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화 사회의 인간화를 위한 제언
1968년. 당신에게 ‘1968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우리 곁을 수없이 지나가는 연도 가운데 하나로 느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서방 세계에서 1968년은 하나의 시대를 가르는 상징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1968년은 1968년 파리 시위를 기점으로 전 세계로 확산된,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변혁을 추구하는 움직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 책, 에리히 프롬의 <희망의 혁명> 또한 이런 ‘68혁명’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1967~1968년 미국 반전(反戰)운동의 물결을 타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유진 매카시(Eugene Joseph McCarthy, 1916~2005) 상원의원에 일종의 지지선언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본의 효율화에만 몰두, 인간을 부속품화 시키는 ‘야수 자본주의’가 아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지향하자는 호소이기도 하다. 이것은 초판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1968년에 미국이 처한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쓴 책이다. 이 책은 우리가 지금 교차로에 서 있다는 확신에서 나왔다. 하나의 길은 인간이 핵전쟁으로 파괴되지는 않더라도 기계 속 힘없는 톱니바퀴에 불과한 존재가 되는 완전 기계화 사회로 이어지고, 또 다른 길은 인본주의와 희망의 르네상스, 인간의 행복에 복무하기 위해 기술이 존재하는 사회로 이어진다.
이 책은 우리가 처한 딜레마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문제의 본질을 명확하게 보여줄 의도로 썼으며,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호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비합리성과 혐오가 아니라 이성과 생명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의 도움이 있으면 필요한 새로운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썼다. [p. 5]
기계화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해법에 대한 얘기는 개정판 서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내가 앞서 쓴 책들과 달리 이 책은 새로운 이론적 개념의 발전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내가 이전에 학문적인 접근 방식으로 다루었던 개념들을 재구성해서 아직도 많은 이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생명에 대한 사랑, 즉 생명애(biophilia)에 호소할 목적으로 썼다. [pp.10~11]
절망적인 미래, 희망은 존재하는가
에리히 프롬은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에서 묘사하고 있는 기술정보화 사회가 현실화되고 있고, 인간이 이러한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마저 잃어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서양에서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본 순간부터. 그리고 과학의 발전 혹은 과학적 진리를 찾으려는 과정은 이 터무니없는 일을 오랜 시간에 걸쳐 현실화했다. 이런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모두 알고 있듯이 삶이란 선택의 과정이고, 인간은 ‘선택’이라는 결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과연 옳은 결정이었나 의심으로 고통스러워하느니 차라리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그 선택을 확신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p. 99]
나아가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서 저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랄 것이다. 과거에는 신(神)이나 과학이 그 결정의 근거였고, 사람들은 그 결정을 해석해주는 성직자나 과학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신뢰가 사라졌고, 신(神)과 과학의 위치를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예측 가능성과 확실성을 보장하는 ‘AI’가 대체하려 한다. 이렇게 자연을 정복한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컴퓨터, 혹은 인공지능(AI)라고 불리는 존재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 한가운데서 망령이 떠돌고 있다.
~ 중략 ~
(그 망령은) 컴퓨터의 지휘 아래 최대의 물질적 생산과 소비에 온 힘을 쏟아 붓는 완전 기계화 사회라는 새로운 망령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과정 속에서 인간 자신은 기계의 한 부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잘 먹고, 즐겁게 대접 받지만, 수동적이고, 활기 없고, 감정조차 거의 없는 존재로 말이다.
~ 중략 ~
어쩌면 지금 가장 불길한 것은 우리가 시스템의 통제권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컴퓨터가 계산을 통해 우리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리면 우리는 그저 그 결정을 실행에 옮길 뿐이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목적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밖에 없다. 우리는 무엇도 하려 하지 않고, 하지 않으려고도 않는다. 우리는 핵무기로 멸종의 위협을 받는 동시에, 책임지고 무언가를 결정하는 위치에서 배제되어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 바람에 내면에서부터 서서히 죽어갈 위협도 받고 있다. [pp. 19~20]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절망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희망도 존재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 답하기에 앞서 저자는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욕망임을, 또한 희망의 대상은 사물이 아니라 삶이라고 정의(定義)한다. 그런 후에 희망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임을 명시한다.
희망의 대상이 어떤 사물이 아니라 더 충만하고 활력이 넘치는 삶일 때, 끝없는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해방일 때 진정한 희망이 된다. 신학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구원(salvation), 정치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혁명(revolution)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종류의 기대라면 희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수동적으로 ‘마냥 기다리는’ 속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 아니다. 사실 그런 희망은 결국 체념, 혹은 한낱 이데올로기의 가면에 불과하다. [pp. 29~30]
희망이란 존재의 상태다. 준비가 되어 있는 내면의 상태, 열정적이지만 아직 쓰이지 않는 능동성(activeness)이다. [p. 39]
그리고 이러한 희망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처럼 ‘판도라의 상자’에 홀로 남아있지 않는다. 신념, 불굴의 용기와 함께 한다.
희망, 신념, 불굴의 용기가 있다고 해서 교차로를 지난 우리의 미래가 밝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인식이 정확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일 수 밖에 없다.
먼저 기술의 발달에 따라 육체적으로 편리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퇴행(退行)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대신 인공지능(AI)의 결정에 의지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일 수는 있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보면, 기술발전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 심화를 완화하기 위해 투입되는 예산과 인원은 낭비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을 방관하기만 한다면, 앞으로의 사회에서 인간이 설 자리도 사라질 지 모른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의 미래는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비효율적인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말살하는 방향으로 흐를지도 모른다.
에리히 프롬은 먼저 보편적인 원칙과 가치관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인간 특유의 능력이 더 위대하게 펼쳐지는 데 기여하고, 생명을 조장하는 것은 모두 가치 있거나 선하다. 생명의 목을 조르고 인간의 능동성을 마비시키는 것은 모두 부정적이거나 나쁘다. [p. 166]
그러면서 구체적인 대안으로 ‘인간적인 기술’ 혹은 ‘기술을 인간화’한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정보화 사회’를 추구하자는 얘기가 된다.
기술사회를 인간화하는 데 필요한 혁명적 변화, 즉 기술사회를 물리적 파괴, 비인간화, 광기로부터 구원하는 데 필요한 변화는 반드시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야 한다. 이런 영역 모두에서 동시에 변화가 진행되어야 한다. 시스템의 어느 한 부분에서만 변화가 일어나면 시스템 자체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그 병적 증상을 다른 형태로 재현할 뿐이기 때문이다. [p. 257]
<희망의 혁명>에 대한 해설을 맡은 이성태 교수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기술의 발전이 야기한 불평등과 경제적인 억압을 해소하기 위한 변화,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사회적인 정의와 평등을 추구하는 변화,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권력과 의사결정에 대한 참여와 투명성을 증진하는 변화,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창의성, 융통성, 공동체 의식을 존중하며 인간다운 가치를 강조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p. 279]
라고 한다. 이러한 변화를 ‘새로운 인본주의 운동’, ‘영적 르네상스’ 혹은 ‘문화 혁명’ 어떤 명칭으로 불러도 상관없다. 다만, 생명을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삼는 사람들을 통해 이러한 개념들이 뿌리를 내리고 발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 중심의 기술사회로 진화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선언에서 그치면 그저 경건한 척 위선을 떠는 부질없는 희망이나 이상주의적 몽상이 될 것이다. 실천이 필요하다!
실천이 없는 아이디어는 메마른 장소에 보관된 씨앗과 같다. 그 아이디어가 영향을 미치려면 흙에 심어야 한다. 그리고 그 흙은 사람 그리고 사람의 집단이다. [p. 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