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친숙한 헤르만 헤세의 소설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것은 <데미안>일 것이다. 하지만 보다 친숙한 작품을 꼽으라면 <수레바퀴 아래서>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그의 소설이 유독 '청소년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고, 이 책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가 딱 그 시기의 꿈 많은 소년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데미안>속 주인공 '싱클레어'도 소년의 모습을 엿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는 유년기를 거쳐 성인으로까지 성장하고 말지만, '기벤라트'는 안타깝게도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넘지 못하고 꿈이 좌절되는 경험이 적나라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방황하는 청소년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된 까닭은 작가인 '헤세'가 그런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이 바라는대로 '자신의 꿈'을 접고 맹목적인 엘리트 코스(출세길)를 따라가다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자살'을 시도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작가로 크게 성공한 뒤에 '자전적인 소설'인 <수레바퀴 아래서>를 집필했고, 이 책을 통해서 어린 시절에 겪었던 아픔을 정화시킬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접한 수많은 청소년들도 은연중에 '공감'을 하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이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자살이 '선진국 중, 1위'라는 비극적인 현실속에서 이 책은 분명 달리 읽혀야 마땅하다고 보여진다.
책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시골마을에 살던 한스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러자 마을의 어른들은 한스를 자랑거리로 삼았고, 그가 '엘리트 코스(졸업 후, 교회 목사가 될 수 있는 명문학교에 진학)'를 밟아 훌륭한 어른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당연히 한스의 아버지도 한스가 몰락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이미 정해진 출세길을 따라 얌전히 순응하기만 하면 큰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할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대와 믿음이 어린 한스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분명 '목사'가 되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삶을 보장받을 것이며,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멋진 삶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세상에 대해 이제 겨우 눈을 뜬 어린 학생으로서 진정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옳은 길'인지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한걸음씩 걷다 보면 답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하라는 공부'만 묵묵히 할 뿐이다. 정작 한스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낚시를 하고 또래 친구들과 수영을 하며 어울리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성적이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공부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일과의 거의 대부분을 '공부'에만 쏟는 생활에 지쳐가는 평범한 청소년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여유를 즐기지 못하고 긴장된 하루하루를 보내다 입학하게된 '신학교에서 지내는 삶'은 엄격함, 그 자체였다. 그래서 한스는 자주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스는 '헤르만 하일러'라는 친구와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갑갑하고 답답한 신학교에서 보내는 나날들 가운데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던 소중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일러는 좀 색다른 친구였다. 물론 어려운 입학시험을 치루고 들어올 수 있는 명문학교였기에 하일러도 수재임에 틀림없었지만, 하일러는 억압적이고 복종만을 강요하는 학교의 규율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시인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하일러의 성적은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학교측에서는 하일러를 '문제학생'으로 낙인 찍고 아무도 그와 어울리지 못하게 조치를 취한다. 이는 한스에겐 끔찍한 형벌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문제아'라면서 어울리지 못하게하다니 말이다.
결국, 하일러는 학교의 규칙을 밥 먹듯이 어기다 퇴학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한스는 차마 그러지 못한다. 왜냐면 아버지와 마을 어른들의 기대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스도 결국엔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심신이 지쳐서 더는 학업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스는 퇴학 아닌 퇴학을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만다.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고서 말이다. 이런 취급을 당한 한스의 아버지는 한스를 마을의 공장에 취직 시켜버린다. 왜냐면 집안 형편이 별로 좋지 않아서 '밥벌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스는 어렵사리 취직한 공장에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공장일의 노동도 자신이 바라던 일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한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스는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비록 한스 스스로 '자신의 꿈'을 말한 적은 없지만, 그가 공부하면서, 학교에 다니면서, 그리고 아름다운 엠마와 잠시나마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리고 적성에 맞지도 않는 공장엘 다니면서도 한스에게 한줄기 위로를 해준 것은 한적한 시골마을을 품고 있던 자연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한스의 꿈이 무엇인지 무엇인지 물어봐주지 않았기에 한스도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스는 그렇게 아름답게 여기던 자연의 품으로 홀연히 떠나고 만다.
과연 '누가' 한스를 죽음으로 내몰았던걸까? 아니면 한스는 나약한 자의 최후인 '자살'을 하고 만 것일까? 소설에서는 그의 죽음이 '타살'인지 아닌지 젼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스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꿈을 배우는 학교가 아니라 '출세(성공)'를 위해서 맹목적으로 '공부하는 기계'가 되고 마는 신세가 한스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과연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대로 하루종일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왜 학교는 학생들에게 '꿈'을 가르치길 포기하고, 오직 '국영수 만점'만을 강요하는 걸까? 정작 '국영수 만점'을 달성한 뒤의 삶을 가르쳐주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사람은 저마다 '개성'과 '재능'을 타고났다고들 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가 바라는 정답은 '명문고-명문대-대기업-아파트장만-안락한노후' 뿐이다. 그토록 수많은 직업과 다양한 개성이 있는데도, 가장 바람직한 삶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라는 듯이 온국민이 딱 '저것' 한가지만을 바랄 뿐이다. 과연 저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보장'이라도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대한민국 행복지수는 너무나도 형편없다. 그런데도 왜 '저런 틀에 박힌 삶'을 강요하는 걸까?
이제는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정도는 어린이들도 쉽게 알 수 있다. 온가족의 웃음소리가 넘쳐나야 행복하다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외면한 채, 오직 '명문대 입학', '대기업 입사'만이 유일한 행복이라고 외치는 사이, 우리 사회는 어느 새 '웃음꽃'을 잃어버린 슬픈 사회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맞이한 것은 '초고령화 / 저출생 사회'가 아니냔 말이다. 행복한 아이를 낳아 기를 자신을 '잃어버린 세대들'이 아니냔 말이다. 무한 경쟁을 추구하는 이토록 슬픈 비극을 낳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분명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웃음을 되찾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제가 접한 헤르만 헤세 라는 작가는 워낙 유명한 작품
"데미안", "유리알 유희" 가 있지만
아직 저도 읽어보지 못한 작품들이예요.
특히 데미안은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이라 언젠가 한번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어쨌거나 제가 제일 먼저 접한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바로 "수레바퀴 아래서" 라는 작품이 되었네요.
이 작품은 사춘기 시절 쓰라린 체험을 바탕으로 쓴, 가장 헤세의 자전적 경향이
짙게 배어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책이랍니다.
그래서 더더욱 관심있게 보게 되고 작가의 모습까지 상상해가면서 보게 되었고
몰입도 더 잘 되는듯 하더라구요.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젊은 시절 동네에서 똑똑하기로 소문나서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수레바퀴 아래서" 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 처럼 헤세 역시
그랬을 거 같아서 이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왠지 한스가 스쳐지나가는 듯 합니다.
반듯하고 똑부러지게 생기셨네요...^^
(1877~1962)
노년기의 헤르만 헤세의 모습이예요.
꽤 장수하셨네요.
참 작가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구나 싶은게
제가 태어난 1977년보다 불과 15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라는 게 낯설더라구요.
아주 오랜 전에 살다가신 분인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리 먼 시간이 아니었더라구요.
달리 말하면 그렇게 유명하고 훌륭한 작가라는 인식이
오랜 시간이 흐른것도 아닌데 이 정도의 명성인걸 보면
참 좋은 평가를 받으시는 작가분이구나 싶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어떤 책을 읽든지 그 작가의 자전적인 경향이 책 속에 알게 모르게
묻어난다고 하는데 이번 책은 헤세의 가장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말에
꼭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었고 작가의 모습도 많이 궁금해서 찾아 봤었네요.^^
소설 속에서 신학교를 가는 것이 최대 인생 목표인
대부분의 아이들과 그 부모들의 모습도
그 시대와 환경을 반영하는 모습이었고,
우리나라의 대단한 교육열이 과목만 다를 뿐이지
이 곳도 별반 다른게 없어 보여서 서양이지만
오히려 동질감을 많이 느끼게 하는 작품인거 같아요.
게다가 소설을 직접 쓴 헤르만 헤세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더 제대로 알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보니
더더욱 작가에 대한 이해도 더 많이 가능하게 해준거 같구요.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목표 아닌 목표가 은연중에 설정되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했고 나름의 노력도 했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
FM 스타일로 부모님의 기대에도 부응하고자 했던 아이였지만
결국은 내가 정말 좋아하던 일이 아니기에 벽에 부딪히게 되고
학창시절 참 중요한 친구라는 존재로 인해서
외적이 아닌 내적으로 질풍노도의 시기도 거치게 되었어요.
공부만 하던 아이에게 본인과 너무나 달랐던 친구의 모습,
갑자기 새롭게 마음속에 들어온 여자아이,
2등의 성적으로 신학교를 잘 들어갔지만 공부와 멀어지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업신여김을 받던 직종에서 일하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많이 부딪히게 된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
결국은 너무나 순식간에....책 속에서 차지하는 분량도 별로 없어서
읽는 제가 더 당황스러웠을 정도로 바로 강물에 빠져 죽게되는 전개가
더욱더 주인공과 헤르만 헤세에 대한 애처로움을 갖게 했던 것도 같아요.
헤세의 책 속에서 역시 훌륭한 작가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표현들도 어김없이 나타났답니다.
몇 군데 접어서 다시 한번 보고 싶더라구요.
몇 군데 소개하고 서평을 마칠께요.
p.115
교장선생님과 한스 기벤라트의 대화.
히브리어 시험에서 1등이던 한스가 점수도 떨어지고
숙제도 제대로 안해오던 상황에서
두통이 가끔 오는 한스지만 교장선생님은
피곤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피곤하지 않도록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수레바퀴에 깔리고 말 테니까"
이 대사를 읽자마자 뒷통수를 맞은듯한 느낌이었어요.
책 제목과 이 대사의 느낌이 이렇게 들어맞는건가....
그냥 읽으면 별 느낌 없을 "수레바퀴 아래서" 라는 제목이 이렇게 대사를 통해
또 한번 표현되는 걸 보면서 참 어둡고 슬픈 제목이구나 싶더라구요.
p. 137
아버지는 물론이고 교장선생님, 학교의 몇몇 교사들까지
모두 한스에게 기대하던 상황에서
공부를 등한시하면서 심각한 수준이라 느끼고 한스에게 푸시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런 글이 나오는데요. 한스, 또는 헤세가 하는 말 같고 거기에 더욱 더
우리나라의 공부만을 위해 달려가는
학생들이 하는 말 같다는 생각까지도 들었습니다.
"학교와 아버지와 몇몇 교사의 잔인한 명예욕이 숨김 없이 드러낸
상처받기 쉬운 영혼을 가차없이 짓밟아 나약하고 아름다운 소년을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째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위험한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던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렸던가?
왜 라틴어 학교 시절 친구들에게서 떨어뜨려놓았던가?
왜 낚시질이며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금지했던가?
왜 심신을 갈가리 찢어놓을 뿐인 쓸데없는 공명심을 부추겨
공허하고 저속한 이상을 불어넣었던가?
왜 시험이 끝나고 나서도 마땅히 누려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던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노새는 길가에 쓰러져서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훌륭한 인재가 결국 죽고 나서 안타까워 하기만 할뿐,
이런 일이 있기까지 한스를 제대로 관심있게 지켜본 사람이, 심지어 아버지도
이해못하고 어리둥절해 하기만 할뿐이었어요.
마지막까지 안타깝고 우울하게 끝난 이 작품이
바로 서울대학교 선정 동서양 고전 필독서 200선에 꼽혔으며
국립중앙도서관 선정 청소년 권장도서랍니다.
표현이 참 어둡지만 그 사람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해요.
헤르만 헤세의 표현력을 처음으로 느꼈는데
이래서 유명한 작가가 됐구나 싶더라구요.
어쨌거나 책 속의 한스처럼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이 뭔지 모르고
물 흐르듯 그저 따랐던 삶이 아니라
목표의식을 확실히 갖고 공부라는 것도 해야
그나마 이런 불행을 막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제 아이에게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학창시절이 반드시 오겠지요.
한스가 겪었던 이런 방황하는 모습들을 책으로라도 간접적으로
나중에 꼭 만나보게 하고 싶은 책이예요.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지음/송영택 옮김/문예출판사 펴냄/215페이지
고등학생때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문예출판사, 2013)를 다시 읽어 보니 참 새롭습니다. 이 이야기는 희망으로 시작되어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자식을 둔 부모로써 사회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하다가 자살인지 사고사 인지 알 수 없지만 결국 죽음으로 내몰리고 마는 한스 기벤라트의 일생을 읽으며 가슴속 답답함을 벗을길이 없었네요.
이 책은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주인공인 한스와 헤르만 헤세의 일생일 많은 부분 일치합니다. 이 책속에 헤르만 헤세의 인생이 녹아 들어있다는 전제하에 읽으니 주인공의 성장통이 더욱 가슴 절절하게 와 닿습니다.
1900년 무렵 독일 남부 슈바르츠 발트의 한 작은 시골 도시에 한스 기벤라트라는 소년이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와 둘이 살아갑니다. 한스 기벤라트는 풍부한 재능을 타고났고 스스로 공부도 열심히 했기에 그의 아버지는 물론 그 지방 목사나 교사들의 성공의 희망이었죠. 한스 기벤라트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슈투트가르트에서 시행한 주 시험에 2위로 당당히 합격합니다. 그리고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한창 수영과 낚시도 즐기고 친구들과의 우정도 쌓아야 할 시기에 한스 기벤라트는 공부에 열중하며 많은 즐거움을 빼앗기고 수척해지며 때론 두통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입학해서도 최고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신학교 교육체제에 반항감을 가지고 있는 헤르만 하일러와 친밀한 관계가 되면서부터 한스 기벤라트는 열심히 젓던 노를 놔버리는듯 공부를 서서히 포기합니다. 그리고 학업성적이 곤두박질 치면서 신경쇠약증에 걸리고 급기야 퇴학처분이 내려지고 맙니다.
집으로 돌아온 한스는 엠마라는 여인과 덧없는 사랑도 해보지만 결국 그녀의 놀림감이 되고 상처만 받게 되지요. 한스는 아버지의 권유로 기계공장에 취직하게 되고 어느날 근교로 놀로 갔다가 술에 만취해서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알수 없이 강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한스가 살아 있던 어느날 문득 깨닫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해서 하일러와 친구가 되고 하일러가 퇴교하자 그 이후 쭉 자신에겐 친구가 없었음을 깨닫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선 공부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친구와의 우정, 공부외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등도 무척 중요한데 이러한 모든것을 깡끄리 무시당한채 그저 공부만을 위해 내달려온 한스의 생애는 너무 건조하고 황량하기 까지 합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도 좋아하는것은 나중에 해되 되니 지금은 공부만 하라고 종용하는 부모는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는 책이네요. 그리고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결말을 읽으며 헤르만 헤세는 자전적 소설의 결말을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을 맺을 수 밖에 없을 만큼 유년기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것일까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습니다.
수레바퀴아래서...
오랜만에 읽어보는 고전 작품을 통해
힐링되어 보는 하루였습니다.
수레 바퀴 아래서 라는 제목만으로는
이책의 무게와 방향성에 대해 짐작할 수 없는데
읽으면서 왜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제목을 붙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답니다.
한스라는 주인공은 요즘 시대로 말할 것 같으면
공부 벌레 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공부밖에 모르는 한스를 출세시키고자
아버지와 교장선생님, 신부님, 동네 대장장이 들의
노력에 한스의 압박감은 점점 무게를 더해만 가는데요~
한스가 신학교 시험을 보러 가고
그 어렵다는 시험을 보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는 문장문장마다
한스의 두려움과 괴로움 긴장감들이
모조리 느껴져 작품에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답니다.
한스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두려웠을지..
정말 그 깊이감은.... 전 정말 시험에 떨어진 줄만 알았다니까요~
그런데 2등으로 시험에 합격한 한스~
온 동네 사람들에게 아버지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한스~
이 작품이 2차 세계대전후 정신적인 황무지 속에서
독일 젊은이들에게 마음의 양식이 되고자 만들어졌다니...
그오랜시간 우리네 학생들은 이런 입시제도에 시달려야만 한다니~
그 시대에 느꼈던 입시의 압박감이...
현재에도 존재함이 너무 안타깝게 만드는 책이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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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위험한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렸던가? 왜 낚시질이며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금지햇던가? 왜 심신을 갈가리 찢어놓을 뿐인 쓸데없는 공명심을 부추겨 공허하고 저속한 이상을 불어넣었던가? 왜 시험이 끝나고 나서도 마땅히 누려야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던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노새는 길가에 쓰려져서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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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리네 삶을 보는 것 같은 이 말들이
가슴 한편을 마구 헤어파는 것 같았다.
결국 지칠 대로 지친 우리네 청소년들은 그렇게 옥상에서 뛰어내릴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렇듯....한스는 결국 학교에서 버티지 못하고 신경쇠약으로
돌아오고 말게 되는데요...
한스가 겪는 마음의 고통의 과정을
아름다운 문체들로 공감하고 빠져들 수 밖에 없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이랍니다.
고전 문학이 이렇게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들의 세세한 표현솜씨가 너무나 아름답고
섬세하여 그 작품속으로 흡수되어 작품의 감동을 더하기 때문 일 것 입니다.
다시 읽는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문장 한문장을
읽을 때마다 헤르만 헤세의
아름다운 글의 세계로 빠져 들어 환상적인 문장들을
만나볼 수 있었답니다.
아름다운 한스의 청소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책은
옛추억을 되돌이키며
미래를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여 줄 수 있는 책이랍니다.
수레바퀴 아래서...
참된 문학을 재미있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