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정치적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1960년대에 김수영과 이어령은 문학의 정치참여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참여를 주장했던 김수영은 영어의 몸으로 정치참여를 못했으나 이어령은 장관을 지내면서 정치에 참여하였다.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우리 생활에서 정치라는 패러다임이 보여주는 특성이기도 하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대화와 타협, 폭력과 정치적 구호, 선동을 통해서 타인의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렇게함으로써 인간의 삶의 방식은 결정되고, 정치시스템에 의해 사회적 시스템은 결정되어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적극적)행복'이라는 것이 정치적 공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에서도, 144명의 신들이 거북족, 쥐족, 호랑이족, 돌고래족 등의 수호신이 된다. 수호신의 특성과 기질에 따라서 각 종족의 행복과 미래를 결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아무리 경제적, 문화적으로 우월한 종족이더라도 정치가 후진성을 면하지 못한 종족은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보더라도, 조선의 문화적 우수성은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우월성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 영향은 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의 정치공간에도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은 정치적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우리는 어떻게든 정치적 공간에서 일어난 의사결정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 시골의 촌부도 정부의 재정정책의 영향을 받는다. 조지 오웰도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단지 그 영향의 정도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칼 포퍼는 정치적 영향 정도에 따라 사회를 '열린사회'와 '닫힌 사회'로 구분한다. 후자는 구성원들이 半생물학적 유대에 묶여 반유기체적 단위로 존재하는 사회이고, 전자는 개개인이 자기의 사회적 이익을 위해 개인적 투쟁을 할 수 있는 사회이다. 열림과 닫힘이라는 것은 자유와 독재,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의 갈등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 책의 내용도 정치적 공간의 문제를 동물들을 등장시켜서 원초적 수준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소련의 볼셰비키혁명을 다룬 우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일응 이런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돼지, 나폴레옹, 스노볼 등을 1917년 당시 러시아혁명의 주연들과 매치시킨다면, 매우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류역사에서 반란, 혁명의 성공과 몰락은 수없이 있어 왔다. 우리는 지금도 그런 역사를 보고 있다. 이에 이 책을 소련이라는 나라에 한정시켜서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미시적이고 편협하며, 조지오웰을 문학가가 아닌 단순한 정치가에 매몰시켜 이해하는 문학관이라고 생각한다.
2. 정치적 공간으로서의 동물농장
우리는 인간의 비인간적인 행동을 동물에 빗대에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인간의 행동을 동물들의 입을 빌려서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100여년 전에 안국선은 '금수회의록'에서 까마귀, 개구리, 여우, 벌, 게, 파리, 호랑이, 원앙 등 8마리의 동물이 등장하여 인간에게 일성한다. 동물들이 인간의 행태를 비판하기만 한다. 이 책 '동물농장'에서 동물들은 자신들의 불행은 인간의 폭정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인간을 비판하는 수중네 머무르지 않고 직접 행동에 나가서 인간들과 맞서 싸우면서 자신들의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선다. 그들은 인간만 없으면 세상은 자기들에게 관대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도 원래 목적은 온 데 간 데 없고 인간들처럼 무형의 계급을 만들고 불평등과 폭정과 학대는 반복된다.
정치적 공간은 생존과 자유와 권리를 위한 투쟁의 공간이다. 인간 존슨이 주인인 매너 농장에서 수퇘지 메이저 영감은 열두 살, 블루벨, 제시, 핀처 개 세 마리, 어미말 클로버와 거대한 복서는 쌍두마차를 끈다. 흰 암말 몰리, 염소 뮤리엘, 당나귀 벤저민, 암탉, 오리, 고양이 등이 모여서 얘기를 한다. 그들은 겨우 입에 풀칠한 만큼만 받아 먹고 마지막 힘이 다할 때가지 일하도록 강요된다. 그들에게는 여가와 자유가 없다. 그들의 행복에 인간만이 유일한 적이다. 인간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고 비참한 상태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혁명 노래 '영국의 짐승들'을 만들어 전파시키고 혁명을 일으킨다. 쿠테타에 성공한 그들은 농장의 이름을 '동물농장'이라고 명명한다. 수퇘지인 스노볼과 나폴레옹이 리더역할을 발휘한다.
3. 닫힌사회로서의 동물농장
닫힌 사회는 외부 세계와 단절되었고 각 구성원들 사이에는 상호협력보다는 감시체계가 형성된 사회이다. 동물농장 주변에는 인간이 운영하는 농장이 있지만, 그들은 인간을 적대시하기 때문에 인간들과 소통하지 않는다.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는 모두 돼지 스퀼러에 통해서만 획득된다. 농장내부에서도 그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은 통제받는다. 농장에서는 원래 동물이 주인이 되는 공간이었지만, 호랑이 없는 세상에서 여우가 왕이라는 옛말처럼 인간이 없는 농장에서 한 마리의 수퇘지가 주인 노릇을 한다. 현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동료들이 충격적인 범죄를 자백한 후에 갈기갈기 찢겨 죽임을 당하는 시절을 만나게 된 것이다. 오직 '동물주의'의 원리를 요약한 '7계명'이 그들이 지켜야 할 불변의 규율이 된다. 이 처럼 닫힌 사회는 사회의 법률과 관습을 계절의 순환이나 자연의 규칙성과 같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이다. 국가가 크든 작든 시민생활의 전체를 규제하려고 한다. 그들은 타르칠을 한 벽에 씌어진 흰 글씨를 법으로, 종교로 삼는다. 법을 종교로 삼는 것은 하나의 공허한 요술로 끝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자연법과 인권에 위반되는 계명은 자신들을 옥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동물들은 인간 존스의 시절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풍차를 건설해서 동물들에게 좀 더 편한 농장건설을 계획했던 스노볼은 그것을 반대하는 나폴레옹에 의해 추방당한다. 나폴레옹에게 반감을 지닌 동물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차례로 처형당한다. 나폴레옹은 스노볼의 계획을 마치 자기가 계획했던 것처럼 주장하면서, 풍차를 건설해 나간다. 도중에 바람에 의해 풍차가 무너지지만, 나폴레옹은 그것을 스노볼의 짓이라고 꾸며내고, 다시 건설할 것을 독려한다. 동물들은 그들의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 힘든 노동에도 계속한다. 옆 종장의 프레드릭과의 '풍차전투'로 다시 풍차는 폭파되지만, 결국 그들은 풍차를 완성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철칙이었던 7계명은 온데간데없고, 독재자 나폴레옹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동물들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사회가 부족주의의 영웅적 시대로 돌아가고자 하면 할수록 종교재판, 비밀경찰, 낭만화된 깡패행위에로 가는 것이 더욱 확실해진다. 외부 세력으로부터의 위협을 강조하여 형성되는 집단적 사고는 집단 내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한다. 그들의 모든 정보는 나폴레옹에 의해, 나폴레옹을 위한 것으로 창조되고 변경된다. 진실은 소수들만의 전유물이 되었다.
성실하게 일하는 동물들은 목초지에서 은퇴를 꿈꾸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늙은 말, 복서는 도살되지만 천수를 다했다는 거짓된 말만 전해진다. 풍차가 완성되지만 약속되었던 동물들의 생활향상은 실현되지 않고 존스 시절에 비해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나빠졌다. 그런데도 통계 숫자는 한결같이 모든게 순조롭게 잘 되어 가고 있다는 내용뿐이다. 인간의 착취에서 벗어나 평등한 행복을 꿈꿔던 동물농장은 결국에는 다시 혁명 전의 인간 이름인 '매너 농장'으로 환원되었다. 결국 동물들을 위한 꿈은 한 마리의 수퇘지를 위한 꿈이 되고 말았다. 전체주의에 대한 환상은 압제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노예 신분을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역사는 반복되는가?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이런 견해가 오랫동안 지지를 받아왔다. 조지 오웰은 인간들이 동물들을 부려 먹는 것을 부자들이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은유적 기법을 이용하여, 성공한 혁명도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부패한다는 선택을 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비관적인 관점에서 반복적 역사관인 역사주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주의는 인류역사의 전과정이 냉혹한 역사의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전개되어 간다는 역사의 결정론으로 진화론에 근거를 두고있다. 그러나 칼포퍼는 역사가 어떤 점에서는 종종 반복된다고 할지라도 각각의 경우는 분명히 매우 다른 상황을 내포하며, 그 상황들은 앞으로의 역사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역사의 원형이 반복된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고 한다. 역사주의는 단선적이고 선형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해 있으나, 포퍼는 카오스 이론에 입각하고 있다. 복잡성이론은 butterfly effect이론을 반영하여, 초기 값의 민감성은 전혀 다른 상황으로 역사를 전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점진적 개선을 향하여 역사가 발전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는 발전도 하고 퇴보도 한다고 보는 좀더 적극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문제와 그에 대한 개혁의 대안이 각자 회자되기만 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상황이 성숙이 되어, 일정한 정치적 사건이나 리더의 결단이 융합하여 새로운 변혁이 발생하고 역사의 흐름에 새로운 줄기가 형성된다
'두 발로 걷는 자는 누구나 적이다.'라는 제1계명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나폴레옹은 인간과 화해를 하고 인간들의 생활방식을 추구한다. 혁명 초기에는 인간은 그들의 적이었으나, 혁명정신이 고착화 된 후에는 인간은 더 이상 그이 적이 아니었다. 인간이 하던 짓이 단지 돼지라는 동물이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7계명은 차례로 변질되거나 없어지면서 단 하나의 계명만이 존재하게 된다. 벤저민 영감의 말에 의하면, 농장의 사정은 옛날보다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좋아질수도 나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며, 배고픔과 고난과 실망은 삶의 불변의 법칙이라고 한다. 저자는 다른 농장주들과 두 다리로 서서 건배를 주고 받는 돼지들의 모습에서 이제 누가 인간이고, 누가 돼지인가를 분간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동물농장은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변화의 결과는 대다수 동물들이 원하던 이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더니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동물들은 또 다른 혁명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도 그들은 완전히 절망적으로만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물들은 희망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물농장의 일원이라는 영예와 특권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어떤 형태의 독재가 지속되더라도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어떤 바람이 불어도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참다운 행복을 추구한다. 그들의 역사가 변하기에는 상황의 성숙이나 어떤 정치적 계기, 민주적 리더, 그 어떤 것들이 형성되지 않았다. 그들은 좀더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위 삼박자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이런 民草들의 모습을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고 노래하며 침을 뱉었다.
4. 동물농장은 영원할 것인가?
동물농장은 대다수의 동물들에게 많은 희망을 주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희망을 저버린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부여한 것도 아니다. 그는 '권력은 부패한다'는 고전적 원칙에 충실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지는 않는다는 증거이다. 닫힌 사회의 역사발전 법칙과 인간의 이성에 의해 언젠가는 열린사회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확실히 알지도 못하는 어떤 필연 법칙에 인간을 가두어 놓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형해화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경험적으로는 그의 인생과정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청, 장년기 동안에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는 미안마에서 제국주의의 횡포, 스페인 내란, 1,2차 세계대전, 동서의 냉전시대를 보면서 일생을 마쳤다. 그가 현실의 정치에 침묵하지 않는 이상, 현실은 매우 비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의 생활환경에서 비롯된 패배주의적 역사관은 성급하게 쉽게 인간의 역사를 포기하고 인간의 역사를 예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체주의는 불가피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상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플라톤의 사상에 충실한 측면이 있다. 플라톤은 모든 변화는 완전한 형상, 즉 이데아로부터 멀어져 가는 퇴화과정, 파멸에로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가 좀더 과학적인 예측능력이 있었다면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눈감는 동물농장은 오래하지 못한다는 역사의식을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 오웰이 지금도 살아있다면?
인류는 경험이 많다고 보기 어렵다. 인간 전체의 몇 천년의 역사는 짧지 않더고 볼 수 있지만, 한 개인이 경험하는 역사는 매우 짧은 것이다. 한 평생동안의 착각은 인류 역사의 과오를 인지하고 실천하기에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인간은 아직도 시행착오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자신들의 오류를 수정해 가고 있다고 본다. 이 세상이 순간의 영감에 의해서 완전한 세상이 실현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경험과 학습,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운다. 미세조정(fine tuning)을 통해서 과거의 오류는 제거될 수 있다. 그 배움의 결과는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를 위한 것이다.
우리의 문명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인 인간다움과 평등과 자유를 겨냥하는 문명이라고 볼 수 있다. 설령 이런 경향에서의 일시적인 이탈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성에 바탕을 둔 인간은 부정적 엔트로피, 환경과의 체계적인 상호과정을 거쳐서 정상적인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다만 그 원상회복의 속도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지각능력과 행동능력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결국 인간 문명은 앞으로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다. 얼마전에 타계한 어느 대통령의 말에 의하면, 깨어 있는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성장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역사적 관점으로 본다면, 그는 '동물농장'의 역사를 완성하지 못하고 결말을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웰이 지금도 살아있다면, 그는 분명히 개정판이나 동물농장2를 출판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좀더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거나 지금까지 살아서 고르바쵸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에 의한 소련의 붕괴와 그에 따른 독일의 통일을 보았다면, '동물 농장'의 얘기를 좀더 길게 써서 낙관적인 결말을 냈을지도 모른다. 그가 너무나 일찍 '동물농장'의 마침표를 찍었다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