다. 믿음또한 초반과는
다르게 점점 강해진다는것도 알수 있다
쉽게 보면성장소설로의 흐름도 느껴지는 이 소설의 형태는, 이끝없고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으로 인간의 내면을 들추고 그것들을 사유하게 만드는 계기를 일으키며 크게, 또는 작게 서사들을 만들어나간다.
-책속의 글-
??p33
속세의 혼자 : 나 그러리라 짐작했지. 자네도 다른 허약한 사람들처럼 자신한테 너무 고상한 것들을 상대하다가 갑자기 마음이 혼란해진 상태가 된 거야. 자네가 지금 겪는 이런 혼란은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무언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절망적인 모험을 떠나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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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주변과 시선들. 현대사회의 sns등이 그것들은 폭팔하고 있는 시기이다.
사람들은 그것들로 인해 혼란한 마음을 가지고 진정한 행복이무엇인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것을 쫒아 떠난다는것을 말해주는 것일까.
읽는 내내 문장들에 적지 않은 미주표시들은,
내가 성경을 알고있었더라면 그것들을 본문들과 대입하며 다른 이해의 방향성을 가질수 있었을텐데 그러하지 못한 점이 참으로 아쉽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의 대서사로 웅장한 기분을 가질수 있어 소설로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무교인 나로서는 아직도 이 종교적인것이 낫설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이형이상항적인것을 어떻게 이해해볼수 있을가란 생각을 해본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이야기를 한다면, 서양의 사상과 문화의 특징은 온 사회계층 할 것 없이, 어떤 종류의 문화적 매체를 본다고 하던, 즉 미술, 문학, 사회제도, 음악, 생활방식, 사상, 정치 등등에서 기독교의 영향력 아래 있지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로마시대 기독교가 공인되면서부터 살살 퍼지기 시작한 이 종교는 서로마가 망하고 나서도 게르만족 등에게 잘 퍼져나가서 결국 중세시대에는 유럽을 아주 쥐고 흔들던 교황에게 권세를 누리게 해줬다. 왕도 아닌 자가 왕하고 맞장을 뜨면서 서로 전쟁 - 여기에는 신의 뜻을 빙자한 살인을 포함한다 - 을 일으키고 무신론자나 이교도들 - 이교도라는 표현에도 어차피 기독교가 우선이고 나머지는 짭이란 뜻이 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 - 잔인하게 탄압하고 구교와 신교간의 대립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는가. 얼마나 순기능이 뛰어난 종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그 권세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서구의 주요한 사회적 정치적 요소다. 기독교를 빼놓고는 서양을 얘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인본주의 사상가라는 서양 사상가들도 결국에는 존재의 이유가 신에게서 주어졌다고 말하기에 이르렀기도 했으니 말 다했지.
이 작품을 보면서 온전히 든 생각은 일단 해당 종교의 신자가 아니면 행간의 의미를 이해하고 감동을 받기가 어렵겠다는 것이었다. 존 번연이 본 그 당시 영국 - 이 세상은 멸망이 곧 닥칠 것 같은 엉망진창인 세상이었다. 물론 그당시 영국의 정치적 혼란이 그런 생각을 더 하게 만들었겠지만, 이 책에는 그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달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에 사람들은 완전히 쪄들어 있고, 구원을 받는 것이 살아있는 동안의 최대한의 목표였다고 말한다. 번연은 본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중 거의 대부분의 인물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이름을 붙였고, 실제로도 작품에서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헤메기만 한다.
그러나 신자가 아닌 내가 보았을 때는 구원받지 못한 그들은 나름 이 세상에서 현실적이고도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고민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고 그당시 영국을 혼란에 빠뜨린 여러 사간이 원인인 것들도 있겠지만, 그런 그들의 고민에 대해서 번연은 알레고리를 이용해서 엄하게 꾸짖되 그 엄함이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 - 그 방대한 양의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읽었으면 여기저기 치밀하게 인용해서 본작품을 썼는지 놀랍기는 하다 - 꾸짖는다. 결국 믿음을 가지라는 것으로 모든 이야기가 수렴된다. 현실을 이렇게 만든 신에 대해 이해가 안 되는데 신에 대한 깊은 믿음 - 그냥 믿어서는 안 된다. 내세에 대한 미련은 가볍게 버려야 한다 - 을 가져야만 천국을 갈 수 있다. - 작품에서는 천국이란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작가의 의도였을까.
아무리 무신론자나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전도를 하는 것도 좋고, 작가 자신이 생각한 진정한 믿음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도 좋지만, "원죄"라는 무시무시한 업보를 설정해서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구원"만이 살 길이고 내세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 오직 믿음 - 한다는 생각을 번연은 더욱 더 이 작품에서 키워놓았다. 게다가 지금으로부터 400년 가까운 이전 세계를 살던 사람이니 경제적으로나 풍족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천국에 대한 이미지를 생산함에 있어서 결국에는 번쩍이는 빛이 가득하고 황금의 이미지가 가득한 천국을 설정함으로 인해서 "와 믿으면 풍족한 천국가는구나"라는 단순한 교훈을 주려는 것 같기도 해서 - 어느 종교에나 나오는 천국의 이미지다. 어떤 종교던지 배금적이고 물질적인 욕심을 버리도록 강조하면서도 해당 경전에서 묘사하는 천국은 물질적으로 고도의 풍요를 간직한 모습이다. 소박하게 살고 있는 천사는 없다. - 기대보다 실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