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에 2권까지 이어지는 장편을 읽었다. 1~2권을 합치면 800쪽 가까이 되는 대작인데, 최근 5년 동안 이렇게 긴 장편소설을 읽은 적이 많지 않다.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의 대하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로서는 의미 있는 책읽기였던 『부활』에서 느낀 점을 몇 가지만 적어 보겠다.
첫째, 부담스러운 독서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최근 몇 년 동안에 2권 이상이 되는 장편을 읽은 것은 서너 권뿐이다. 그나마 흥미 위주의 대중소설이었으므로 이 작품처럼 중압감을 느낀 책은 없었다.
이 작품은 등장인물만 해도 수십 명이다. 물론 작품의 뼈대는 네흘류도프 공작과 카튜샤의 사랑이지만 작가는 두 주인공의 주변 인물은 물론 카추샤가 감옥에서 만나는 죄수와 교도관 등에 대해서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만으로도 소설 한 편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캐릭터가 10여 명이 넘는다. 그런 작품을 시간에 쫓기다 보니 며칠 만에 완독을 한 것이다.
읽을 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지만, 책장을 덮으니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연하지 않는가? 이런 책은 최소한 세 번 정도는 읽어야 한다. 그러나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음을 느끼고 있었기에 읽으면서도 부담이 되었다.
둘째, 1권의 리뷰에서도 적었지만 빛바랜 앨범에서 흑백 사진을 보는 듯하다. 어린 시절 정겨운 추억을 나눴던 이웃의 어른이나 옛 친구들의 사진을 보면 정겹기는 하지만 이제는 만나기도 힘들고, 만난다고 해도 친밀했던 그 어른이나 친구가 아닐 것이다. 세상이 변했고,나와 그들도 변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익숙하게 들었던 세계명작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유명한 작가가 톨스토이이고, 작품이 『부활』이다. 그러나 지금 읽으니 무언가 거리감이 느껴진다. 춘향이나 클레오파트라가 뛰어난 미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그런 여인들이 살아서 온다고 해도 과연 우리와 맞을 수 있겠는가? 혹시 그녀들이 내게 오는 행운이 있다고 해도 나는 그녀들보다는 세련된 현대의 어떤 여성에게 갈 듯하다.
『부활』과 작품을 통해 친숙했던 네흘류도프 공작과 카츄사 등은 내게 있어서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는 흘러간 추억속의 여성인 듯해서 슬펐다.
셋째,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고 싶다. 명작은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 일주일 휴가를 맡게 되면 다시 『부활』의 세계를 더듬으면서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을 생각해 보고 싶다.
끝으로 아쉬운 점을 한 가지 지적한다면 소설 전편에 걸쳐서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구교인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신교인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책속의 배경이 되는 종교는 가톨릭처럼 구교 계통인 러시아정교이다. 그렇다면 신을 부르는 호칭은‘하느님’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