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읽은 후엔 꼭 이 소설을 봐야 한다고 해서 읽은 책입니다. 역시 조언대로 두 소설을 연이어 읽으니 좋더군요. 두 소설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내면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과 죽음으로 끝난다는 건 비슷하지만 이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는 하이드를 초상화에 전가시킨다고 보면 됩니다. 자신이 악을 행할 때마다 초상화가 추하게 늙어가거든요.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 그레이는 미청년이라 불릴 만큼 아름답습니다. (아름답다고 해서 여자인 줄,,, 남자입니다. 영화에선 간혹 여자로 설정하기도 합니다.) 그레이는 자신의 초상화를 선물받는데 너무 아름다운 겁니다. 그 초상화를 보며 자신은 늙어가는데 초상화는 젊은 그대로인 걸 억울해하며 기도합니다. 자기 대신 초상화가 늙어가게 해달라고. 소설이니까 가능하겠지만, 정말 기대도로 초상화가 대신 늙어갑니다. 세상에 이럴수가. 하지만 이 기도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꼴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을 사랑한 여자가 자신 때문에 자살한 후에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 그레이의 초상화는 점점 늙어갑니다. 자신이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초상화는 더욱더 흉하게 늙어가거든요. 그레이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도 초상화가 대신 늙어가니 나중에는 죄책감도 없이 악을 저지르고 다닙니다. 하지만 이 일도 얼마 가지 못합니다. 결국 그레이는 초상화 때문에 이지경이 됐다고 화를 내며 화가를 죽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초상화도 찌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발견한 건 칼에 찔려 숨진 그레이와 경이롭도록 아름다운 초상화였습니다.
마흔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져야 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얼굴에 그대로 담긴다고 합니다. 얼굴에만 담기는 걸까요. 모든 선행과 악행이 어딘가에는 기록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기록들을 모두 지워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얼굴이야 성형수술을 해서 바꿔버린다고 해도요. 가끔은 너무 과하게 손을 대서 흉칙한 모습의 연예인들을 방송으로 보게 됩니다. 자연적으로 일그러지는 표정. 얼마나 자신의 얼굴이 자신 없었으면 저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그레이가 영혼을 팔아서라도 유지하고 싶어 했던 젊음을 그 연예인들도 원한 것일까요? 아니면 악하게 살아서 자신의 나이먹은 얼굴이 자신 없었던 걸까요?
우리 모두는 양심이라는 초상화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악한 일을 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양심이 더러워지도록 놔두기도 합니다. 내 양심이(초상화가) 흉칙하다는 걸 나만 안다고 착각하며 삽니다. 아무도 모를 거라는 착각은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그 양심의 흉측한 모습이 내 얼굴로 나타날 테니까요. 저는 한국나이로 올해 마흔입니다. 이제 저도 제 얼굴에 책임져야 할 나이입니다. 거울을 가만히 쳐다봤습니다. 잘 살아 왔나? 그동안 너무 나쁘게 살지는 않았나? 지금은 제 모습이 선해 보이지 않더라도 10년 후엔 인자한 모습의 얼굴을 가질 수 있게 노력해야 겠습니다.
예술적 기질과는 거리가 먼 문외한이라 그런 부분들을 다루는 이야기들은 어렵게 다가온다. 단순히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들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보는것 자체의 즐거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특별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이 가진 타고난 재주뿐만 아니라 생각조차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가끔은 광기로 다가오기도 한다. 책이나 영화속에서 만나는 광기들은 범접하기 어렵고 가끔은 부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부분들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평범한 우리들은 멋있는 삶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몇번을 읽으려 했지만 매번 기회를 놓쳤다. 제대로 읽은 적은 없지만 내용은 알고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읽지는 않았어도 내용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내용을 알고 있는 책을 읽기는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가독성이 있는 책이 아니기에 더 그런지도 모른다. 어려운 내용이라기보다는 생각을 하며 읽어야 하는 부분들이 많아 그런지도 모른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내면을 온전히 이해할수 없기에 읽기 힘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힘이다.
바질 홀워드가 그린 아름다운 젋은 남자의 전신 초상화를 보고 감탄하는 헨리 경. 최고의 작품이라 칭찬하며 그로스브너에 출품하라고 말한다. 어디에도 출품할수 없다고 말하는 바질이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초상화속 인물이 궁금해진다.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말할수 없다고하지만 그 인물이 누구인지 말하면서 도리언 그레이의 존재를 밝힌다.
"화가가 감정을 품고 그린 초상화는 모두 모델이 아닌 화가 자신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어. 모델은 그저 우연히, 화가가 그린 초상화의 대상이 됐을 뿐이야. 화가가 그림으로 드러낸 인물은 모델이 아니야. 채색된 캔버스 위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오히려 화가 자신이라고. 이 그림을 전시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내 영혼의 비밀을 그림에 드러낸 게 두렵기 때문이네." - 본문 17쪽
유쾌하고 즐겁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쾌락. 의미로만 보아서는 부정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우리의 삶은 어쩌면 유쾌하고 즐겁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만 추구하다보면 본질적인 의미가 사라진다. 사람들이 처음 초상화로 도리어를 만났을때는 아름다운 순수함이 느껴졌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한 인물이 쾌락에 빠지면 어떻게 변해가는지 알수 있다. 아름다움은 누구나 원하는 일이다. 아름답다라는 말을 들어서 싫은 사람이 있을까. 어느 정도는 아름답기위해 노력하는 것이 나쁘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만이 목적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자신이 원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나를 잃어가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나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아름다움은 더 그렇다. 자신을 아름답고 예쁘다라고 평가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할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다. 실제로 성형에 빠지는 사람들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매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도리언에게 남은 것은 추한 자신의 모습뿐이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 원하는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 무엇이며 내면이 아닌 외면으로 판단하는 일이 많아지는 것에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