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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을 수상한 <모멘트 아케이드>가 실려있는 황모과 작가의 첫 소설집, 《밤의 얼굴들》을 읽었다. 우선 아주 재미있었다. 신인 작가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감각이 능숙했다. 개인적으로는 <모멘트 아케이드>보다 다른 작품들에서 오히려 작가의 개성이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연고, 늦게라도 만납시다>와 <니시와세다역 B층>은 과거사 진상 규명을 위한 유족 DNA 데이터베이스 구축 및 신원미상 유골 식별 확인 사업을 소재로 증강현실 속에 섞여든 망자의 혼/기억을 다룬다. 첨단 디지털 기술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아날로그적인 틈새에 도시 전설과 유령 등 오컬트 요소가 섞여 들어간 아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애니메이션 <전뇌 코일>이 생각나기도 했다. 망자의 기억과 기술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김초엽 작가의 <관내 분실>과 함게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당신의 기억은 유령>은 치매 노인의 기억 메모리에 우연히 흘러든 유령, 즉 죽은 이의 기억을 주인공이 발견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사진이나 영상 데이터 속에 미각이나 후각을 느낄 수 있는 트리거를 넣는 '공감각 데이터 임베딩' 프로그래머다. 서브리미널 광고(간접광고)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듯하다. '데이터 임베딩'에 대한 설정이 세세하고 현실적이어서(기업의 이득을 위해 소비자나 피고용자의 안전을 후 순위로 두는 등) 흥미로웠다. 그리고 작품 전반적으로도 공감각적인 표현들이 많이 쓰여서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탱크맨>은 천안문 항쟁에서 탱크를 막아선 남자, 일명 '탱크맨'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다.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두려움을 직시하고도, 용기를 내고 계속 부딪히는 이들을 시사하는 듯하다. 한정된 공간에 갇혀있으면서 홀로그램 투사로 답답함을 해소하는 부분은 블랙미러의 <핫 샷(15 Million Merits)>이 떠오르기도 했다.
<투명 러너>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유쾌한 느낌의 작품이었다. 우선 나 자신도 TV 만화를 열성적으로 보고 자랐기 때문에, 줄줄이 등장하는 수입 일본 애니메이션에 반가움을 느꼈다. 그렇기에 일본 애니메이션이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방영된 시기가 10년쯤 차이나기 때문에 40대와 20대 등장인물이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부분이 정말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투명 러너의 존재는 사실 좀 으스스 한 느낌이 들었는데 (일본 괴담 중 '구석 놀이'가 떠오르기도) 따뜻하고 경쾌하게 마무리되어서 내심 안도했다. '니상'이 주인공의 서툰 일본어 어휘를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먼저 이해하고 맞춰주는 부분에서 나의 일본인 친구들이 떠올라 웃음이 나고 새삼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멘트 아케이드>에 등장하는 '모멘트 아케이드'는 사람들이 '모멘트', 즉 어떤 경험을 했을 당시의 감정을 공유하고 사고파는 플랫폼으로, 블로그 포스팅, SNS, 그리고 유튜브 스트리밍이 더 진화하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고 상당히 개연성 있는 설정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렇게 발달한 가상 세계를 '통해' 우리의 사회에 더 다양한 사람을 포용하고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가의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나는 작가님이 일본에서 오래 사셨다는 얘기를 듣고 더 흥미를 가지던 차였다. 과연 수록된 단편 중 일본을 다룬 작품들(6편 중 3편)은 일본 사회에서 직접 부대끼며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그러나 일본인의 시점으로는 좀처럼 깨닫기 어려웠을, 외부인이어서 되려 발견할 수 있었던 부분들을 예민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작가의 시선은 일본과 일본인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우리가 한국 또는 한국인을 하나로 정의할 수 없듯이, 일본과 일본인도 복합적이고 다양한 면면을 가지고 있다. 관동 대지진 학살, 니시 와세다 역 근처 육군 의과대학 전시 인체실험 등에 그저 '미안하게 됐다'라며 멋쩍게 사과하거나, '유해가 쏟아져' 나왔음을 스스럼없이 '담담하게' 얘기하는 이들. 세계대전에서 '패전'했음에도 꼭 '종전'이라고 말하는 왜곡된 역사관. 반면 위험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을 숨겨주고, 대규모 학살을 시사하는 유해가 진상 규명 없이 소각되는 것을 막은 것도 일본의 보통 사람들과 시민사회다.
또 '친하더라도 깍듯이 유지하는 거리감'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는 예의를 차리지 않고 깊이 파고드는 '오타쿠'들, 일견 선진국처럼 보이지만 계급 이동의 희망은 일찌감치 체념하게 만드는 공고한 계층적 사회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동안 내가 일본 문화를 접하고, 일본 사람들과 지내면서 해온 경험들에 겹쳐져 격하게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았다.
이 책을 읽으며 켄 리우의 《종이동물원》이 많이 생각났다. 일본 제국주의하에서 731부대가 저지른 잔인한 인체실험, 대만의 2.28 사건 등 동아시아의 굵직한 비극들을 거침없이 다루며, 대부분이 눈 돌리고 싶어 하는 진실을 '한 명이라도 많은 이가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 최근 번역 출판된 미야우치 유스케의 《요하네스버그의 천사들》도 떠올랐다. 첨단 기술이 등장하면서도 해묵은 갈등과 역사적인 상처를 반추하는 구성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황모과 작가는 《밤의 얼굴들》 작가의 말에서 켄 리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을 언급하며, 일본과 중국에서 출판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한다. 그리고 이 책 《밤의 얼굴들》 또한 일본이나 중국에서 출판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 책을 통해 한 명이라도 많은 한국의 독자들이 '진실을 기억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비극은 힘없는 이에게 더 자주 일어나고, 그렇기에 더 자주 잊혀진다. 누군가에게 그 일은 남의 일이고, 애써 눈을 돌리거나, <니시와세다역 B층>의 에즈라와 같이 흥미 본위로 소비하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그 일은 바로 자신의 일이다. 많은 일본인이 우리를 도왔듯 그 감수성이 꼭 '우리 민족'이나 '국가'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황모과 작가가 들려줄 이야기가 정말로 기대된다.
덧) 참고로 황모과 라는 이름은 필명으로, '황모과장'으로 불리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당연히 과일인 '모과'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