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난 ‘알베르 카뮈’는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실존주의 철학자로 꼽힌다. 생전의 카뮈는 스스로를 실존주의자가 아니라 부조리 철학자라고 지칭했다고 하는데, 그의 작품 중 「최초의 인간」과 『페스트(2012.08.10. 문예출판사)』만 읽은 터라 실존주의를 거부하고 부조리를 강조한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페스트』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소설이며 이는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실존의 문제와 다르지 않기에 현재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카뮈가 포함된 것이라 이해했다.
이미 언급했지만 카뮈의 작품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개념 ‘부조리’는 이성과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합리와 불합리, 긍정과 부정 등 모순되는 두 대립항의 공존상태를 ‘부조리’한 상태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런 상태는 숙명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이유가 없다. 즉, 처음부터 답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설 『페스트』는 ‘오랑’시에 왜 페스트가 창궐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태, 페스트가 누구의 책임인지 밝힐 수 없는 상태를 ‘부조리’한 상태라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페스트』를 읽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의사 베르나르 리외가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처음 한 마리에 불과했던 죽은 쥐는 며칠 뒤 떼를 지어 거리로 나와 죽기 시작했으며 도시 전체가 죽은 쥐로 뒤덮일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곧 아파서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환자 대부분이 사망한다.
아무래도 페스트 같습니다.(p.46)
시민들의 불안은 커져가지만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던 ‘오랑’시 행정 관계자들은 사망자 수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증가하자 결국 페스트 사태를 선포하고 시가를 폐쇄하(p.74)기에 이른다. 시 폐쇄 후 활기를 잃은 ‘오랑’시 시민들은 페스트를 귀양살이, 감금생활, 유배로 받아들인다.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 창궐이란 부조리 상태 안에서 각자의 방식과 개성대로 행동하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페스트를 지켜 본 리외는 부조리한 조건을 피하지 않고 저항하는 인물로 묵묵히 의사로서의 본분을 이행한다. 신문기자 레이몽 랑베르는 우연히 ‘오랑’시에 왔다가 강제로 격리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오랑’시에서의 탈출을 결심한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회개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만이 전염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라고 설교한다. 여행자 타루는 리외를 도와 환자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말하며 보건대를 편성해서 페스트 환자를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페스트가 장기화되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희생되자 홀로 도망치려던 사람도 종교로 페스트와 싸우겠다고 나섰던 사람도 의사 리외를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선다. 그것만이 페스트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스트가 창궐하기 전 자살을 기도했던 연금생활자 코타르는 ‘난 그런 것을 먼저 다 겪었(p.216)’기 때문에 ‘페스트 안에 있는 게 더 좋(p.174)’다고 말하며 ‘오랑’시에서 유일하게 생기 넘치고 만족한 생활을 유지한다.
소설 속에서 카뮈는 여행자 타루의 입을 빌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한다. 마음의 병에 걸려 희망과 사랑 없이 살아간다면 페스트에 지배당한 도시에서 갇힌 채 살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 페스트는 마음을 병들게 하는 의심, 불안으로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다.
다시는 페스트에 전염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꼭 해나가며 살아감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떳떳한 죽음을 바랄 수 있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다(p.275)
페스트가 물러나고 귀양살이가 끝났을 때 환호하는 시민들을 뒤로한 채 혼자가 된 리외는 기쁨 이면에 숨어 있는 위험을 감지한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몇 십 년간 가구나 속옷들 사이에서 잠자고 있을 수가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헌 종이 같은 것들 틈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아마도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교훈을 일러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 가지고 어떤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p.334)
앞으로 카뮈의 부조리 개념이 적극적으로 내포된 작품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 「반항하는 인간」을 읽어볼 계획이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뭐..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잖아요. 제 개인적으로는 한 번쯤은 꼭 읽어야하는 도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번역가가 번역한 여러 작품들이 있는데 이휘영 번역가가 번역한 페스트가 굉장히 가독성 좋게 번역이 잘 되어있어서 읽기 좋은 것 같습니다. 페스트 읽으실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예전 유럽 일대를 휩쓸었던 페스트 이야기거든요. 꼭 읽어보시길 바래요.
작가의 힘으로 읽고 싶지만 포기하고 싶은 저자 알베르 카뮈
그는 철학을 전공하고 그 멋진 외모를 가진 그가 글에서는 왜이리도 냉철하고 고독한지...
그의 작품을 몇권 읽어보지 못하고
그가 내밀어버린 제목에 두번 좌절하고픈 생각이 들지만
이번의 코로나 사태로 읽을 수 밖에 없는 동기 부여를 만는 책이다.
이러한 사태로 2권의 책이 손에 잡혔다. 페스트와 테가메론.
그래서 먼저 페스트를 읽어보기로 한다. 부주리라는 단어로 읽고 싶은 동기를 좌절을 시키지만 그냥 읽어볼수 밖에 없는 현실
실존주의 소설이기에 더욱더 이 소설은 카뮈의 작품중에 유일하게 술술 읽어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기 시작한다.
아니 주제가 생활에 밀착한 상태이라서 그런가...
우리곁에 있는 일반인 평범한 일상에 놓여 있고 늘 정부가 하는 소리에 움직일수 밖에 없는 우리들...
랑베르 기자, 그길고 이 페쇄된 도시에서 늘 정신적으로 흔들림이 없는 의사 리외, 그리고 타루라는 인물이 주축이 이루어져서 불안정한 공포에서 고통을 느끼는 자 그리고 자신의 개인주의 욕망,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여 타인의 불행을 덮고 보는 자..
등의 각자의 현실과 타협이 되지 않고 스스로 인정하고 무관심으로 나를 지키고자 하는 현실이 곧 지옥이다.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는 하는 것은 많은 이들이 외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혼자가 아닌 함께이기에 옳지 않은 것 부끄러운것이라는 것을 이 책에서는 말한다.
혼자 이 오랑이라는 도시를 벗어나고자 하지만
결국에는 그 도시에 남아서 병든자들을 구하기위해 남게 되는 그
의사도 그도 분명이 그 도시를 벗어날수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다
하지만 타도시에 병든 부인이 있지만 그는 의사라는 숙명을 저 버리지 않고 묵묵히 환자들을 돌보면 견디고 있는 그를 보면서 입으로 하나님의 벌이라 칭하면서 외면하는 목사님들을 현실에서도 보면서
이토록 현실적인 소설이 있나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속에서 있는 현상이 그대로 눈에 보이듯 예언하듯이 장면이 현실에서 아비귀환으로 나타나고 전 세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소설은 개인 이 아닌 우리라는 생각을 주고 개인보다는 우리를 함께 묶어서 견디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에 긴 세월동안 흘러서 각자의 독자에 마음을 흔들었다고 본다.
만약 코로나를 겪지 않았다면 페스트라는 절대적인 질병이 그냥 동화속에서 나온는 전염병이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한번 겪어보니 카뮈가 문장문장 하나가 바로 와닿고 영화처럼 보여지는 문장체에 놀라울 수밖에 없다.
어려운 문장체가 아닌 어찌보면 사실적인 문장으로 심장을 후벼파는 문구들이 곧곧에서 보인다.
그는 성자일까? 자문하는 순간
페스트에 휩쓸린 우리 도시에 일반인들에게 공포심을 더 주는 신부님을 한번에 우리 주변의 성직자를 보게 된다.
가장 쉽게 쓰여졌으면서 가장 더 심오한 의미의 상징성이 있다.
현실도피가 아닌 밝은 희망을 추구하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카뮈는 부조리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소설이 주루라고 하지만 이 소설은 결코 그러하지 않은 친절하고 어렵지 않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행간의 상징성에 놀라울수 밖에 없다.
알베르 카뮈의 작품은 학창시절 권장도서라 의무적으로 읽었다. <이방인>과 <페스트>는 내가 선택한 작품이 아니라 학교에서 내준 숙제였기에 지루하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페스트>는 죽은 쥐들의 모습이 가장 떠올랐다. 그 부분을 묘사하는 것이 오래도록 남아있고 다른 것들은 크게 다가오지 않아다.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는 <페스트>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시기적으로 맞물려서인지 이런 상황을 우리들은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 생각해보게 된다.
'오랑'을 알제리 해안에 위치한 프랑스의 평범한 도시라 소개하고 있다. 평범한 이 도시에 모두를 불안에 떨게 하는 일이 벌어진다. 의사 베르나르 르외는 여느 와 같이 퇴근하는 길에 층계참 한복판에서 줄은 쥐를 발견한다. 쥐가 나올 곳이 아니기에 마음에 걸린다. 이것이 오랑시에 벌어진 불행의 시작이었다.
"시민들이 불안해하는 건 사실이죠." - p.57
쥐와 사람들이 죽는 이유가 페스트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랑시는 폐쇄된다. 도시가 폐쇄됨으로써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이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껴지는 시기이다. 사람들은 누군가와의 만남의 시간이 이렇게 소중한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의 우리들은 전화나 SNS를 통해 연락하지만 오랑시의 사람들은 편지조차 주고받을 수 없게 된다.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은 이들에게 고통이었다.
우리에게는 편지를 쓴다는 사소한 기쁨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 p.78
책에서는 폐쇄된 도시에서의 생활을 귀양살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으니 상상을 한다, 직접 기차를 탈 수 없으니 가차 타는 상상을 하고 제비가 나는 모습, 저녁때의 이슬방울 등 일상의 모습을 기억한다. 지금의 우리들도 특별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시간을 기다린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들일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들과 마주하니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게 된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며 피할 수 없다. 페스트가 재앙처럼 다가왔을 때 사람마다 그것을 대하는 반응이 달랐다. 의사 르외, 랑베르 기자, 파늘루 신부, 보건대의 타루, 시청 직원 로랑 등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인간상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모두가 당당하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거나 문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무능력함도 보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두지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것은 방관이 아니라 최선이다.
불안한 상황이니 불안함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확실하지 않은 것에 흔들리고 동조하게 된다. 지금의 가짜 뉴스처럼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사람들은 믿음을 갖고 옳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안한 마음이 앞서 그들은 쥐를 죽인다는 명목 아래 사람들이 사는 집까지 불태우는 일이 생긴다. 흔들리지 않는 이성으로 냉철한 판단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일까.
지금 우리가 놓여있는 현실과 닮은 점이 많은 이야기라 어느 때보다 빠져들어 보게 된다. 영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이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이야기 했던 것처럼 혼자가 아닌 함께 모여 그들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간다.
마지막 문장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갖게 한다. 페스트가 사라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고 한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 않고 우리들 곁에 살아남아 인간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위해 언젠가 다시 찾아올 거라 말한다. 끝이 아니라 다른 문제의 시작을 알리는 경고가 되는 것이다. 이 문장을 보며 불행이 끝난 것이 아니라며 낙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제들을 마주했을 때 무기력하게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전보다는 나은 모습으로 대처할 거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이것이 끝인 것처럼 일상의 소중함을 간과하며 욕심의 시간을 갖는다며 언젠가 다시 찾아올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까뮈의 작품 중에 그나마 이것이 일반 소설에 근접한다고 해서 읽었지만 이야기 뒤에 숨어있는 상징을 찾기는 쉽지 않다. 내게 까뮈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시지프의 신화"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인데 아직도 중심에서는 먼 것 같다. "시지프의 신화"는 일독은 했으나 아직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다. 머리속에서 정제되지 않은채 덩어리로 남아있기 때문이고 그의 다른 작품을 읽고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읽어보고 싶기 때문이다.
중세도 아닌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페스트가 발병하게 되고 출입이 폐쇄된 도시내에서 벌어지는 사건 그리고 그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그려가고 있다. 소재로서의 어느 정도의 몰입을 기대하게 되는데 내게는 더 복잡한 이방인만 못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소설은 한번 펼치면 중단없이 끝까지 보자는 주의인데 중간에 한번 끊고 다시 보다보니 몰입감도 적었나 싶다.
페스트로 인해 폐쇄된 도시는 밀폐된 공간내에서 부조리(이 단어를 쓸때마다 느끼지만 내 머리속 개념은 좀 모호하다. 인간의 이성은 이해를 원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세상, 그 둘간의 부딪힘이 부조리를 낳는 정도로)를 낳게되고 그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물은 의사인 리외보다는 그의 친구인 타루가 아닌가 싶다. 리외는 인간에는 무엇이 되던 어차피 잊혀질 사건이지만 그 사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달하는 전달자로 느껴진다.
까뮈의 소설에서 상징을 찾아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며 재미라고 하는데 말만큼 쉽지는 않은 듯 하다. 아마 그의 소설과 카프카의 소설을 어느 정도 읽고 다시 "시지프의 신화"로 돌아가 퍼즐을 맞추다보면 어렴풋한 전체 윤곽이 나오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만 해본다.
4/8/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