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까지 읽은 책들의 저자를 보면 대체로 20세기 저자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젠 21세기의 저자들 책을 더 많이 보고 있죠. 간간이 19세기에 쓰여진 책들도 보는 경우도 있지만 수많은 새로운 책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옛 책들을 접할 기회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18세기의 러시아 문학이라니 이건 안볼 수가 없었네요. 여러모로 흥미로울 것 같았습니다. 특히 저는 표지의 눈밭의 썰매와 사람들을 보고 마치 추운 한겨울 밤 동화를 읽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는 옛날 이야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편지 형식이긴 한데 소설이라기 보단 당대의 사회의 부조리와 민중의 고통에 대한 울분과 고발인 것 같네요.
에카테리나 여제가 이걸 읽고는 저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고 하는데, 실제 내용 중에는 정말 허걱 할만한 거의 혁명 선동에 가까운 내용도 있어 수긍이 가네요^^ 신분 질서가 아직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부당한 착취 질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이 시대를 생각하면 정말 혁신적입니다.
특히 예속의 정도가 심했던 농노제가 사회의 뼈대를 이루던 러시아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그만큼 당대의 지식인이 느끼는 울분과 비통함은 더 컸을 테고, 이런 분위기가 끝내는 나로드니키를 거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하는 사회 분위기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물론 볼셰비키 혁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 재앙을 거쳐서 국가관료자본주의로 막을 내렸지만요.
이후의 러시아 역사를 생각하면 이 정의의 외침이 더욱 쓸쓸하고 안타깝게 들리네요. 하지만 옛 사람 특유의 문학적인 표현과 수사적인 표현은 정말 흥미롭네요.
한편의 로드무비 같은 소설입니다... 풍경을 묘사하는 대목도 압권입니다. 도시 하나하나 인상깊고 재밌게 남겼네요. 번역도 참 잘 되어서 매끄럽게 읽힙니다. 역시 을유문화사...! 고전답게 울림이 크네요. 책을 덮는 순간 러시아의 풍경이 스쳐지나갑니다.
이 도시에 자리 잡고 있는 발다이 호수에는 자신의 애인을 위해 목숨을 희생했던 수도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도시에서 1.5베르스타 떨어진 호수 한가운데의 섬에는 니콘 총대주교가 세운 이베론 수도원이 있다. 이 수도원의 한 수도사가 발다이에 다녀와서 그곳 주민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 그들의 사랑은 곧 상호적인 것이 되었고, 그 끝을 보고자 했다. 그 쾌락에 한번 발을 들이자,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황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수도원에서 자주 나올 수 없었고, 사랑에 빠진 여인 역시 남자의 수도원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은 모든 것을 극복했다. 사랑에 빠진 수도사는 두려움을 모르는 사내가 되었고, 그는 거의 초자연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이 새로운 레안드로스는 애인의 품에 안겨 달콤한 쾌락을 즐기기 위해, 거의 매일 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아무도 보이지 않게 조용히 자신의 거처를 나와 수사복을 벗어 던지고 반대편 해안으로 호수를 가로질러 헤엄쳐 넘어갔다.
--- p.134~135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 알렉산드르 라디세프/서광진/을유문화사/2017
설 명절에 가열하게 읽은 책들의 마지막 대단원,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입니다. 이전에 읽은 모스크바의 신사 같은 내용을 기대한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생각했던 것 보다 월씬 심각하게 러시아 전반의 정치 사회상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제목이 무슨 여행 이러니까 여행서인가 싶을 수 있지만 실은 주인공이 페테르부트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보고, 듣고, 읽고, 느낀 것들에 대한 이야기와 감상이 주 내용입니다. 어느 역참에서 누군가와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형식이 많지요. 일주일에 6일을 종처럼 일하고 돌아와 하루 자신의 밭을 갈 시간이 나는 휴일이라고는 없는 비참한 농노의 일상과 타타르 족에게는 아첨했던 과거를 싹 감추고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수탈을 지속하는 탐욕스런 지주와 귀족들, 매매되는 신부와 병사들. 탄압되는 언론의 자유 등등... 주로 러시아의 농노제와 자신의 뱃속만 불리는 귀족들의 옹호로 유지되는 타락한 전제정에 대한 비판이 주 골자를 이룹니다.
저자가 이 글을 쓴 뒤로도 농노 해방과 구시대적 제도의 개혁은 수차례 러시아 역사에 시도되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귀족들의 반동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말았죠. 그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저자의 이 글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어째서 이 글을 쓴 100년 뒤에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을까요. 하긴, 우리의 역사도 그때는 그랬습니다만.
당시 러시아의 현실을 고발한 작품으로 러시아 역사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많이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이게 러시아적인 건가 이런 씁쓸한 마음도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