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과 '전원 교향곡'은 이름 난 고전이다. 그러나 나는 부끄럽게도 이제서야 이것을 읽어봤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이제서야 이 책을 읽었나' 후회스럽기도 하고 '이제서라도 이 책을 읽은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새삼 고전만이 간직하는 이 문학적 기품에 적잖이 매료당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설이다. 이처럼 아름답게 인간의 번뇌와 고민 그리고 감성을 묘사한 책이 또 있을까. '좁은 문' '전원 교향곡' 이 두 편 모두 굉장히 서정적이고 목가적이다. '좁은 문'은 내가 사랑하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 듯 하기도 했다. 이 모두 서신(좁은 문: 제롬과 알리사의 편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베르테르가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이 작품에서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비극적인 결말도 그러하고 독자에게는 마지막 고백이 될 글들(좁은 문: 알리사의 일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베르테르가 죽고나서의 이야기들),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찬양과 경이로움을 담았다는 점이 그러했다.
알리사와 제롬의 사랑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렇게나 서로를 갈망하지만 결코 결혼만은 할 수 없는 사랑이라니. 세상에 이런 사랑이 또 있을까. 이 둘의 사랑이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한 편으로는 알리사가 야속하기도 했다. 그들의 사랑이 결혼으로 옮겨가지 못하는 모든 이유가 그녀에게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알리사의 일기를 읽는 순간, 나는 그녀를 동정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이야기하자면 종교 이야기도 해야만 할 것 같다. 알리사의 절대적인 신앙. 그녀는 신 앞에 겸손하고자 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 삶을 원했다. 그러나 자신과 제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분 앞에서 제롬을 택할 수 없었기에 그 힘든 싸움을 했던 것이다.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신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사랑의 방해자가 될 수 있나'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는 그 누구도 신에게 향하는 경배와 찬양 이상의 것을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불경한 일이기도 하다. 알리사는 이 점에서 번민했던 것이다. 제롬을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모든 감각과 자신의 존재함 그 모든 것을 바칠 만큼 사랑했기에 그녀는 그런 마음을 바로 잡고 싶었던 것이다. 누가 그녀를 어리석다 할 수 있을까. 이런 지고지순하고 숭고한 신에 대한 사랑을 누가 함부로 말 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좁은 문'에서는 당대 문학에 대한 비판도 숨어있다. 제롬과 알리사가 나누는 대화나 그들이 읽는 책들이 그것을 밝히 보여준다. 이 점을 읽는 것도 재미난 일이다. (아쉬운 점은 나는 겨우 그들의 몇 작품만을 읽어봤을 뿐이라는 것) 그러나 '좁은 문'에서 내게 가장 으뜸가는 부분은 그들이 나눈 대화였다. 그것은 아름답기그지 없었다. 그리고 자연 곳곳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는 이 작품이 얼마나 서정적이고 섬세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이런 대목들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전원 교향곡' 역시 너무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과연 누가 이런 숭고하고 겸손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도 앙드레 지드는 종교적 딜레마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 사랑은 목사와 시각 장애인 소녀(제르트뤼드)와의 사랑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 사랑을 천박하다 하지 못할 것이며 아무도 이 둘을 지탄할 수 없다. 그 사랑은 인간 그 자체만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사랑에는 뜨거운 욕정의 순간이라든지 서로를 탐하고 취하려는 욕심은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문학적인 기품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을 만큼 독자를 사로잡는게 아닐까 싶다. 제르트뤼드는 보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느끼고 분별하는 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나는 내가 이 세상을 너무나도 뚜렷이 볼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짧게나마 원망스럽기도 했으니 말이다. 특히나 인상적인 부분은 목사와 제르트뤼드가 음악회에 간 장면이다. 악기의 음색을 색깔로 표현하는 대목. 이 찬란하고 경이로운 묘사를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제르트뤼드가 목사에게 자신이 호수에 뛰어든 진짜 이유를 말하는 장면이다. 제르트뤼드는 모두가 말한 것처럼 호수에 핀 꽃을 꺽기 위해 호수가 육지처럼 단단하리라 생각하고(그녀는 한 번도 호수를 본 일이 없으니 이렇게 유추한 것이다) 발을 딛어 빠진 것이 아니었다. 개안수술을 하고나서 처음 보는 아멜리(목사의 아내)를 보고 그녀의 고통이 스민 얼굴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도 제르트뤼드도 둘은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목사는 제르트뤼드에게서 눈을 뜨고 보는 것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엿볼 수 있었고 제르트뤼드에게 목사는 단 한 줄기의 빛이였다.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이 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옳지 않지만 '그건 나빠요' 라고 말하고 나설 용기를 주지 않는 사랑. 이들의 사랑이었다.
앙드레 지드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것처럼 이 두 작품 안에는 종교에 관한 갈등의 순간과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 싶었고 영광을 돌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이 신앙으로 인해 넘지 못할 문제들에 직면한 적이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이 두 작품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남녀의 욕정에 대한 묘사가 없다. 이 점은 앙드레지드가 지독한 금욕주의자였단다. 그렇기에 그는 이 두 편의 어느 순간에도 남녀의 애욕을 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알리사는 앙드레 지드 자신이 아닐까?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며 그 사랑이 깊어감과 동시에 신에게 대한 죄스러움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이 두 작품은 정말 어느 것을 우위에 둘 수 없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상하고 숭고하다. 이런 인간의 번뇌와 신에 대한 절절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귀하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신의 주축이 될 만한 어떤 사건과 상황에 대해 지나치리만치 고민하지 않고 밤을 지새우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괴로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말이다. 그것은 비로소 인간에게 부여된 원죄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이 아닐까. 아름다운 이 두 편의 소설은 내게 또 하나의 등불이 된다.
좁은문은 작년인가 제작년에 읽었었다.(난 원래 날짜개념이 심하게 없는편이다)
제목 그대로 좁은문으로 들어가듯이 나에겐 너무 어려웠다. 읽으면서 내내 가슴
을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답답하고 꽉막히고 숨막힌듯한 그런것들.
194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품으로 읽기전에도 제목은 알고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것이다. 작가는 모른다하더래도.. 앙드레 지드는 본인 자체가 이
해 받기 힘든 특이한 캐릭터이다. 어떤 소설속 주인공보다도 특이한 그런 사람.
자기가 죽도록 쫓아다녀서 외사촌 누이와 결혼에 성공했지만 그녀와는 정신적인
사랑만하고는 정작 자신은 다른 여자와 관계하여 아이까지 낳는다. 거기다 나중
엔 동성애까지... 성적 취향이 무지 제멋대로인듯. 내가 앙드레 지드의 작품을
접한건 좁은문과 전원 교향곡 두편이지만 그 두편만을 놓고 봤을땐 부인을 통해
이런 작품들이 탄생한게 아닌가 싶다. 전원교향곡은 표지의 그림만을 보고 그냥
잔잔하고 평화로운 내용이러니 생각을 했다. 눈먼 소녀를 목사가 집에 데려오면
서 마치 관찰일기를 쓰듯 목사의 일기로 내용을 이끌어나간다. 눈이 보이지 않는
소녀는 목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사랑을 느끼고 그로인해 행복해하지만 눈이 보이
게 되자 비로소 진실을 보게 되고 목숨을 버린다. 목사가 자신의 아들과 눈먼 소
녀를 놓고 갈등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며 종교적으로 일기
를 적지만 그 글엔 심한 질투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소녀의 죽
음과 아들의 개종으로 이어지고 목사는 더이상 기도할 수 조차 없는 상태가 된
다.
정말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는것처럼 그 일기속 인물들이 실존인물들 같은 착각
이 들었다. 눈먼 소녀와 목사가 만났을때 난 해피엔딩을 꿈꾸웠지만 결국은 비극
이었다. 그렇기에 더 오래 오래 생각나겠지?
한 때 사랑하지 않음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이유로든지 이별의 이유는 결국 사랑을 지속할 만큼 사랑하지 않아서이고, 그건 이별을 고한 사람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시에 수 만번을 사랑한다 말해도 한 마디 이별을 고하는 말에는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림을 알았다. 아마 내가 사랑을 믿지 않은 건 그 때부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제롬을 숨막히게 하는 사촌누이 알리사. 제롬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이유로 동생인 쥘리에트도 제롬을 사랑하기에 동생을 위하여, 또 제롬보다 나이가 많아서, 또 우리 둘 각자가 상대방을 잊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가 서로 더 진정으로 가깝다고(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제롬보다 나이가 많아서라는 이유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알리사다운 생각이 아니고 나머지 두 가지는...모르겠다. 난 결국 모든 게, 결국 제롬과의 사랑을 이루지 않은 것은 그 만큼 제롬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고 제롬도 그걸 헤치울만큼 능력이 안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알리사는 그녀의 방식대로 제롬을 충분히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상대방이 인정하지 않은 것이였고, 그녀도 그것이 마음의 짐이 된 채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나의 이러한 생각들은 사랑이 '결혼'으로 결실을 맺는다는 현실적인 입장에서이다. 하지만 그것을 잠시 접어두고 이 [좁은 문]을 읽었다. 즉, 앞의 제롬과 알리사의 신랄한 사랑의 관계에 관한 글은 모두 키보드 밑으로 묻어버려야한다. 알리사가 끝까지 제롬과 결혼을 하지 않으면서도 제롬 곁에서 있고 싶었던 마음이 애잔하다. 하나님을 둘러 싼 확고한 믿음과 그 안에서 탄생한 알리사만의 행복. 무엇이 그토록 알리사에게 제롬을 향한 사랑을 희생시키게 했는지, 그녀의 마음을 따라갈 수는 없는 심정이다.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일까? 신이 인간을 창조했으며 그래서 나는 신의 피조물임을 믿지만 신은 나의 모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다. 마치 내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났지만 엄마가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닌 것처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신과의 교류보다는 신이 만든 다른 수많은 불완전한 피조물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 그러니 솔직히 알리사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가도 되지 않았다가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내게 있어 신이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으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드무니라.’
좁은 문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성경을 읽으면서도 곱씹어 보면서 생각했던 부분이다.
실제 지드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엄격한 그리스도적 윤리와 모든 구속 안에서 생활했다. 그런 그에게 야성적이며 작열하는 태양아래 감각적인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은 신으로부터 서 벗어나 강렬한 생명력을 향유하는 것이 삶의 길임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실제로 신으로부터 벗어난 것일까?
알리사는 제롬이 자신과의 인간적인 사랑을 뛰어넘어 더욱 덕을 세우고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도록 자신을 희생한다. 거기에는 모친의 불륜에 대한 괴로움과 제롬을 몰래 사랑하는 여동생에 대한 마음 더 나아가서는 신비주의적 금욕주의가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장애가 다 허물어졌음에도 알리사가 그런 죽음을 선택한 것은 인간이 허물 수 없는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 분명 존재하다고 생각되었다.
중학생 때 처음 <좁은 문>을 읽으면서 떨리던 그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알리사와 제롬과 신. 그 설레임으로 을유문화사의 책을 통해 다시 읽고 싶었다. 그 풀잎처럼 맑음으로 읽혀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더 넓은 부분들을 바라보며 읽을 수 있었다. 고전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 아닐까?
둘이서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좁은 길
한 사람의 가치관은 그가 보는 세상과의 소통을 결정하게 된다. 그렇기에 어떤 가치관을 갖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한 사건을 두고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며 이것은 그 사건의 진실과는 다를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을 인정했을 때 다양성에 기초한 타자와의 소통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문학 작품을 대할 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고전으로 분류되는 숱하게 많은 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작가의 의도나 평론가들의 이야기와는 또 다른 작품해석이 가능하도록 그 기반이 되는 것 역시 개인이 가지는 가치관의 차이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앙드레 지드의 작품을 만날 때도 평론가들의 평론보다 더 먼저 다가오는 것이 독자가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을유문화사 발행 [좁은 문·전원 교향곡]은 앙드레 지드의 대표적인 두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우선 [좁은 문]은 젊은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제롬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꾸며진 이야기다. 외사촌 누이 알리사를 사랑하는 재롬의 순수함과 알리사의 희생적인 사랑이 돋보이는 내용을 따라가 본다.
제롬을 몹시 사랑하면서도 동생이 제롬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알리사는 결혼에 대해서 멀리하게 된다. 동생은 언니와 제롬 사이에 어쩌지 못하는 현실을 받아들여 도피성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는 또 다른 알리사의 고민이기도 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제롬과 알리사는 헤어지고 수년이 지난 후 알리사를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제롬이 집으로 방문하여 마지막 만남을 가진 후 영영 이별하게 된다. 마지막 상봉이후 알리사는 집을 떠나 파리에 있는 요양원에서 죽는다. 뒤쪽에 실린 알리사의 일기는 현실적인 문제와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젊은이들의 순수하고 숭고한 사랑과 그들이 처한 조건에서 사랑 이외의 것에 의해 다른 결혼을 하거나 아니면 결혼 자체를 거부하고 살아가게 되는 모습은 시대를 건너 오늘날도 여전히 유의미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몇 십 년 전 가난하게 살아가던 우리들의 누이를 생각나게 하는 알리사의 모습에서 애잔함을 보는 것이 지나친 감정은 아닐 것이다. 종교적 신념이나 아버지를 보살펴야 한다는 구체적 환경은 다를지라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누이들 말이다.
[전원 교향곡]은 스위스 산간 마을을 배경으로 한 목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목사는 아내의 불평에도 불구 어느 날 의지할 곳 없는 장님 소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그 불쌍한 소녀를 자식들 이상으로 정성껏 돌보며 열성적인 교육의 결과로 정신적, 지적으로 성숙한 아가씨로 성장한다. 자신을 돌봐준 은인 목사를 향한 제르트뤼드의 감사의 마음이 사랑으로 변하고 목사도 이성(異性)에 대한 사랑이 있음을 알게 된다. 목사와 그 아들 자크 그리고 성장한 소녀 제르트뤼드 사이에 벌어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제르트뤼드가 죽음으로써 결말을 맺고 있다. 사랑이라는 인간의 본성이 성직자로써 목사, 중년 남성의 욕망 등과 결부되면서 겪게되는 내면의 갈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좁은 문], [전원 교향곡] 이 두 작품의 근저에는 사랑이라는 테마가 흐르고 있다. 그것이 종교적인 숭고함이든 상식을 벗어난 세속적인 사랑이든 간에 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에 대한 깊은 신뢰는 인간의 영원한 테마 ‘사랑’의 영속성을 생각하게 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이 어떤 가치관을 갖느냐에 따라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바뀌듯 문학작품 속 사랑의 모습을 바라볼 때도 다른 해석이 가능함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