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회색인간 ㅡ 김동식 , 요다
우린 때로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재밌는 상상을 한다. 만약 좀비가 갑자기 등장하면 어떻게 할까? 외계인이 침공하면 어떻게 될까? 와 같은 상상들. 이런 상상력을 조금 더 밀고 나가 재앙 속에서의 인간들의 현실적인 모습, 인간의 욕망을 나타내는 작가 김동식이 있다. 그는 2016년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공포 게시판에 소설을 쓰기 시작해 인기를 얻었고 그의 글은 소설집으로 엮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책이기도 하고, 상당한 팬층을 소유한 작가였기 때문에 독서모임 도서로 <회색인간>을 선택했다. 그의 글은 흥미로운 배경 설정과 뻔하지 않은 결말을 통해 흥미를 자아낸다. 그런 점에서 도파민을 자극하는 소설집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분량도 짧고 읽기 쉽게 쓰였기에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읽고 나면 마치 웹툰 한 편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소설의 배경은 판타지(주로 재앙)라 할 수 있지만, 그 상황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현실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이 가는 곳으로 운석이 따라다니는 <운석의 주인>에서는 인류가 이 주인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돈독 오른 예언가>에서는 미래를 보는 예언자를 한국 정부가 어떻게 활용할지 논의하는데, 능력자 혹은 인재를 우대하지 않는 한국의 현실을 보여준다. 노인들의 정보를 가상현실로 보내고 육체는 소멸시키는, 노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만들어진 <디지털 고려장>에서는 디지털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고, 그것을 다루는 '살아있는'인간의 결정들을 보여준다. 업데이트에 상당한 돈이 드는 모습까지 현실적으로 묘사한다. 50명의 사람들이 동굴에 갇혀 벌어지는 일들을 TV로 시청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444번 채널의 동굴인들>에서는 타인의 삶을 그저 유희로 바라보는 인간과 흥미가 쉽고 빠르게 옮겨가는 현대 사회를 그린다. 가까이 다가서면 사람들을 잡아먹는 <식인빌딩>에서는 빌딩에 갇힌 사람들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하는, 누구를 희생시켜야 하는가와 같은 사람들의 갈등이 그려진다.
이와 같이 그의 소설은 불평등, 착취, 이기심, 관음, 유희, 비인간성, 자본주의의 잔혹성, 인간의 욕망의 주제를 넘나든다. 소설은 다양한 사회적 비판점들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음미하며 깨닫기보단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용을 곱씹고 사회문제를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비판점을 생각한 후 그 생각과 감정들을 휘발시키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을 했다. 애초에 흥미로운 상상력, 기획으로 시작해 현실적 사회상을 보여주는, 일종의 상상적, 지적 유희를 이끌기 위한 글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흥미와 메시지 어느 정도 갖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잠깐의 유희를 제공하는 웹 소설 형식의 소설집도 인기를 끄는 것 같다. 평소에 가볍게 생각했던 시나리오를 나름대로 풀어준 대리 충족을 느낀달까. 나는 소설집으로 묶인 웹 소설을 처음 접했는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깊이를 느끼진 못했지만 애초에 고전과 웹 소설의 역할은 다르지 않나.
<피노키오의 꿈>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신에게 피노키오는 무엇을 빌었을까? 나는 무엇을 빌 수 있을까? 내 생각대로 전개되는지 기대하며 읽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의 내용도 형식도 매우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가상의 공간을 설정해서 스토리를 전개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작품의 배경은 주로 기술문명이 발달한 미래의 세계나 사후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그동안 사람들은 기술문명의 발달이 가져다 줄 혜택을 기대하고, 그로 인해서 밝은 미래가 전개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왔다. 기존의 세계와는 달리 행복한 삶만이 존재하는 그러한 공간을 우리는 유토피아라고 명명하고, 기술이 발달할수록 그러한 세상은 가까워질 것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로 ‘없다(ou)’는 의미와 ‘장소(topos)’를 뜻하는 단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합성어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을 뜻한다. 오히려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삶이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디스토피아(Dystopia)의 세계가 펼쳐질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주지하듯이 디스토피아는 이상적인 세계인 유토피아의 반대 개념으로서, 현대의 부정적인 측면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가상사회를 일컫는다. 김동식의 소설은 극도로 발달한 기술문명이 초래할 미래 사회가 결국 디스토피아로 귀결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에 기대고 있다. 실상 기존의 소설 문법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그의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 어쩌면 콩트나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 인터넷 사이트의 게시판에 연재되어 읽었던 이들의 호응을 받으며, 마침내 작품집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고 소개되고 있다. 개별 작품들이 흥미롭다고 여겨지지만,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기술문명에 대한 비관적 인식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러한 비관적 결말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기중심주의가 극단화되어 가는 것에 기초해 있으며, 물질만능과 경제 중심의 사고가 그러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 책의 첫 번째 수록 작품(회색인간)을 읽었을 때는 낯설면서도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해서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스토리의 전개가 예상되고 그 결말 또한 기대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이러한 작품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기존의 사회와 기성세대에게 느끼는 비판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즉 각종 기사나 기성세대의 입에서는 희망적인 미래를 전망하고 있지만, 실재 우리들의 삶에서 그러한 희망을 느끼기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젊은 세대의 심리를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기 때문에, 유토피아를 추구했던 인간들이 결국 디스토피아로 귀결된다는 이 작가의 작품 세계에 빠져든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의 작품에서는 미래의 가상 세계가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그 내용들은 어쩌면 지극히 더 사실적으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차니)
작품 자체보다 작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다. 처음에는 읽기가 힘들었다. 완성된 단편이 아니라 소설 구성 단계에서 아우트라인을 잡아놓은 노트를 읽는 것 같기도 하고, 애니메이션 스토리보드의 거친 메모 부분을 읽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헛된 기대를 버렸다. 그 대신, 반기를 꿈꿨다. (9쪽)'라는 문장을 읽으면 '반기(反旗)'라니? 깃발을 꿈꾼다는 말인가? '반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가족 중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들 앞에 놓인 서류가 그들 가족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에이즈 양성 팡정. (289쪽)' 대목에서는 식인으로 병에 걸린 것이니까 에이즈가 아니라 '쿠루쿠루 병' 아닌가? 하는 식으로 소설의 세세한 부분에서 신경이 긁혔다.
중간 중간 읽다가 책을 덮고 생각했다. 왜 내가 이 소설집에 거부감을 느끼는지를. 아마,,,, 창피한 일이지만 그건 내가 얼치기 먹물로 살아온 세월이 꽤 길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런 소설 쟝르에 대한 독서력이 전무한 것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다. 난 이 소설집에 대해 뭐라고 논할 만한 안목이 전혀 없다. 이 점을 인정하고 이야기 자체에만 집중하기로 생각하고 다시 책을 펼쳐 보니,
각각의 단편들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목에 힘 준 기교 없이 이야기 자체의 힘을 보여준다. 괴이하고 황당한 설정이 많다는 점에서, 이야기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청나라 때 포송령의 <요재지이>가 떠오를 정도다. 아아, 이렇게 멋진 소재들을 단편으로 탕진하다니! 한 편에 살 붙이고 묘사 넣고 시공간 배경 설명 넣으면 너끈히 장편 한 권은 될 수 있는데, 아까워라,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작가는 결말 직전에서 한번, 어떤 작품에서는 두번 뒤집는 반전을 맛보는 재미를 준다. 독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능을 가진 작가다.
꼭 살아남아서,우리들 중 누군가는 꼭 살아남아서 이곳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졌다.
여전히 사람들은 죽어나갔고, 여전히 사람들은 배가 고팠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회색이 아니었다.
아무리 돌가루가 날리고 묻어도, 사람들은 회색이 아니었다.
- 본문 21쪽에서 인용
위의 인용 부분처럼, 암울한 현실을 우의적으로 돌려 표현하는 것 같으면서도 희망의 중요성을 말하는 부분이 많은 것도 흥미롭다. 아무리 돌가루가 날리고 묻어도, 이야기가 있는 한, 이야기의 힘을 믿는 한 사람들은 회색이 아닌 것일까. 그러니 이야기의 힘을 믿고, 이 작가를 믿고, 그의 작품을 앞으로 더 읽고 더 기대해 볼 수밖에.
*** 이하는 작품집과 관련 없는 개인적 생각인데,
이곳에서는 누구도 서로를 돌봐주지 않았다. 부상을 당한 자에게 빵을 나누지 않았다. 쓰러지면 그걸로 끝이었다.
지상에서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든,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든, 소설을 쓰던 사람이든, 이곳에서 예술은 필요가 없었다.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인간들에게 있어 예술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이곳의 회색 인간들에겐 땅을 팔 수 있는 회색 몸뚱이만이 가진 전부였고, 남들도 다 그래야만 했다.
한데, 그 여인은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몸을 가누지 못해 바닥에 주저앉아 굶어 죽어가던 그 여인이, 또다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 본문 15쪽에서 인용
소녀의 노래, 피부 돌기들의 노래는 끝이 날 줄을 모르고 온종일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예정대로 다음 날 대공습은 진행되었다.
다만 한 가지, 대공습의 작전명이 바뀌었을 뿐이다.
작전명 '숭고한 희생'으로,,,
- 본문 224쪽에서 인용
작가가 희망과 인간다움의 상징으로 노래하는 인간을 자주 등장시키는 것이 나는 흥미롭다. 작가는 성수동 공장의 주물 노동자였다고 한다. 옛날 식으로 말하자면 대장장이다. 대장장이가 노래에 대해 쓴다니,,,,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다. 마치 문학의 시원에 대한 이론서 속에서 작가가 걸어나온 것 같다.
알다시피 문학의 기원은 노래다. 고대 서사시에서 나중에 소설이 되는 서사 쟝르가 유래한다. 부족의 서사시는 샤먼이 부르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샤먼은 대장장이였다. 아놔, 도대체 이 인공지능의 시대에 어디서 이런 고대의 대장장이 작가가 나타났는지 소름 끼치게 신기할 지경이다만,,,(쓰다보니 나는 정말 얼치기 먹물같구료) 지금은 그저 그의 대장간에서 끊이지 않고 노래가 울려퍼지기를 기원할 수밖에.
(그리고, 진짜 개인적인 생각인데, 15쪽에 등장한 미친 여자가 부르는 노래 제목은 아마 '펜 파인애플 애플 펜'이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