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단편이지만 비유적이고 함축적인 내용들이 많아서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낯선 것' 과 '옛 것'의 대립이라는 큰 틀에 비추어 작품을 감상하니까 이해하기가 수월했습니다. 단순히 네마리 오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오리의 희극'은 오리가 올챙이(낯선 것들의 유입-어린 것으로 부터의 시작)를 잡아먹고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것들을 가르쳐 준 선생이 떠나는 것으로 신문물 정착의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두 남녀간 사랑과 헤어짐 이야기를 그린 '죽음을 슬퍼하며' 는 주인공이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진실을 공허함과 뒤바꾸고 앞으로는 진실을 말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이는 자신(루쉰)의 개혁적 사상을 '진실'로 말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을 비유적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신화, 이야기, 고사등의 다양한 제재를 이용하여 이 시대의 현실을 담아 낸 점이 정말 대단하고, 이렇기 때문에 루쉰을 세계적 대문호라고 일컫는 구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앞 두 부분보다, 고사신편의 내용들이 더 머리에 남습니다.
책을 읽는 재주가 부족하다보니, 되도록 정독을 하려고 노력한다. 또 한가지의 나쁜 습관이라면 읽은 책을 대체도 다시 보진 않는다. 처음에 잘 읽고, 감명깊에 다가온 내용을 더 기억하기 위함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다, 그래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질때 다시 한번 찾아보는 정도가 나의 습관인듯하다.
아마 삼국지와 일부 동화를 제외하고 같은 책을 두번본건 거의 처음인것 같다. 비행기에서도 본 영화는 지겨워도 안보는 편인데..유명한 작가이고 사상가라 알려져있고, 첫번째는 아Q정전이 아닐까한다. 처음 읽을땐 정신승리법이란 말에 재미가 있고, 20세기초의 암울한 시대속에 서구문명의 상징처럼 영어가 사용되는 것들이 신기하다. 그런데 문득 문득 세상을 살다보면 뜬금없이 루쉰소설이 생각나는건 강렬하다기 보다는 은은한 깊은 향이 베는 것 같다. 또한가지 사회주의적인 느낌이 있을가하는 선입견이 소설 편편히 녹아있는 높은 고전에 대한 이해, 서구문명에 대한 이해를 보면 두루 깊게 공부하는 작가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대개 재주가 많으면 끼니걱정을 한다는데 여러재주를 깊이있게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감탄할 뿐이다.
내가 원래 갖고 있는 책에 신고사신편이 몇편밖에 없어 다시 사서본 책이다. 8편중에 우임금의 이야기인 치수(理水)를 통해 현대사회가 혹시 그러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고, 죽은 자 살리기(起死)를 통해서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가장 인상적인 건 출경(出關)이란 생각이 든다. 어려운 시기에 고전을 재미있게 재해석하고 이야기를 엮어내는 그의 상상력이 요즘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하는 생각이 든다. 고전에 갑자기 나오는 OK를 보면서 빙긋웃는 내 모습을 돌아보며 차면 족한줄 안다는 기분을 느낀다.
한가지 역자의 변에서도 말했지만, 조금 현대적인 언어가 요즘 독자에겐 좋겠지만 또 버겁더라도 원문에 가까웠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한자공부의 부족이 아쉬운건 아마 원문이 루쉰의 생각에 좀더 가까이 가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항상 손 닫는 가까운 곳에 둘 계획이고 참 권장하고 싶은 작가이다.
나는 중국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닌 덕에 다른 한국친구들보단 훨씬 더 많은 훌륭한 중국 문학작품을 손쉽게 섭렵할 수 있었고, 그 중에서도 중국 현대문학의 창시자인 루쉰의 작품은 정말이지 지겹도록 교과서에 매번 등장했다. 이 때문에 나는 어린 나이에 이해하기가 많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루쉰의 작품은 일일이 사전을 찾아가며 끈질기게 읽어 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특히 아Q정전은 정전(正傳)이라는 단어에 어느 인물에 관한 내용이겠구나... 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중국이름 같아 보이지 않는 阿Q는 과연 외국인의 이름일까? 하는 의구심에 중국어판으로 읽기 시작했고,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한국어판으로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루쉰의 명성을 있게 해준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아Q정전은 중국농촌의 한 마을에서 가장 하층인물에 속하는 날품팔이꾼 아Q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의 비극적이고도 변화무쌍한 삶을 통해 신해혁명 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변화에 대응해 나가는 중국인의 자화상을 그려냈다.
아Q의 이름이 외국인의 이름 마냥 이렇게 표기된 이유는 그의 행적을 그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았을뿐더러 정체조차 불확실했기 때문에 작가 또한 첫 장에서 볼 수 있듯이 지인에게도 묻고, 자료도 찾아가며 고심 끝에 붙인 이름인 것 같다.
아Q의 변화무쌍한 짧고도 짧은 인생에서..건달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왕털보와 이 많이 잡아먹기 내기를 할 때, 비구니를 희롱할 때 ,일거리를 잃어 성에 들어가 돈을 벌어왔는데 알고 보니 도둑질한 것임이 탄로 났을 때 등등 그는 항상 자기기만으로 자존심을 찾곤 했다. 특히 정신승리법이라는 이상한 방법으로 굴욕을 당하고 낭패를 보아도 오히려 필요이상으로 자기합리화를 하고, 약한 자는 괴롭히고 강한 자에게는 굴복하며 승리감에 젖어 의기양양해 졌다. 또한 무지하고 자존심이 매우 강해 매번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도취에 빠져 허세를 부리기 일쑤였다.
시대적인 이유로, 신해혁명이 일어나 혁명당이 아Q가 살고 있는 마을까지 밀어닥쳤고 그들이 힘을 쓸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Q는 또 다시 성격상 희망, 포부, 의지를 가지고 그들을 무조건 적으로 따라하고 싶어 했으며, 혁명에 참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 어떤 누구도 아Q의 반란을 허락하지 않았고, 몇 일후 이상하게도 아Q가 예전에 일을 했었던 나으리의 댁이 갑작스레 폭도들에 의해 약탈당했고 아Q는 폭도로 오인돼 끝내 사형을 당한다.
더욱더 비참한 것은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Q의 억울한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총살은 목을 자르는 것만큼 볼 만하지 못하다."
이렇게 아Q의 삶은 허무맹랑하게 끝이 나버렸다.
이는 자기 자신을 직시하지 못해 현실에서 패배하였으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생각 속에는 여전히 자신이 승리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정신적 승리법과 이른바 노예근성 때문에 끝내는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꼴이 되어버렸다.
끝으로, 아Q를 아무리 모욕을 당해도 저항할 줄 모르고 오히려 머릿속에서 자신의 정신적 승리로 소화해 버리는 중국인들의 공허한 영웅주의에 빗대었다. 또한 민족적인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대국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오래된 중국인들의 사상을 형상화한 작품이 바로 아Q정전인 것이다.
중국은 서구 열강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있었지만 중국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과거 지향적, 자기중심적, 허세만 부리고 의기양양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왜곡된 태도를 비판하고 만약에 신해혁명 때 중국민족이 대국주의 의식을 버리고 민족의 위기 속에서 다 같이 힘을 모아 대처하고 노력을 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루쉰의 작품을 모국어로 다시 읽게 되니, 역시 오리지널판 으로 읽었을 때와는 확실히 또 다른 느낌인 것 같다. 아무래도 모국어라 그런지...내용에 좀 더 깊게 파고들 수 있었다고나 할까...
루쉰의 작품 중 아Q정전 외에도 널리 알려진 작품들이 많은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또 다시 한국어판으로 읽어보고 싶다.
몇해전 중국 북경에 가 본적이 있다 한국과 참 흡사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사람들의 생김새도 그렇고~북경 골목길에서 자전거인력거를 타면서 운수좋은 날 을 생각했다
북경에 가기전 북경여행에 관한 가이드서적 몇권을 읽고 갔다
그런데 이제와서 루쉰전집을 읽어보니 여행가기전에 루쉰의 소설 몇편이라도 읽고 갔으면
훨씬더 중국과 중국인들을 느낄 수 있었을건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치 시원하고 산들산들한
바람을 피부에 기분좋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중국을 느낄 수 있었는데 --- 가이드서적만 읽고 간것이
안타깝다
중국에 관심이 있어 중국배낭여행을 원하시는 분 ,장기체류를 하실려는 분들에게 여행안내책자와
함께 루쉰전집을 일독하시기를 강추한다
시간이 없으시면 아큐정전이라도 꼭 한 번 읽고 가시길~~~
"인력거꾼은 그 노파의 말을 듣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여인의 팔을 부축하여 한 발짝식 파출소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작은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