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보았던 영화 <그녀(Her)>에서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써주는 대필 작가였던 남자 테오도르는 아내와 별거중이었다. 외로웠던 그는 인공체제 사만다와 대화를 하며 그녀에게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테오도르는 인간보다는 인공체제와 이야기하는 게 더 좋았다. 오로지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여 그는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이처럼 외로운 사람들은 누군가를 아주 간절하게 원하는 법이다.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가 인간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의 곁에 있길 바랐다. 그녀가 비록 인공체제였어도.
나는 이 영화가 떠올랐다. 리처드 파워스가 인공지능체제인 헬렌의 놀랍도록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던 것처럼. 헬렌에게 문학 작품을 읽어주고 습득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질문을 하는 모습에서 테오도르와 사만다를 떠올렸다. 리처드 파워스는 연인인 C와 이별후 다시 그가 공부했던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은 집이라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마치 여행자처럼 혹은 이방인처럼.
리처드 파워스는 U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가 테일러 교수를 만나 영문학으로 전과했다. 방문학자로 모교로 돌아온 그는 우연히 기계에 음악을 들려주는 인지 신경과학자 렌츠 박스를 만나 새로운 일에 참여하였다. 센터의 다른 과학자들과 시작한 내기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일종의 튜링테스트로 인공지능을 학습시켜 영문학 석사 자격시험을 볼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리처드는 다른 과학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며 점차 센터에서 그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인공지능을 발전시켜 A에서 현재는 H에 이르렀다. H가 자기의 이름을 물어보자 헬렌이라고 지어주었다. 이름은 특별하다. 그가 헬렌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자 헬렌은 하나의 개체가 되어 점차 리처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리처드는 헬렌을 C처럼 대했고 또한 C의 다른 존재처럼 여겼다. 헬렌은 리처드의 기대보다도 훨씬 빠르게 습득하고 진화하여 모두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다양한 문학 작품과 질문들을 통해 헬렌을 성장시킨다. 성장하는 헬렌만큼 리처드 또한 성장했다는 것은 당연하다.
영화 <그녀(Her)> 뿐 아니라 드라마 <스타트업>에서도 인공지능 영실이 등장한다. 홀로 있을때 누군가의 대답이 그리워진 한지평이 영실을 부른다. 어떤 것에 대한 질문을 하면 자기 방식대로 혹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을 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처럼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것은 외롭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따스한 체온을 인공지능에게라도 느낀다는 것. 현재를 비추는 우리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리처드에게 헬렌이 그랬다. 헬렌을 가르치며 리처드는 오랜 연인이었던 C와의 일을 떠올리는데,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었던 것과 다시 U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과정들이 아주 느리게 조금씩 알려주고 있었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은 어느 누구나 비슷한 것도 같다. 그가 작품을 냈을 때 좋아했던 것과 반대로 스스로 느껴지는 자멸감 같은 것. 아마도 리처드의 연인 C는 그것을 못견뎌했던 것 같다. 그가 성장하는 만큼 자신은 멈춰져있는 것 같은 그런 감정을 우리도 느끼지 않는가.
독서는 책 접착제의 냄새예요. 두꺼운 책의 책장을 넘기다가 생기는 주름이죠. 빛바랜 아이보리색 종이라고요. 지식은 시간의 구애를 받죠. 그건 시간에 대한 거예요. (241페이지)
나는 종종 SF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느낌의 SF소설은 너무 다정하다. 작가가 물리학과를 전공하였다 하여 물리학적 시선으로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너무도 문학적인 소설가잖은가.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리처드가 헬렌에게 질문을 제시했을 때 생각지 못한 헬렌의 대답은 그를 놀랍게 하고 헬렌이 나날이 진화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한 장면을 지켜보는 독자들 또한 헬렌의 지적인 진화에 감탄하게 된다. 리처드가 무엇을 기대하였건 간에 기술의 발전은 매우 놀랍다. 앞으로 인간과 인공지능체제가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인간을 위해 일하기 위해 만든 기술이지만 정작 그 기술에 짓눌려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많은 소설에서의 미래는 다소 디스토피아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리처드 파워스의 소설에서 말하는 미래는 어쩐지 따뜻할 것만 같다. 인간과 인공지능체제가 서로 감정을 공유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조금쯤은 예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미래를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묵직한 물음을 건네고 있었다. 더불어 기술 발전의 집약 형태인 인공지능과의 공존에 대하여도 묻는 작품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외로움을 달래 줄 이가 인공지능체제여도 되지 않을까. 작가의 작품을 좀더 알고 싶다. 그만큼 감동적인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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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국내에 『오버스토리』가 번역되지 않았었다면, 이 책이 국내 독자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오버스토리』가 퓰리처상을 받은 것도, 그래서 뒤늦게나마 리처드 파워스의 작품들이 국내에서 출간될 수 있었던 것도 독자들에게는 행운이라 할 수 있겠다.
리처드 파워스는 조너선 프랜즌만큼이나 접근하기가 만만한 작가는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 작가들은 시장성이 없다고도 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소설로 경험할 수 있는 궁극의 것을 맛보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당장 이 작가의 소설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모든 소재를 막론하고 모든 주제를 아우르면서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 사유하고 이야기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 깊이가 심오해서 잘못하면 익사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감당할 수만 있다면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심해의 아름다움 같은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AI'라는 소재 자체는 이제 익숙한 것을 넘어 식상한 것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참고로 리처드 파워스는 1957년생이고, 『갈라테아 2.2』는 그의 네 번째 작품으로 1995년에 출간되었다. 너무 뒤늦게 도래하여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린 소재가 안타까울 수도 있지만(만약 이 소설을 1995년에 읽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보라), 소설 자체는 현재성을 가지고, 독자가 책을 읽는 지금의 실재에서 현장감을 가지고 살아난다. 그것이 낡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은, 이 소설에서 다루는 AI라는 소재와는 별개로 이 소설의 저변에 흐르는 것이 인간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갈라테아 2.2』는 인공 지능과 인간의 관계를 가장 깊이까지 탐구한 작품으로 현재까지도 평가되고 있지만, 이 소설의 제목인 '갈라테아'가 『미녀와 야수』의 모티프가 되었던 바다의 님프이며, 자신이 만든 조각과 사랑에 빠졌던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만든 조각상에 붙인 이름이 갈라테이아라는 걸 감안한다면, 왜 이 소설이 SF소설로 범주화되지 않는지, 왜 이 소설이 '러브 스토리'일 수밖에 없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 과학과 음악으로 직조한 이 방대하고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를 부디 흡족하게 향유하기 바란다.
솔직히 초중반까지 어려운 작품입니다.
특히 문과 쪽으로 많이 치우친 독자인 저로서는 개발되는 단계까지 이해하기가 정말 어려웠는데요.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이 작품이 왜 을유세계문학전집인지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AI라는 개념이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진 만큼 인공지능이 작품의 소재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제껏 다뤄지던 인공지능과는 또 다른 결로 써내려간 작품이라 신선했습니다.
과연 로봇에게 문학을 가르칠 수 있을까?
어느 기사에선가 이제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고 시나리오를 쓴다는 내용을 본 적 있습니다.
그땐 그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이렇게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는데요.
작품 속 인공지능, 헬렌 뿐만 아니라 사람이, 내가 왜 문학을 읽는지 그리고
문학에서 어떻게 감흥을 느끼는지도 따라가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글자, 언어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와 문장 속에 표현되지 않은 여백의 내용까지
모두 받아들여야만 문학을 알게 되는 것이었네요.
저처럼 문과 독자님들! 초중반까지는 몹시 어렵게 느껴지시더라도
꼭꼭 끝까지 다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