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시는 이제 유물이다. 나에게.
시가 다시 내게 들어올 수 있을까? 시적 감수성이 사라진듯 하다. 아마도. 시의 계절이 다시 돌아오는데, 본능적으로 시를 찾지만, 아니 시를 잊고 지나갈 때가 더 많다. 계절적으로 나에게는 5월이 시의 계절이다. 퍽퍽하고 각박한 도시에서의 노예적 삶이 나에게서 시를 멀어지게 한 걸까?
시는 기본적으로 정서다.
더군다나 외국시는 언어가 정서적으로 맞지않아 다가오기는 더욱 힘들다.
알 일이 없는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를 처음 알았다. 시로 다가온 것이 아니라 정서로 다가온다. 시는 곧 정서라고 했는데 시는 안오고 정서만 왔다고 하니 모순이네. 히메네스가 모순이 아니라 온전히 시를 시로 못받아들이는 내가 모순이다.
은빛나는 나귀의 이름이 일반적으로 '플라테로'이다. 흰색나귀는 '까노'라고 한단다. 우리가 예전에 개를 부를 때 흰둥이, 검둥이, 바둑이, 누렁이 등으로 불렀듯이 당나귀가 흔했던 곳에서도 그런 식의 이름들이 붙었던 모양이다. 플라테로를 굳이 우리말로 옮기면 '은둥이' 아니면 '은동이'쯤 되지 않을까?
동화같지만 작가는 동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말은 어른도 시인의 눈에는 아동과 다름이 없고 시나 동화나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동일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산문 혹은 산문시의 형식으로 쓰여졌는데 완연한 시적 정서로 다가온다. 오히려 운문시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성들이 배어 있다.
플라테로는 이 책의 주인공이고 시인의 당나귀이다. 시인은 심각한 정신적 우울증세에 시달리며 두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을 한다. 그 과정에 고향인 모게르에 돌아와 플라테로와 같이, 플라테로가 죽을 때까지 같이 생활한다. 변해버린 고향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드러내지만 독자인 내게 다가오는 것은 신선과 같은 유유자적함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선과 당나귀와 아이들의 따뜻한 세상을 그린 그림같다. 플라테로는 선택받은,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실존했던 당나귀임에 틀림없다.
'만일 그가 시인인 내게 오지 않고 밤중에도 남의 소나무를 도벌하러 깜깜하고 외롭고 고된 길을 강요하는 석탄 장수에게 넘어갔더러면, 혹은 당나귀들에게 화장을 시키고 비소를 먹이며 귀를 빳빳이 세우게 하려고 핀을 박는 집시들 손으로 넘어 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당나귀의 운명이란 것이 항상 하층민들의 고된 삶과 맞물려 있고 그들의 생계수단이어서 혹독한 고통 속에서 살아 가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에게 온 플라테로는 인간과 자연과 아이들의 친구로서 살아간다.
'나는 플라테로를 어린 아이 다루듯 한다. 길이 좀 험하거나 짐이 부겁다 싶으면 내려서 같이 들어 주곤 한다. 뽀뽀해 주고 놀리기도 하고 화나게 만들기도 한다. 플라테로는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에 삐치지는 않는다. 플라테로는 나와 똑같고 다른 당나귀들과 다르다. 내 생각에 우리는 꿈도 함께 꾸는 것 같다.' '...너를 묘사한다면 당연히 봄날의 동화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착한 사람을 가리켜서 당나귀라고 비유해야 하는 것 아니겠니? 또 나쁜 당나귀에게는 "이 사람같은 놈아"라고 해야겠지? 너에 대해 말하자면 괴장히 똑똑하고 노인과 어린이의 친구이자 개울과 나비의 벗이고 태양과 개, 꽃과 달의 동무이지. 참을성도 많고 생각이 깊고 우수에 차 있으며 또 얼마나 다정한지, 너는 들녁에 서 있는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야!'
주인을 잘 만나 시인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플라테로를 보고 쎄가 빠지게 일하고 있는 다른 당나귀들의 질시를 살까봐, 혹은 양심의 가책에 시인은 프라테로가 일하는 척 연출을 한다.
' ''''짐을 잔뜩 실은 다른 나귀들이 한가하게 놀고 있는 플라테로를 바라본다. 플라테로를 싫어 하거나 나쁘게 생각할까 봐 나는 플라테로를 데리고 옆 작업장으로 가서 포도를 싣고 줄 서 있는 나귀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 압착기가 있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는 은근 슬쩍 플라테로를 그 곳에서 다시 데리고 나온다.'
그런 시인의 당나귀 플라테로는 아이들의 친구이다.
'여자애들이 첫번째 오렌지나무에 도달했을 때 거기서 게으름을 피우던 플라테로는 뜀박질 놀이에 전염되어서 여자아이들 틈에 끼어 냅다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플라테로는 어느 날 정오에 하늘 나라로 갔다.
'"내 친구 플라테로야" 나는 땅을 보며 말했다. "아마도 너는 지금 하늘나라의 풀밭에서 아기천사들을 복슬복슬한 네 등에 태우고 있을거야..." 그러자 마치 내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전에는 보이지 않던 하얀 나비 한 마리가 그의 영혼처럼 이 꽃 저꽃을 옮겨 다니며 가볍게 날아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