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문학 작품 속에서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배운다. 수많은 작품들을 읽지만, 세계의 역사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문학 작품을 접하게 된다. 그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소설 속 사건 혹은 역사에 대해 알아보거나 소설속 내용을 이해하려 애쓴다. 아시아 제바르의 작품 『프랑스어의 실종』도 내게는 숙제처럼 여겨지는 소설이었다. 일단 프랑스와 알제리의 역사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 소설을 백 퍼센트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작가의 시선에 다가가고자 했고, 소설 속 인물들을 이해하고자 했던 독서였다.
아시아 제바르가 누구인가. 알제리에서 태어난 작가는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 덕분에 아랍의 여자 아이들과는 달리 일찍 결혼하지 않고 프랑스 학교를 다녔다. 알제리 여성으로는 최초로 세브르 여자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고 하는데, 이 시기에 여자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이 된다. 작가는 평소에도 언어, 역사, 여성에 관한 문제를 다룬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은 남자지만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 혹은 그가 만난 여성의 목소리로 역사 속에서 여성에 대한 생각들을 만날 수 있다.
소설 속 중요한 역사는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었던 알제리의 독립 운동이다. 독립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감옥에 갇혔다. 알제리가 독립된 후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로 이주했고, 자기의 고향에 쉽게 돌아오지 못했다. 소설 속 주인공 베르칸은 20년 동안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연인 마리즈와 헤어진 후 고향인 알제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알제 근처의 바닷가 마을에서 살다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살아있는 카스바에 가지만 그곳은 이미 그 시절의 카스바가 아니다.
글을 쓰고 싶었던 베르칸은 바닷가에 면한 집에서 마리즈에게 그리움의 편지를 쓰고,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되살려 소설을 쓰려 하지만 쉽지 않다. 동생 드리스의 친구인 알제리의 여성 나지아가 찾아오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여기에서 프랑스 여성 마리즈와 알제리의 여성 나지아는 언어의 대척점이 된다. 프랑스 여성인 마리즈와 사랑을 나눌 때면 알제리 사투리로 말하지만 그녀는 알아듣지 못하고 그에 대한 공허감을 느끼는 데 반해 나지아와 사랑을 나눌 때 터트렸던 알제리의 언어는 비로소 그를 편안하게 한다. 아주 짧은 기간의 사랑이었지만 그에게는 궁극적인 사랑이 되었던 이유다.
너무나도 친근한 그 나른한 목소리. 제2의 언어로 보존하기 위해 그 아랍어 단어들을 이동시키고, 흘려버려야 할까? 우리 모국어로 포명된 그녀의 말들을 나는 그 특유의 음악 속에서 듣는다. 그리고 내게 있어서 프랑스어는 내 숙소의 공간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관능적 쾌락의 고백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의 '좁은 문'이 된다. (153페이지)
나는 그와 이야기 할 때 사투리만 쓰고 있다오. 상실된 수많은 단어들과 부활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언어의 춤 같은 것을 다시 발견했다는 흥분에 싸여서 말이오. (29페이지)
소설은 베르칸의 1인칭 시점으로 시작되었다가 3인칭 시점으로 되었다가 다시 1인칭, 그리고 그가 사라진 후의 이야기들을 말하는 3인칭 시점으로 되어있다. 베르칸의 시선으로 바라본 알제리의 독립 운동과 가족에 얽힌 이야기들은 알제리의 역사가 되어 나타난다. 알제리의 여성으로 잠시 사랑의 대상이었던 나지아는 베르칸에게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베르칸 또한 나지아에게 알제리의 사투리로 기억속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
베르칸은 나지아와 며칠을 함께 보낸 후에야 글을 쓰게 되고, '청소년'이라는 소설을 완성한다. 소설 속 문장들은 프랑스어와 알제리의 언어에 대한 것들이 많다. 작가가 얼마나 언어에 천착했는가를 볼 수 있는 문장들이다. 수많은 문장들 속에서 언어가 가진 힘, 여성의 지위, 고통의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누누이 말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하지만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작가는 자기의 목소리를 낸다. 기록의 역사를 무시할 수 없지만 역사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비로소 진실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진실의 기록이 허구의 문학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내 젊은 시절의 추억을 글로 쓰면서 프랑스어가 내 기억을 되살리는 언어가 되고 있어. (222페이지)
프랑스의 여성 마리즈와 사랑을 나눌 때 아랍어를 알아듣지 못했던 것에 대한 답답함. 반면 나지아와 사랑을 나눌 때 마음껏 알제리 사투리를 내뱉을 수 있어 편안함을 느끼던 베르칸 이었지만 위의 문장처럼 자신의 기억들 또한 프랑스어로 쓴 글에서 떠올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랍어로 글을 쓰지 못하고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 그에게 프랑스어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번역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지만, 을유문화 세계문학전집의 번역은 유려하다. 어느 문장을 읽더라도 어색한 면이 없고, 다른 문학전집에서는 볼 수 없는 작품들이 많아 좋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시아 제바르의 작품이 초역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매년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아시아 제바르의 소설을 을유문화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아시아 제바르의 또다른 언어의 사유들을 더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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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제바르의 이름을 어디서 보았던가 생각하니... 언젠가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들을 살펴보다 발견했던 듯도 하다. 그러고나서 본 것이 아마도 《사랑, 판타지아》였던 것 같다. 읽진 않았고 읽고 싶은 목록에만 올려두었는데... 아시아 제바르라는 인물(필명이다)은 알제리인이지만 프랑스어로 글을 읽고 연구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카뮈와는 조금 결이 다른 알제리인이지 않을까. 프랑스 학술회에 들어갔으니 그의 위상이 남다름은 잘 알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번역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겠다는 것이다. 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상당히 상징적이고, 또 복잡한 심경으로 읽힌다. 우리 한국도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여전히 '알제리 독립전쟁'을 내전으로 간주한다. 알제리가 가지는 문화적, 지정학적 가치 때문에 알제리는 식민지배를 받으면서도 본토와 비슷하게 여겨졌으며, 그만큼 정착해 사는 프랑스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연히 문화와 역사가 다른 바, 알제리인들의 독립 요구는 합당했다. 문제는 프랑스가 알제리에 투자한 시간과 노력만큼 알제리가 받은 영향도 지대했다는 것이다. 말리와 모리타니에서 온 학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여학생들이었는데, 그들은 프랑스어를 배우며 무척 행복하고 자유롭다고 했다. 자신들의 모국어가 주지 못한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사고 방식, 문화 그런 것들... 모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아시아 제바르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제바르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을 것이다. 아마도... 프랑스가 지배하고 억압하는 아랍계, 알제리. 내 민족의 언어, 내 아버지의 언어는 '여성'인 나를 억압하지만, 지배자의 언어인 프랑스어는 '여성'인 나를 해방시킨다는 아이러니 말이다. 지배자의 언어로 사고하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아픔은 어떤 것일까. 길을 잃은 정체성, 괴로움 같은 것들. 이러한 고통은 막연한 상황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고문을 받는 이의 비명과 울려퍼지는 클래식 음악(유럽의 모든 역사와 철학이 합쳐져 발전한 것이 바로 클래식 음악이란 점을 상기해보자)과 대조되며 나타난다.
《프랑스의 실종》 이후 아시아 제바르는 《그 어디에도 없는 아버지의 집》을 발표하고, 활동하다 세상을 떠난다. 식민지(알제리가 특수한 지역이었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출신의 무슬림 여성이, 파리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프랑스 학술회에서 좌석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아시아 제바르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런 삶이 말이다... 고국의 다른 여성들보다 좋은 기회를 얻었고 놓치지 않았던 그가 바라던 마지막 상생의 길은 나지아의 편지를 통해 제시되지만, 지극히 문학적인 방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제바르의 다음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
♡ 나는 누구인가, 『프랑스어의 실종』 ♡
『하나, 책과 마주하다』
과거 발발했던 전쟁들은 기록으로 남겨진다.
그 기록을 보면 승리자와 패배자가 누구인지 적혀있고 승리자에 대한 업적이 줄줄이 적혀있다.
그리고 패배자는 전쟁에서 패배한 요소 한 두줄 정도 남겨지는 정도다.
살짝 과장되게 서술했지만 결국 내가 하고싶은 말은 전쟁에서 승리한 자만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한 번 더 정독하고 싶다. 역사적 배경을 한 소설은 두 번은 읽어줘야 제대로 탐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배경인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자면 8년동안 알제리가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벌인 전쟁이다.
알제리에서 무장투쟁이 시작되고 확대되며 그 병력이 13만 명을 넘게 되었는데 당시 프랑스가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결과적으로 국민투표에 의해 알제리 독립전쟁이 선언되었는데 소설 속 배경이 딱 이 부분이니 역사적 배경을 대충 알아야 흐름을 잡을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베르칸은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있었는데 연인이였던 마리즈와 헤어지고나서 고향인 알제리로 돌아온다.
어렸을 때 갔던 카스바에 가서 어린 시절 느꼈던 추억을 느끼고 싶었지만 지금의 카스바는 과거의 카스바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렇게 알제리에 지내면서 동생 친구인 나지아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지금 현 연인인 나지아는 알제리인이고 전 연인인 마리즈는 프랑스인이다.
당시 마리즈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베르칸은 간간히 알제리 사투리를 말하곤 했는데 마리즈는 알 턱이 없었다.
반면에 나지아와 사랑을 나누며 주고받는 알제리 언어가 그에게 얼마나 평온함을 주는지 모른다.
바르칸은 알제리에 머물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되살려 소설을 쓰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다.
알제리 언어가 너무도 편한 그였지만 글을 쓸 때면 아랍어를 전혀 쓸 줄 모르니 프랑스어만 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바르칸은 알제리와 프랑스 그 중간에 놓여있는 것만 같았다.
이 소설은승리자와 패배자 혹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혹은 프랑스어와 아랍어(모국어) 등등 대립되는 요소들을 어렵지않게 찾아볼 수 있다.
소설은 베르칸의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드리스, 마리즈, 나지아의 이야기도 살짝 볼 수 있는데 마지막 내용인 나지아의 회상을 통해 아랍권의 여성들의 속박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다. 아랍인이지만 개방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현재 아랍 남성이 아랍 여성에게 행하고 있는 억압과 편견에 대해 불쾌함과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에 사우디에서 드디어 축구장에 여성관중 입장을 허용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랍권의 여성들이 얼마나 제한된 삶을 살고있는지를 보여주는 기사였다.
프랑스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던 지식인으로서 고뇌하는 베르칸. 모국어인 아랍어와 프랑스어, 그 두 언어의 경계 어딘가에 놓여져 고뇌하는 그의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리나라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일본말이 자연스레 모국어에 섞인 것이 있는데 절대 쓰지 않으려고 한다.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점에서 당시 고통받았던 그 세월이 비슷하게 느껴져 소설 속 인물들과 상황에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장 많이 생각났던 사람은 알베르 카뮈였다. 카뮈도 알제리 태생이고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그리고 알제리 독립을 지지했다. 물론 그는 프랑스 사람이었지만, 노동자인 아버지가 알제리로 이주한 후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청년기까지 자랐다. 그는 프랑스인이긴 하지만, 알제리는 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카뮈는 마흔네 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타고,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영화를 누렸다고도 할 수 있지만, 사실 사는 동안 내내 알제리와 프랑스 양쪽으로부터 항상 너는 어느 쪽이냐는 질문과 공격, 비난을 많이 받았다. 공산당에 가입까지 했던 카뮈는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했지만, 알제리의 입장에서 그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배신자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카뮈는 알제리를 지지하는 배신자였다.
이것을 일종의 '유명세'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카뮈가 죽었던 나이보다 오래 살고 보니(카무는 47세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그 나이에 그런 식의 '조리돌림'을 당하는 게 한 개인에게 얼마나 치명적이고 가혹한 일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아시아 제바르는 같은 알제리 사람이었지만, 카뮈와는 달리 아랍인이었다. 적어도 카뮈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갈등하거나 고민하지는 않았겠지만, 아랍인이었던 아시아 제바르는 피식민지 국민으로서 지배 언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글을 쓰는것에 대해 스스로 모순과 이질성을 느끼며 그것이 점점 극대화되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정체성의 혼란도 가져왔을텐데, 그것은 여성으로서의 삶과 중첩되어 이중의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작가로서 자신의 도구로 아랍어 대신 프랑스어를 선택한 것은 프랑스어를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복잡미묘한 작가의 심리상태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베르칸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녔으나 알제리를 위해 시위를 하다 수용소를 끌려가고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한 베르칸이 '다시 살기 위해' 고향인 카스바로 귀환한 것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귀환한 그의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언어의 문제가 대두된다. 모국어이자 가족들의 언어인 아랍어와 자신이 글쓰기의 언어로 선택한 프랑스어. 그러나 이 두 언어는 피지배자의 언어와 지배자의 언어라는 점이 베르칸의 갈등의 지점이다.
베르칸에게서 아시아 제바르가 투영되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글쓰기'는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 중 하나인데, 그것은 이 소설의 2부의 제목에 '글쓰기'가 들어가는 것으로도 잘 드러난다. 글쓰기의 도구는 언어인데, 베르칸이 선택한 언어는 프랑스어였기 때문이다.
베르칸은 프랑스어와 아랍어라는 두 가지가 혼재된 세상 속에서 산다. 자신의 근본을 잊은 적은 없고 애국심도있지만, 알제리에서 그는 이방인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그는 이방인이었고 거기서는 알제리를 꿈꿨다. 그렇다면 조국이란 어떤 곳인가?
'조국'과 '언어'는 그가 사랑했던 두 명의 여성으로 압축되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베르칸에게는 두 명의 연인이 있다. 마리즈는 베르칸이 프랑스에서 사랑했던 연인의 이름이고, 나지아는 귀환한 후 만난 여인이다. 마리즈는 프랑스어를, 나지아는 아랍어를 각각 상징하는 사람이자, 각 언어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귀환 후 만난 나지아는 베르칸처럼 프랑스어와 아랍어를 모두 사용하지만 사랑을 할 때나 사랑을 한 후 아랍어로 말한다. 그것은 모국어로만 가능하다는 듯이. 그녀와 사랑을 나눈 후 베르칸은 마리즈에게 썼던 편지를 찢는다. 하지만 두 언어의 경계에 있는 베르칸은 여전히 프랑스어로 글을 쓴다.
그리고 어느 날... 베르칸이 실종된다.
마지막에 베르칸이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 것으로 처리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조차 알베르 카뮈의 마지막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아시아 제바르가 프랑스에서 학교에 다녔던 청소년기는 한참 알베르 카뮈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였다. 아시아 제바르는 알베르 카뮈의 작품을 읽었을 테고, 어쩌면 그를 만났을 수도 있다. 그의 죽음도 매체를 통해 알았을 테고, 어쩌면 그의 장례식장에 갔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겹침들은 피지배국, 피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시아 제바르를 카뮈가 함께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