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페미니즘의 ‘ㅍ’(혹은 F)도 꺼내지 않지만, 이 소설집을 다 읽고 가장 먼저 느낀 소감은
‘김초엽은 페미니즘을 지향한다.’는 것이었다.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았지만 여성서사로 꽉 채워진 소설들을 보며, 이
책이 독자들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은 건 ‘SF’여서기보다는 소설 속에 내재된 페미니즘적 메시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엔 총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특이하게도 일곱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다. 더욱이 그들 중 대부분은 과학자이다. 통상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라 생각되는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전면에 배치시키면서, 김초엽은 과학기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인류 보편의 이야기로까지 서사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는 뛰어난 과학자 릴리 다우드나가 등장하는데, 이민자에 장애까지 있던 그녀가 완벽한
유전자를 조합했던 이유는 자신이 경험했던 장애나 차별, 혐오가 없는 세상을 바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인공 역시 여성 과학자다. 그녀는 딥프리징 기술을 연구하는 과학자였는데, 안티프리저를 개발하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지구에 남는다. 이
기술은 우주 개척의 다음 단계를 위해서도 의료계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기에, 인류의 미래에 기여한다는
마음으로 그녀는 연구에 매진한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의 '재경 이모' 역시 인류 최초의 터널 우주 비행사로
선발된 과학자다.
김초엽의 이러한
전략은 매우 영리해보인다.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웠을 때 쉽게 받게 될 비평들을 피해가면서 본인이 의도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을
부각시키지 않음으로써 김초엽은, 독자들이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게 하는 데 성공했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이 소설집이 가진 장점이자 최대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월간 채널예스> 12월호 커버스토리에는 김초엽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여기서
김초엽은 SF소설 중 한 작품을 추천해달라는 인터뷰어의 요청에 한 작품을 추천하기는 정말 어렵다면서, 작가를 추천한다면 어슐러 K. 르 귄의 작품이라고 답변한다. 나는 이것이 김초엽과 김초엽의 글쓰기를 이해하는 단초라고 생각했다.
즉, 김초엽은 어슐러 르 귄을 통해서 자신의
작품관에 대한 어떤 힌트를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SF와 판타지 소설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어슐러 르 귄 역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거나 자신의 소설이나 자신의 소설에 대해 페미니즘을 직접적으로 거론하거나 언급한 적은 없지만, 누가
뭐래도 SF와 페미니즘을 접목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르 귄의 대표작 중 하나인 『어둠의 왼손』
은 ‘게센 행성’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 행성에서는 성별의 구분이 없다. 다만 한 달에 한 번 무작위로
여성과 남성으로 바뀌는 때가 있을 뿐이다. 이런 설정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을 당연시하는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성역할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사실은 관습적인 고정관념들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SF가 가지는 미덕인데, SF가 이곳 아닌 다른 사회를 상상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페미니즘은 SF와 상당히 친화력이 있다.

페미니즘은 사회의 소외된 약자들을 품는다. 기실
역사 이래 지속되어온 남성 중심 사회에서 오랜 시간 약자였던 여성이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건 자연스럽다. 르 귄 역시 젠더 문제뿐 아니라 인종 문제에까지 두루 관심을 가졌다. 앞에서
언급한 『어둠의 왼손』의 주인공은 흑인인데, 이 소설이 출간된 게
1969년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 소설이 당시의 백인 중심 사회에 끼친 파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어슐러 르 귄이 SF와 페미니즘을 결합하고, 성별과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었던 것처럼 김초엽 역시 SF라는 도구를
통해 시대와 인간을 조명한다. 소설들의 배경은 가깝거나 먼 미래지만,
이 소설들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고 사유하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사는 이 곳이다. 따지고 보면 미래를 통해 현재를 들여다보는
것이 SF라는 장르의 속성이기도 하다.
주목할 것은 김초엽의
‘여성 과학자’들은 모두 실패를 경험하는데, 그 실패가 결코 끝은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채널예스>와의 인터뷰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인터뷰어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가족이 있는 행성을 향해 수만 광년을 가로지르는 안나는 실패가 예정되어
있어요. 하지만 출발한 채로 여지를 남겨놓죠.”라고 말하자, 김초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주로 그 가능성의
목격자를 쓰거나, 아니면 미래 세대에서 답을 찾는 것 같아요. 앞선
세대의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의 가능성이 될 수 있는 것들에 주목해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지켜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지켜보는
사람의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 실패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는 미래
세대에 대한 가능성이 제일 크게 보였던 것 같아요.”
나는 여기서 실패와
오류를 인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보았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의 릴리 다우드나는 분명 실패한 과학자다. 그의 기술은 오히려계급간의 차이를 견고히
함으로써, 이후의 세계는 ‘악몽’이 되었다. 그녀가 다른 행성에 새로운 마을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완벽한 유토피아’로 보이는 그 세계의 아이들 중 일부는 실패한 지구에서의 삶을 ‘선택’하는데, 김초엽의 인터뷰를 기초로 판단하자면 이조차 실패를 통해 다음
세대에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인공 안나는 과학자로서는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가족을 모두 잃었다는 측면에서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서 그녀는 불가능인 줄 알면서도 가족이 있는 곳으로 떠나는 ‘선택’을 한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다음 세대(자녀 세대)의 관점에서 이전 세대(부모 세대)의 실패를 들여다보고 해석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텐데, 우주인이 된 가윤은 '재경 이모'가
무엇을 선택했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그녀는 자신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재경의 도전이 인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재경이 터널 너머에서 우주 저편을 최초로 마주할 때 이쪽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그런 거시적인 관점의 답을 기대했(p.282)고, 이를 기준으로 하자면 재경의 선택은 실패이자 인류 전체에 대한 배신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가윤은 “이모에게는 우주에 가지 않는 것이 해방인 게 아니었을까?”(p.307)라고 말할 정도로 성숙한 사고를 한다.
나는 이것이 페미니즘이 나아갈 바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의
비판자들이 조목조목 지적하는 페미니즘의 문제점이나 한계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페미니즘이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실패와 오류를 인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그 가운데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며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점점 더 확장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관내분실」에서는 ‘마인드’를 통해 죽은 사람의 삶을 선명하게 이해하게 되고, 「공생가설」에서는
동물과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는 프로젝트가 시행되기도 하는데,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동물이나 어린아이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의사 소통이 가능하고 심지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다. 심지어 부모자식 간에도 말이다.
이때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념하고 포기하는 것이지만,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도들이 인간 사이의 견고한 장벽을 허문다.
「공생가설」에서는 사람의 아이를 양육하는 외계인들이 등장한다. 성장하면서 모두 그들을 잊었을때 유일하게 그들을 기억한 사람이 류드밀라였다.
「스펙트럼」에서는 다섯 개의 위성이 뜨는 행성에 홀로 남겨져 외계인과 조우한 과학자 희진이 등장하는데, 희진은 결국 루이의 언어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외계인과
사람 사이도 그렇다면, 인간 사이에도 이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노력만 한다면.
「관내분실」에서
엄마의 마인드를 만난 지민이 그랬듯이 말이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게 진짜로 엄마의 지난 삶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이제…… 엄마를 이해해요.” (p.271)
이해를 통한 관계의
확장, 관계의 확장을 통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이 지향해야 할 바라면, 김초엽의 소설들은 인종과 계급, 세대의
차이를 극복하는 페미니즘이 나아갈 바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하고 가치있다고 할 수 있겠다. 르
귄의 계보를 잇는 그의 소설 세계가 더욱 확장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