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읽고 있는 책이 있다면 나는 바로 [어린 왕자]라고 말할 것이다. 여느 그림책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림이 이 책에는 그려져 있었고 나는 그 그림들을 볼 때마다 내가 서 있는 이 땅 말고 다른 땅위에 서 있고 싶어했다. 컬러풀했던 디즈니 그림책의 공간은 내가 흉내낼 수 있었고 비슷하게 색칠도 할 수 있었지만 어린 왕자속 그림들의 가느다랗고 은은한 색감을 파스텔톤으로 정감있게 표현할 길은 없었다. 섬세하고 여리여리하면서 자유로웠던 선의 터치는 뭉퉁한 내 연필심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상 연필심을 짧고 안전하게 깎아주셨다.
어린 왕자속 그림이 글을 쓴 작가가 그렸다는 사실은 아주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했고 불문학도였음에도 생떽쥐뻬리의 글에만 치중했고 그림작가는 따로 있는 줄 알았다. 학교 다니면서 그가 그림까지 그렸다는 걸 알고 참 대단한 사람같아 보였다. 민망함은 뒤로 하고 나는 어린 왕자에 사로잡혀갔다.
10대 또래친구와 수시로 마음을 나눌 때 어린 왕자 그림엽서는 일종의 변함없는 우정과 따사로움과 행복의 상징이었다. 사실 그 그림들이 없었으면 글귀가 좋아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어린 왕자를 10대부터 읽었지만 책 내용이 마냥 쉽다거나 이해가 금방되거나 하지 않았다. 어려운 책이라는 걸 대학때 전공하면서 알았고 그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한 구절 한 구절 나눠서 읽어내었다. 한번 쓰윽 읽고 버려두기엔 글의 무게가 가볍지 않았고 책의 두께는 얇아도 그 글이 남기는 여운은 어린왕자가 사는 행성까지 도달할 수 있다면 그 길이만큼이나 길었다. 이제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의자를 끌어다가 앉아 지구에 사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돌이켜보면 좋겠다. 결코 기억할 수 없는 '나'라는 존재의 시작부터 시작해보자.
"어른들은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그다지 많지 않다."
눈물나는 구절이다.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벌어질 누구에게나 주어진 생애주기의 끝을 생각하니 인간의 비극이 느껴진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내 안의 어린아이는 없다. 나는 내 어린아이를 잘 기억한다. 그 어린아이가 슬퍼할 때, 힘들어할 때를 기억해서 지금 그 아이의 어른이 다독거려준다. 그렇게 조금씩 어른이 되어간다. 아니 되어가려고 한다.
독일에서 생활할 때 독일어버젼으로 어린 왕자를 읽었다. 우리말로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많은데 외국어는 말해 뭐하겠는가. 내가 외국어로 이 책을 읽은 이유는 한글책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이 책의 문장이 영어나 독일어로 쓰였을 때 문장의 난이도가 궁금해서다. 불어버젼도 기초 불어 학습자가 속도를 낼 수 있는 문장이 아니어서 중상위 정도 학습자에게 권하고 싶다. 그래도 어려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우리에겐 우리말로 제대로 번역해 주신 학자들이 많으니 얼마나 좋은가. 김 화영선생님, 황 현산선생님, 그리고 생텍쥐뻬리 120주년 기념 에디션으로 출판된 전 성자선생님의 번역은 내가 나이가 되어서 그런가 조금 슬프게 읽혀졌다. 어린왕자와 노란뱀의 대화, 자기 별로 돌아갈 수 있는 법에 대해서, 스러지는 사하라사막의 모래굴곡과 그 위에 떠있는 작은 별 하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그림, 나중에라도 사막에 가게 되어 그런 풍경을 발견하게 된다면 주변을 둘러보기를, 금발의 작고 기품있는 소년이 걸어온다면 기꺼이 반겨주기를, 함께 있어 주기를.....
가평에 가면 쁘띠 프랑스라는 공간이 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어디 가기도 무서운데 비행기 타고 프랑스까지 가기는 더 힘들 것 같으니 가능하면 시간을 내어 어린 왕자와 생떽쥐뻬리를 보러 가면 좋을 것 같다. 가을 즈음이 좋겠다. 가서 생떽쥐뻬리의 하늘과 우주와 존재에 대한 끊없는 도전을 보면서 하루정도 어린왕자를 쓴 작가의 초기작품과 그 모든 것의 결정체가 바로 어린 왕자라는 작품이었다는 걸 이해했으면 좋겠다. 가능하다면 나는 이제 리용에 가볼 것이다. 유럽 살 때 좀 다닐 걸 후회되는 대목이다. 리용은 파리에서 멀지도 않은데 파리만 좋아하고 거길 못간 것이 안타깝다. 생떽쥐뻬리의 생가가 있는 리용! 2000년도였던가! 마르세이유 바닷가에서 발견된 생떽쥐뻬리의 실종된 비행기까지...이제 어린왕자를 만났을 그를 그리워할 시간만 남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 이벤트를 통해서 받은 책이다. 리뷰어클럽에서는 서평단에 지원한 이들에게 이 책에 대한 기대평을 댓글로 남기기를 요구했고, 나는 이런 댓글을 남겼다.
황현산 선생은 『어린 왕자』를 37종을 구매했다고 하는데,
나는 거기에는 따르지 못하지만 5종정도를
10여 권 이상은 구매한 듯하다.
대학 시절에 처음 만나면서 감동을 받은 뒤에
교단 시절 초기에는 제자들에게 자주 선물한 책이었다.
어린 왕자의 무엇이 그리 좋았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초창기 어린 왕자에는
법정스님이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려있었는데,
그 글에게 매력을 느꼈던 듯하다.
(법정스님의 편지가 실린 책이 문예출판사판이 아니었나 싶다.)
법정 스님이 좋아하는 책이라면
당연히 좋은 책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까?
황현산 선생의 추천사에서
법정 스님의 편지처럼 매력을 느꼈다.
이 책이 보다 많은 독자를 만났으면 좋겠다.
어린 왕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가 보다 순수해질 것 같아서이다.
이 책에 대한 생각은 댓글 그대로이다. 어린 왕자는 나의 학창 시절과 교단 시절의 추억이었다. 그런 향수 때문에 서평단을 신청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막상 책을 받으면서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열 번 이상 읽었고, 교과서에 일부가 실려 있으니 거의 매년 부분적으로 읽었다. 그뿐만 아니라 리뷰도 여러 판본에 걸쳐서 서너 번 쓴 듯하다. 그런 책을 또 읽었다고 한들 무슨 리뷰를 다시 쓸 것인가?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우리 집에 서너 권은 있을 것이다. 또 한 권 보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2015년에 썼던 리뷰의 소제목을 보니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첫째, 예상외로 서평을 쓰기가 힘들었다.
둘째, 뱀과 장미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셋째,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것을 느끼는 책이다.
넷째, 소장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책이다.
2010년에 썼던 리뷰의 소제목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첫째, 읽을수록 새로움이 느껴졌다.
둘째, 예전에 읽었던 책과 다른 용어를 쓴 곳이 몇 곳 있었다.
셋째, 번역이 완벽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2006년에 썼던 리뷰의 소제목은 이런 내용이었다.
첫째, 역시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둘째,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셋째, 지금도 어린 왕자를 만나는 꿈을 꾸고 있다.
그 이전에 썼던 리뷰는 사라진 듯하다. 나의 첫 홈피인 edu홈피에 남겼는데, 회사에서 홈피 제공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지금 읽은 뒤의 느낌은……? 나는 그만 실수를 했다. 예전에 썼던 리뷰를 읽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떠오르는 생각은 예전의 리뷰에 남겼던 글들뿐이다. 그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 한 가지에 대해서 지금의 생각을 보완하겠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15년 전인 2006년에 썼던 글이다. 그때 나는 교단에 있었다. 내가 이 말을 쓴 이유는 나는 감동적으로 읽었는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이 책을 다룰 때면 꼭 읽으라고 강조하고 있다. 내용도 좋지만, 그림이 많고 본문은 적으니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까지 하면서……. 하지만 읽은 학생은 많지 않은 듯하고, 완독한 학생들도 크게 감동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저런 말을 쓴 듯하다.
그렇다면 목연 너는? 이런 질문을 해보았다. 나는 이 책을 대학 1학년 때 만났다. 그때는 리뷰를 쓰지 않았으므로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크게 감동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머리말 형식으로 법정스님이 쓴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좋았다. 그 무렵의 나는 법정스님의 글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만약 이 책을 중학교나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다면 어땠을까? 글쎄……, 그 시절의 내가 크게 감동했을 것 같지는 않다. 신기하다고는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생텍쥐페리는 이 책이 머리말에서 이렇게 적었다.
‘어린 소년이었을 적의 레옹 베르트에게’
그렇다. 작가는 어린이를 위해서 쓴 책이 아니고, 어른을 위해서 쓴 책도 아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어른들을 위해서 쓴 것이다. 그러니 어른이 되지 않은 학생들이 이 책의 참맛을 알 수 있겠는가? 지금에야 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말의 의미를 확실히 깨달았다. 내가 읽을수록 이 책에서 더 큰 매력을 느낀 이유까지도…….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할까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해서 어른들만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추억을 아름답게 느끼는 사람은 대부분 어른들이지만, 그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었으니 아름답게 느끼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린 벗들은 지금 이 책을 읽어서 추억을 만들고, 어른이 된 뒤에 더 큰 감동을 느끼기 바란다. 어른들은 당연히 읽고 아름다움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끝으로 어린 왕자에 대한 개인적인 인연을 덧붙이겠다. 다음은 네이버 지식인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아마도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의 질문인 듯하다. 『어린 왕자』의 줄거리를 10줄 이내로 줄여달라고 했고, 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이 요약해 주었다. 이 글은 조회 수가 15만 명에 육박하고, ‘좋아요’를 누른 사람도 276명, 댓글을 남긴 사람이 77명이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글을 썼지만 10만 명 이상이 내 글을 읽고 수백 명이 공감을 누르며 수십 명이 호응을 보인 글이 얼마나 될까? 어린 왕자는 이래저래 나와 인연이 깊은가 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어린 왕자’는 안다. 심지어 작가의 이름을 제대로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소설 책이라는 것 정도는, 타행성에서 지구로 온 어린 아이가 주인공이라는 것 정도는 알 것이다. 비록 어려운 프랑스 작가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인기와 인지도만큼 많은 출판사에서 여러 판본을 내고, 여러 회사에서 상품으로 만든다. 나 또한 어린 왕자가 무엇인지, 어떤 내용인지 깊이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품이 어린 왕자 캐릭터와 잘 어울리고, 잘 만들어져서 구매한 경우가 많다.
어린 왕자를 분명 읽었다. 워낙 유명하니까,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읽었을 것이다. 얇고 쉬운 내용이니 후루룩 읽었을 게 분명하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건 읽었다는 자각조차 없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읽었는지 기억이 없다. 그래서 이번 문예출판사에서 전성자 선생님이 새로 번역하셔서 예쁜 옷을 입고 나온 책을 봤을 때도, 표지가 신박하군 이라는 생각으로 관심을 가졌다. 서평단을 모으길래 충동적으로 신청했다. 되면 읽고 말면 말고. 신청 한 내 손가락, 크으, 한 건 했네. 안 읽었으면 어쩔 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등장하는 소재나 문장이나 행동이 없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쉽사리 넘길 수 없다. 줄을 안 치기가 힘들고, 메모를 안 하는 곳이 없으며, 눈길이 머물지 않는 문장이 없다. 130페이지 정도 되는, 게다가 작가가 직접 그린 삽화들이 가득해서 단숨에 읽어 버릴 수 있는 (처음에 내가 읽었던 것처럼) 책이다. 하지만 그렇게 읽으면 안 되는 책이다. 인생 책 1순위가 되었다. 이렇게 많은 것이 담겨 있다니. 생텍쥐페리는 천재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정말 어린 왕자를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좋아서 잠자리 독서로 아이에게도 읽어주었다. 힘들 수도 있지만 좋은 책을 접했으면 하는, 어리니까 더더욱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조금 욕심을 부렸다. 5살이지만 글밥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아이라 잠자코 듣고 있었다. 아이에게 읽어주고 있어서인지, 먼저 읽을 때보다 더 훅 들어오는 문장이 있었다.
-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물어보지 않는다.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앤 어떤 놀이를 좋아하니? 나비를 수집하니?”라는 말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21)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이 아이들도 숫자로만 보고 그 잣대로만 판단한다. 나 또한 자각하진 못하지만 아이와 아이 친구들을 숫자로만 보고 있진 않을까? 그러한 질문은 아이의 겉 부분만을 이야기 해줄 뿐이고, 진짜 그 아이가 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아무것도 이야기 해주지 않는다. 책에 나오는 질문을 해줄 수 있을진 모르지만, 적어도 단순히 숫자 개념을 물어보는 질문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다.
어린 왕자가 해가 지는 걸 보고 싶어 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왜 하필이면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할까? 해가 뜨는 장면이 아니라
- “몹시 슬플 때에는 해 지는 풍경을 좋아하게 되지…” “마흔 네 번 본 날, 그럼 너는 몹시 슬펐겠구나?” (31)
슬프면 그는 해 지는 풍경을 좋아하게 된다고 한다. 저 말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마흔 네 번이나 본 날도 있다는 이야기는 더 그렇고. 하지만 다행인 건,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슬픔을 다독일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가지 더 확인해야 할 점은 혼자 자신의 작은 별에 있었던 어린 왕자는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해가 지는 풍경을 보기를 좋아했을 테고. 이런 어린 왕자에게 해가 뜰 때 꽃을 피운 장미는 놀라운 존재다. 읽으면서 막연히 그렇지 않을까 했는데, 옮긴이의 말을 보며 저자의 의도가 그러했다는 걸 알았다.
- 나는 그때 아무것도 이해할 줄 몰랐어. 그 꽃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판단했어야만 했어. 그 꽃은 나에게 향기를 선사했고 내 마음을 환하게 해주었어. 절대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가련하게 술수를 쓰지만 그 뒤에는 애정이 숨어 있다는 걸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그랬어. 꽃들은 그처럼 모순된 존재거든! 하지만 난 너무 어려서 그를 사랑할 줄 몰랐던 거야. (40)
-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꽃을 가진 부자인 줄 알았는데 내가 가진 꽃은 그저 평범한 한 송이 장미꽃일 뿐이었어. 그것하고 겨우 내 무릎까지밖에 안 오는 화산 세 개로는 뭐 대단한 왕자도 못 되겠구나. 그 중 하나는 영영 불이 꺼져버렸는지도 모르고… (84)
혼자 쓸쓸히 지내던 어린 왕자에게 햇빛 찬란한 꽃이 되어준 것이 바로 장미다. 장미가 있어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신경 쓰는 게 뭔지 알게 되고, 이해해야 할 사항이 생긴다. 외롭지 않게 함께 한다는 건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단순히 어린 왕자가 기른(?) 꽃이라는 개념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서투르고 미숙할 수 밖에 없다.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장미가 어떤 의미인지 깨닫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모른 채 서운한 마음만 키우게 된다. 서로가 서로이기에 귀하다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처음은 다 그렇지 않을까? 어린 왕자에게도 그러했다. 떠나서도 당장은 알지 못했고, 많은 경험과 여러 현자(?)들을 만나 깨달음을 얻으면서 상대방이 소중했고, 귀한 존재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옮긴이는 어린 왕자의 여행을 구도의 의미로 이야기 한다.
- 장미는 아침 해와 같은 시각에 피어났음을 자랑한다. 장미는 태양을 품은 존재인 것이다. 태양은 생명의 원천이다. 장미는 어린 왕자의 삶을 외로움에서 구원해주는 존재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어린 왕자의 생명이다. / 그러나 그는 장미를 이해하는 데 서툴러 불행해졌고, 그래서 다른 별들로 떠난다.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 여행, 떠남, 그것은 구도의 의미를 지닌다. 여행의 종착지인 지구에서 그는 여우를 만난다. 지혜를 상징하는 여우는 남과 친구가 되는 법, ‘길들이는’ 법을 가르쳐준다. (옮긴이의 말, 129)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라는 말이 좋다. 어린 왕자의 작은 행성은 물리적인 행성이 아니라 어쩌면 경험치가 낮아서 사고와 마음의 범위가 좁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영역에서만 지낸다면 더 자랄 수 없음은 당연하다. 문득 어린 왕자는 왜 떠나고 싶었던 걸까? 그저 장미와 함께 있는 것을 못 견뎌서? 아니면 장미를 벗어나서 다른 세상이 궁금해서? 밖으로 나가야만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알았던 거까? 어쨌든 그런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 덕분에 그는 귀한 마음을 얻게 되었으리라. 출가의 개념이다. 물론 애초에 순수했던 그였기에 더 깊은 의미를 알 수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중략) 너의 장미 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꽃을 위해 쓴 시간 때문이란다. (중략) 네가 길들인 것에 너는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지. 너는 네 장미꽃에 책임이 있어. (94)
나에게 이렇게 귀한 것이 있었던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벅차게 하고, 웃음이 절로 나게 하는, 그 대상의 사소한 것들로 울고 웃게 하는 그런 대상이 있을까? 연애의 불타는 사랑의 그런 느낌이 아니라, 절절히 내 모든 걸 온전히 던져야 하는 그런 대상이 있었던 적이 있는가
- “이 세상 아무 데도 없고 오직 나의 별에만 있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가 알고 있는 그 한송이 꽃, 그것을 어린 양이 어느 날 아침 무심코 먹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거지? (중략) 수백만 개의 별들 속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어. 속으로 ‘내 꽃이 저기 어딘가에 있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거든. 하지만 양이 그 꽃을 먹어버린다면 그에게는 갑자기 모든 별들이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도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거지?” (35)
그걸 알게 하려고 아이를 낳았나 보다. 단연코 나는 아이를 낳기 전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전혀 없다. 저자가 그리는 개념은 단순히 남녀 사이의 애틋한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다. 소위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의, 정말 이것에 미쳤다 싶은 대상을 이야기 한다. 대상의 사소한 변화로 내가 울고 웃게 되는 경우는 없었다. 쿨한(?) 척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대했지만 그건 그만큼 마음이 없었다는 의미다. 아이가 웃을 때 내 온 마음이 함께 웃고 아이가 짜증낼 때 내 온 마음이 속상하고, 아이가 울 때는 내 온 마음이 함께 운다. 아이가 사라지면 온 세상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런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해주기 위해 이 아이가 나에게 왔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라니, 벅차고 감사한 일이다.
이 책에서 전하고 싶은 가장 큰 이야기는 아마 중요한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 사막에서 조난을 당했다는 것은 그가 정신적 파국 상태에 있음을 상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옛 사막의 수도사들에게 그랬듯이 불모의 사막은 메마름, 침묵, 고독 속에서 고행을 통해 구원을 이끌 수도 있는 장소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알약으로 해소해버리려는 갈증을 극대화시키는 장소다. 갈증이 있어야 구원도 있는 법이다. (중략) 그 가능성을 부인하는 화자는 오랜 시간 ‘꿈결처럼’ 별빛 밑을 걸은 후 우물을 발견한다. ‘동틀 무렵에’. 상징성 깊은 이 장면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는 이야기의 대단원이다. 그 우물은 있을 수 없는 곳에, 있을 수 없는 형태로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이야기 자체가 강조하는 이 비현실성은 강한 상징성을 부각시키며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선사한다. (옮긴이의 말, 132)
- ‘마음으로 보라’는 이 작품의 궁극적인 메시지, 그것은 물질의 소유가 삶을 지배하고, ‘주정뱅이의 술’처럼 ‘마음’을 망각하게 하는 온갖 장치들이 넘쳐나는 시대를 사는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 새겨두어야 할 메시지가 아닐까. 어느 날, 세상의 ‘아름다움’과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을 터이므로. (옮긴이의 말, 138)
주인공은 일주일 치 물을 다 마시고 어린 왕자와 물을 찾으러 걷는다. 그리고 아름다운 광경을 지나 정말 기적처럼 우물을 발견하고, 어린 왕자와 함께 퍼 올린 물을 마신다. 그리고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사막과 같은 메마른 곳에서 가장 귀한 걸 얻었을 게 분명하다. 중요한 건 눈으로 보이지 않는 다는 것. 마음으로 볼 때만, 온 마음으로 느낄 때에만 가장 중요한 걸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과 기쁨이 있다는 걸 믿고 우리의 마음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외에도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지만 앞으로 여러 번 읽으면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 탄생 120주년 기념 에디션
생텍쥐페리의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문예출판사에서 기념 에디션은 제작하였다. 표지 디자인이 정말 아름답다. 표지에 숫자 06/29는 생택쥐페리의 실제 생일이며 6월 29일에 맞춰 기념 발행되었다. 번역은 최초 번역자인 원로 불문학자 전성자 교수님이 하셨다. 생텍쥐페리는 미술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지만 비행사가 되었다. 그의 작품 남방 우편기, 야간 비행, 인간의 대지 등은 비행사였던 작가의 체험에서 나온 작품이다. 마흔넷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그. 정찰 비행을 가다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독일에 의해 격추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짧은 삶을 생각해보면 비행, 사랑, 작품의 세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다.
어린 왕자는 비행기 조종사가 사막에 불시착하여 한 어린아이를 만나 대화 나누는 것으로 시작된다. 비행기 조종사로서의 생텍쥐페리의 삶이 묻어나 있다. 어린 왕자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책을 안 읽어본 사람이라도 어린 왕자는 알고 있다. 판매 부수도 엄청나다. 나는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어린 왕자를 읽었다.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책이었다. 삽화가 독특했고 그냥 단순히 재미있게 읽었다. 그 때는 나도 어린 왕자처럼 어렸으므로. 나이가 들어 다시 만나는 어린 왕자는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다가온다. 어젯밤 어린 왕자를 펼쳤을 때 나도 모르게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유는 글쎄, 어린 왕자에 대한 애틋한 마음, 과거에 두고 온 추억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어린 왕자만 할 때 나이의 나를 과거로부터 꺼내왔다. 나는 여리고 미숙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린 왕자 책을 펴지 않아도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자다! 나는 그것이 모자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과거에서 꺼내온 어린 나는 내게 "바보야! 그것은 모자가 아니라 보아 뱀"이라고 피식 웃는다. 그래, 나는 자꾸 설명을 해주어야 아는 어른이 되었지. 숫자를 좋아하고 어린 날 함께 뛰놀던 친구를 잊었어. 규율을 합리적이라 생각하며 해가 마흔네번이나 지는 것 따위 관심없어. 꽃의 말에 귀기울일 줄 모르며 명령하기를 좋아해.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찬양하며 잊기 위해 술을 마셔. 길들이는 것도 길들여지는 것에도 주춤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아. 나는 많이 달라졌어. 아프리카에서 사막을 여행하다 한 어린아이를 만난다 해도 그가 어린 왕자임을 알아보지 못할 것 같다.
어린 왕자와 장미가 나누는 대화는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장미는 가련한 술수를 써지만 그 뒤에 애정이 있다는 것을 아는 어린 왕자. 바늘처럼 뾰족뾰족한 산 위에 올라가 메아리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여우를 만나 서로에게 필요한 길들여진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것. 언제부턴가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믿지 않는다. 어린 왕자와 여우, 어린왕자와 장미가 나눈 대화에서 본질을 꿰뚫어 보는 법을 배웠다. 별들이 아름다운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꽃 한 송이 때문이고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를 통해 잊고 있던 추억을 돌아보았다. 과거의 나를 만남과 동시에 두근거리는 미래를 희망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10년쯤 지나 다시 어린 왕자를 꺼내본다면 그때 우리는 또 어떤 모습일까?
이 글은 책과콩나무카페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고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