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들은 실험적인 작품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전위적인 뉘앙스가 강하게 풍기는 예술작품은 그저 문화엘리트나 평론가들만의 고귀한 기호품으로 향유되고, 대중들은 그런 작품들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누보로망의 대변인 알랭 로브그리예의 대표작 [엿보는 자]가 국내에서 이처럼 푸대접을 받다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어찌 읽을만한 서평 하나 없을 수가 있을까. 한심하다. [엿보는 자]는 1955년 프랑스 비평가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모리스 블랑쇼, 조르주 바타유, 롤랑 바르트와 제라르 주네트 등 당대 걸출한 신비평가들의 주목과 찬사를 받았었다. 전통적인 소설형식이나 관습을 부정한 실험적인 앙티로망(반소설) 작품으로, 내용보다는 형식을 강조하고 심리적 해석과 은유를 배제한 평면적 글쓰기 혹은 '사물 중심적 글쓰기'를 재현하고 있다. 또한 소설의 전통적인 서사양식인 시간적 순서에 따른 연대기적 흐름을 파괴한다.
"의식이 지각하는 계기적 시간성에 대한 불신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의식과 세계 사이의 균열, 생각의 현재 속에서만 유효한 의식의 불연속성과 비일관성, 지속성을 띤 무의식적 시간과 의식의 단절을 재현하려는 새로운 리얼리즘의 실천이었다."(301-2쪽)
로브그리예가 이 책에 붙인 원래의 제목은 [여행자](Voyageur)였다. 그러나 출판사와의 협의 하에 [엿보는 자](Voyeur)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러니깐 원래 제목에서 알파벳 a와 g가 빠진 셈이다. 여행자이든 엿보는 자이든 시계 세일즈맨 마티아스가 주인공이다. 마티아스의 생김새나 나이 등에 대한 서술이 없기에 내 머릿속에 그려진 마티아스는 다소 흐릿한 생김새로 남아 있다. 카뮈의 이방인을 닮았다고 할까. 이미지가 그렇다. 마티아스의 고향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8자 모양의 섬마을이다. 약 2천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섬 사람들이 그에게 지난 30년간 변한 게 없다고 말한 걸로 보아 마티아스는 30세를 훌쩍 넘긴 아저씨다. 섬마을이 마티아스의 고향이기는 해도 아주 오랜만에 들렀기에 역시 여행자나 이방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마티아스는 뭍으로 가는 배를 타기 전에 손목시계 재고 89개를 모두 팔아치울 계획을 세운다. 뭍으로 배가 떠나는 시각은 오후 4시 15분. 배는 화요일과 금요일, 주당 2회만 운항했고 당일 왕복이다.
마티아스는 항구에서 시작하여 시골 도로변의 집들을 가정방문한다. 판매는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마티아스는 판매원보다도 일종의 자전거 여행자가 된다. 오전 11시 30분, 마티아스는 도로변의 2킬로미터 전환점에 도착한다. 그리고 12시 30분부터 여행자 마티아스의 일정이 이리저리 소개된다. 11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마티아스의 일정에 한 시간이 비어있다. 더군다나 마티아스는 배를 놓쳐 금요일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수요일, 절벽 아래에서 벌거벗겨진 열세 살 소녀 자클린의 시체가 발견된다. 게잡이 어부들이 2킬로미터 전환점 아래 암벽들 사이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범인은 과연 마티아스일까?
알랭 로브그리예 저 / 최애영 역엿보는 자LE VOYEUR 를 읽고나서 작성하는 리뷰입니다. 평상시에 을유문화사 전집을 좋아하는 편이라 야금야금 이북으로 한권씩 사다가 알랭로브그리예의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계세일즈맨인 마티아스가 작은 섬마을에 들러 89개의 재고를 다 털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