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의 정체성이란 한국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40년 남짓의 시간이 흐른 오늘의 사회에서 바라볼 때, 정치적 자유나 남녀의 성적 평등이 월등하게 개선되었다고 하는 시각에 동의치 못하는 시각도 있을 수 있겠으나, 정치적 환경과는 달리 작금의 사회를 여성을 단순한 성적 노리개의 대상으로 양육하거나 인식하는 사회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의 관점은 여성의 성적 욕망의 제약에 대한 해방에 맞추어져 있어, 오늘의 시선으로는 그닥 매력적인 작품이라 하기에는 시대성이란 괴리가 있다. 다만, 당시 유행하던‘자크 라캉’에 경도된 사람들의 실험적 차용이 이루어진 작품의 대표적 예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수 있으며, 그 형식적 구성과 내용의 전개에 대한 기술적 방법론을 엿볼 수 있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작품은 주인공인 30대의 여성‘아니타’의 꿈과 일기와 대화를 오가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라캉이 이야기하는 '욕망하는 주체(desiring subject)'로서 대상화하는 이 소설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즉 욕망은 결여의 산물이듯이‘상실과 결핍의 무덤 위에서 욕망의 꿈이 피어난다.’는 식의 발상을 소설에 식재(植栽)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70년대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치문제와, 사회문화적 환경에 대한‘아니타’와 연인‘포지’의 논쟁들이 소재가 되는 것은 욕망의 충족을 방해하는 것으로서의 남성적, 폭력적 문화, 욕망의 규제자로서의 제도, 정치 환경을 은유하는 라캉 이론의 반영으로서, 이처럼 라캉의 욕망이론이 소설의 정신적 구조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거부(巨富)와 결혼하여 초야를 치룬 신부의 모습으로 소설이 시작되는데, 거칠게 성적으로 유린된 여성의 몸을 천천히 훑어가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당혹스럽게 다가온다. 전기가 흐르는 쇠 울타리로 둘러싸인 대 저택의 단지에 갇혀, 남성욕구의 배출구로 사육되는 여성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이는 멕시코로 망명하여 암 투병중인 주인공‘아니타’의 꿈 속 분신이다. 한편 미래사회의 섹스치료사로서 국가가 운영하는 일종의 공창(公娼) 'W218'을 등장시켜, 여성은 오로지 남성을 위한 섹스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케 하는데, 이 역시 현실 속 주인공인 ‘아니타’의 무의식적 욕구의 한 표현으로 독자를 납득시킨다.
이 모두 남성 사회에 가두어진 성적 역할만으로 억압된 여성들을 상징하고 있는데, “결혼 초에 느꼈던 그런 쾌감이 지속되었더라도, 왜 내가 나중에 온종일 집안일에만 매달리면서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을까? 그 사람이 대가를 지불했어야만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아름다웠던 것이고....”와 같이, 이에 대한 아니타의 저항이란 것도 사실은 성을 단지 대가(代價)라는 교환적 가치에 머물게 하고 있어 여성의 성적해방이란 지위로의 도약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여성의 주체적 자유로서의 성적 욕구를 지향하지만 “내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오히려 불감증이란 열패감만을 노출한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자극, 현실의“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남자를 만나려고 하면서 절망감을 느낀단 말이야! 내가 그걸 생각하면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찾으려 하면, 그리고 또 지금처럼 정신을 집중하면, ~ 그 사람이 보인다.”고 하면서 끝없는 자극을 추구한다.
이는 기계적 섹스치료 장치로 훈련된 W218이 찾는 이상적 남성에 대한 갈망과 겹치는데, 그 理想의 남자인 'LKJS'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지만, 이내 그 사랑이 거짓임을 알게 되고, 남자에게 중상의 상해를 입힌다. 이러한 암시는 소설에서 시간을 달리하며 동일한 형태로 등장하는데, 거부인 무기상으로부터 탈출한 여배우인 여주인의, 탈출 동행자인 남자의 살해나, 현실의 연인 포지의 죽음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체제를 수호하려는 남성중심 사회에 대한 불신이며, 반감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곤 나아가서 역설적이게도 수동적 섹스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성(性)을 불치의 인간들을 치유하는 성(聖)스러움으로 재탄생시킨다. 불치병자들을 구원하는 천사의 음부로서 말이다. 결국 여성의 성적 해방이란 이처럼 극단에서 극단을 오가는 위태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 균형이란 마치 정치와 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감성적인 인형이 되려는 여성들을 양산하는 오늘의 사회에서 바라보면 오히려 이 소설의 시대성에 격세지감을 느끼게까지 된다.
이런 괜찮은 책에 리뷰가 없다니..
한 작가의 글을 달아 읽긴 쉬워도 한 역자의 글을 달아 읽는 일은 지독한 우연이다. 얼마전 송병선 옮김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었으니...
이 책을 읽고서야 마누엘의 '거미 여인의 키스'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글을 잘 이해하려면, 적어도 그 작가가 쓴 다른 글들도 함께 읽어보아야 함을 새삼 실감한다. 마누엘은 정치 이야기를 즐겨한다. 그래서 막연히 그는 정치적이고 참여적인 작가라고 생각했나 보다. 글쎄, 정치적이고, 정치 이야기를 즐겨 하는 건 맞지만 '정치 지상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정치'때문에 사람이 희생되고, 도구화되는 것을 오히려 경멸한 건지도..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몰리나의 죽음은 거룩한, 가치 있는 희생이 아닌 그저 '개죽음'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하고.
남성은 정치적이고, 강하고, 안정적이며, 목표가 명확하다. 포지가, 아니타의 전남편이 그랬고, 그녀를 흠모한 알레한드로가 그랬다. 그리고 아니타의 환상속 남성들 또한 그렇다. 사랑을 하지만, 혹은 그렇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것을 무엇하나 포기하지 않는다.
반면 여성은 아름답지만 연약하고, 불안하다. 사랑을 받지만 동시에 그 상대에게 이용대상이 된다. 딸들에게 한결같이 한 남자의 하녀가, 노예가 되지 말라고 경고메세지를 보낸다.
'천사의 음부'란 무얼까. 한 남자가 아닌 모든 남자의 연인의 될 때 진정한 성의 해방이 가능하단 뜻일까. 천사의 음부를 통해 병든 남성들은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그녀에게 경의를 느꼈다. 여성이 꿈꾸는 그런 의미로의 완벽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니 사랑과 결부된 섹스에서 해방하라, 그래서 한 남자의 노예로 살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여성과 남성을 똑같이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습관처럼 미래를 낙관한다. 이를 야유라도 하듯 마누엘은 w218을 등장시킨다. 병역의 의무처럼, 성관계를 갖지 못하는 남성들을 대상으로 '섹스의 역무'를 져야 하는 여성의 등장이다. 끔찍이 혐오스럽지만, 말도 안 되는 설정이라 치부하고 싶지만 여성의 문제에 있어 인류가 반드시 진보해 왔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자문해 봤다. 가장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여성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주 오점을 남겨왔다. '민주노총 성폭력'건이 그렇다. 점점 많은 여성들이 성형외과를 찾고, 다이어트를 하고, 무슨 무슨 라인을 꿈꾸며 헬쓰를 한다.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라고, 당당한 자아를 위한 힘찬 걸음인양 포장하고 위장하고 있지만, 왜 유독 여성들만 외모에 더 집착하게 될까. 예쁜 여배우가 연기까지 잘 하면 좋지만, 예쁘지 않은 여배우는 아예 존재 하지도 않는다. 가사 도우미처럼 버젓이 보통명사가 된 '노래방 도우미', 돈 받고 가랑이를 벌리지 않는다고 '성의 상품화'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소수가 아닌 대다수를 대상으로, 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넓은 아량을 빌미로 여성의 대상화, 성의 상품화는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닐까. 몇몇이 국회에 가고, 고시에 패스한 여성 수가 많아지고, 이혼율이 높아졌다고, 성에 있어 우리 사회가 진보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시, 미래가 더 나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경고의 메세지인가. 그것도 남성에 의헤서 말이다. 독재사회, 전쟁 등에서 가장 먼저 제물이 되었던 건 여자들이다. 미래가 전체주의 사회라면 섹스의 역을 지는 여성은 가능한 일일 수 있다. 과대망상? 민주주의사회라는 오늘날도 이미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
옳고 그름의, 정의에 대한 판단이 귀찮아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한 퀘스천마크를 포기한다면 무슨 일이든 벌어 질 수 있는 게 아닌가. 나의, 혹은 많은 여성의 현실이 불편한 진실처럼, 알지만, 의식하지만, 인정하기 싫은 무엇처럼 속을 불편하게 한다
개선되지 않은 불평등, 일방에 의한 억압과 지배는 사회구조 탓, 학습된 탓이 아닌 본능 탓이라면, 이런 논의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배하고, 억압하는 남성성과 사랑받고 안주하려는 여성성이 길러진 것이 아닌, 타고난 것이라면 말이다. 여성들에겐 이중의 적과 싸워야 하는 문제가 생기니 말이다.
냉정하게 여성으로서의 나를 돌아봤다. 결혼 10년차, 매를 맞거나 노예처럼 남편과 시부모님을 받들어 모시고 사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한 남자로, 편안한 친구로 그이를 좋아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주 부당하다 느낀다. 가족과 안정을 위해 꿈을 접고 사는 내 모습은 그렇다 쳐도, 나도 모르게 몸에 밴 희생정신에 의아해 질 때가 있다. 어느 순간 그이 눈치를 보고 있음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이가 결혼과 가족을 위해 포기한 것보다 내가 포기한 어떤 것들이 항상 더 큰 것인양, 아니 나만 무언가를 포기한 것인양 쭉 느껴 왔다. 이쯤이니 마누엘이 옪은 건가. 정말 날카롭고 영리한 이해이다.
문제는 그가 너무 많은 것을 '성'에만 할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 스스로 억압받는 성, 사회적 편견의 한 켠으로서의 성을 가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데 그에게 있어 섹스가 50이고 나머지가 50이라면, 대부분 사람들 아니, 내게 있어 섹스는 5에 불과하다. 삶의 전부가 아닌 일부로서의 '성'말이다. 물론 가지지 못한,억압된 성에 있어서는 전부가 될 수도 있음을 이해한다.
그의 글은 감각적이며, 회화적이며 보다 자극적이다. 성을 묘사함에 있어 결코 가시적이 않다. 이것이 마르케스와 마누엘의 차이다. 어쨌든 나는 마누엘 푸익의 글을 있는 대로 찾아내 읽게 될 것 같다.
<천사의 음부>
마누엘 푸익, 송병선 역, 을유문화사
무슨 말이 필요 있겠는가. 마누엘 푸익 작품이라는데..
과거 현재 미래.. 이야기속에 또다른 이야기인거 같지만 이 세시대가 모두 촘촘히
엮여있음을 발견할때마다 눈도 빨라지고 손도 빨라진다. 이 책을 읽는데 꼬박 십사
일이 걸렸다. 페론주의라던지 라캉이라던지 이런 익숙치 못한 용어들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며 봐야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금방 까먹고만다는..)
제일 집중해서 읽은 부분은 아니타가 절친인 (페미니스트)베아트리체와 애인인 (페
론주의자) 포지와 대화(논쟁)하는 부분이었다. 언뜻보면 아니타가 매우 감정적으로
대화를 한다고 볼 수도있으나 내가 보기엔 셋중에 가장 인내를 하면서 대화에 참여
하는거 같았다. 적어도 아니타는 그들보다 논리적이진 못할지라도 그들을 이해해보
려고 자기의 모든 머리와 감정을 기울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기에 아니타
가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녀는 그들의 대화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한 것일
것이다.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곱씹으며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같은 것을 보고도 천차만별의 생각이 존재한다는것을 깨닫곤한다.
내 생각만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내가 결코 상대방보다 잘나지 않았음을.. 왜 이
런 얘기를 하는건지 모르겠다.
요새는 남들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책을 보더라도 그런부분에서 오래 시선을
두곤한다.
p25 너한테 말해 주고 싶은게 있어. 부탁인데, 나중에 날 공격하기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면 안 돼.
p42 서른살의 여자들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시작하는 나이이다.
p206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닫힌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 말이예요. 그 사람들이 날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이렇게 횡설수설 하는 거예요
p372 인간은 모든 상황에 길들여지게 되어 있어.
2009. 12. 3.
날이 우중충하니 허벌나게 좋구만
[거미여인의 키스]를 먼저 읽으려다 좋은 기회가 생겨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야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제목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과 아르헨티나 페론 정권의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우선 세 가지 이야기가 과거와 더불어 오락가락하는 스토리이다. 먼저, 주인공 아니타는 암수술을 받고 정신적으로 매우 약해져 있는 딸 하나가 있는 이혼녀이다. '포지'라는 남자에게 정치적으로, 육체적(포지가 아니타에게 기대하는 것이 더 가깝다.)으로 의지하지만 결국 완쾌되는 내용이고 아니타의 일기와 꿈 이야기가 겹쳐 나온다. 일기에서는 무기상 거부에게 갇혀 사는 여배우가 등장한다. 하지만 탈출해 헐리우드에서 유명한 여배우가 되고, 꿈에서는 W218이라는 익명의 미래 창녀가 나온다. 미래에선 공공연히 여자가 직업으로 섹스머신이 되어 남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스토리이다.
아니타와 여배우, 그리고 W218. 모두 '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다. 아니 여자이다. 아니타와 여배우는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홀로 독립하지 못하고 남자에게 기대기도 한다. 나는 여자로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시대나 상황이 소설 속의 인물들과는 여러가지로 다르지만 나도 현재는 경제적인 부분에서 남편에서 100% 의지(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었지만 어쨌건 난 전업주부이고 돈을 버는 것은 남편이므로..)하고 있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본다. 얼마 전 읽은 [힐러리 파워]의 여성상과 이 책 속의 여성, 그리고 어제 IPTV로 신랑과 같이 본 [색, 계]의 주인공 왕 치와즈의 삶. 또 내 어린 딸들의 앞으로의 삶을 고민해본다.
참고로 책 전반에서 페론주의, 페론정권이 언급되는데 나처럼 처음접하는 분들을 위하여 올린다.
1943.6.4 - 아르헨티나 군사 쿠데타, 페론 실권 장악
1943 년 6 월 4 일 「통일 장교단」이라고 자칭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군부 내 소장파(少壯派) 장교들이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이 쿠데타 주모자 가운데 후안 도밍고 페론(Peron, Juan Domingo, 1895~1974) 대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페론은 일찍이 1930 년대 이탈리아 주재 무관(武官) 으로 근무하면서 파시즘의 대중 동원력에 매료되었던 인물이었다. 군사 정권 내부에서도 수차 대통령이 교체되는 가운데 페론은 국방부 장관·노동부 장관·부통령 겸 노동복지 장관 등을 거치면서 사실상 대통령을 능가하는 실권자로 성장했다. 노동부 장관·노동복지 장관을 역임하면서 노동자들의 정치적 잠재력을 인식한 페론은 이때부터 포퓰리즘 정책을 펴면서 그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전쟁 중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의 친독(親獨)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미국은 제 2 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 반(反)정부 진영을 고무하면서 민정(民政) 이양을 강요했다. 그 결과 파렐 발카르세 정권은 민정 이양을 약속하는 한편, 1945 년 10 월 초 페론을 구금했다. 페론의 부인 에바 페론을 비롯한 페론의 추종 세력들은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페론 석방 운동을 벌였다. 10 월 17 일 노동자들은 대통령궁(宮) 앞 에서 페론의 석방을 요구했고, 정부는 이에 굴복했다.
페론은 이듬해 2 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54 %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페론은 기존의 지배 세력이던 군부(軍部)·교회는 물론 노동 조합의 지지 까지 확보함 으로써 집권 초기 강력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