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의 리뷰를 쓰기 전에 박인희씨의 <목마와 숙녀>를 찾아 듣습니다. 젊었을 적 가을이 되면 음악다방에서 참 많이 듣던 곡입니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등대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가을에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이야기가 안타까워서 였던가? 아니 어쩌면 바람에 쓰러진 술병에 별이 떨어지고 가을바람소리가 쓰러진 술병속에서 목메여 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박인희씨의 노래로 익숙한 버지나아 울프의 <등대로>를 읽게 된 것은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http://blog.yes24.com/document/6425077>에서 자아의 인식과 의식의 흐름을 화두로 삼아 신경학적 논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버지니아 울프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플 때 사람이 어떻게 여러 다른 인물로 쪼개지는가는 신기한 일이다.(조나 레러,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298쪽)”라고 술회할 정도로 자신의 병 덕분에 사람의 마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렇게 인식한 사람 마음의 변덕스러움과 다중성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의식의 흐름의 기법’이라는 문학적 기법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3부로 이루어진 <등대로>에서 작가는 19세기 말 근대사회가 현대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영국을 시대적 배경으로 런던에 사는 램지가 사람들이 스코틀랜드 서쪽에 있는 헤브리스제도의 한 섬에 있는 별장에서 초대한 손님들과 머무는 동안, 등장인물들이 하는 생각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부는 램지씨의 별장에서 건너다보이는 등대를 방문할 계획에 들뜬 자녀들에게 날씨가 악화될 것이므로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램지씨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램지부인의 비중이 가장 많은데 2부에서는 특별한 설명이 없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10년 동안 사회적 변화와 램지가에 일어난 사건 그리고 별장이 변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시 3부에서는 남아 있는 가족들 가운데 별장에 모인 램지씨와 제임스 그리고 캔이 등대를 찾아가고 1부에서 등장했던 화가 릴리가 다시 손님으로 찾아와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쓰고 있는 철학백과사전의 Q항목에 묶여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램지씨와 그런 남편을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과 평소 엄격한 가부장적 태도를 보이는 남편에 대한 증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세심한 배려를 보이는 램지부인의 복잡한 성품이 드러나는 그녀의 생각들이, 마치 등대에서 오는 빛이 집안을 훑고 지나가듯 교차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1부에서 램지부인이 아이들과 함께 등대로 가려는 계획을 들은 램지씨가 날씨 때문에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언하는데 장면과 3부에서 드디어 램지씨와 등대로 가는 배 안에서도 막내아들 제임스가 아버지 램지씨에 대한 살해욕구를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별도 설명은 없었습니다만, 버지이나 울프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시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시사한다 생각합니다만, 결국은 램지씨가 제임스가 등대로 가는 배를 잘 조종하였음을 칭찬하면서 갈등이 해소되고 있는 것을 보면 램지씨의 엄격한 자녀훈육관의 면모로 자녀들이 아버지로부터 인정(認定)받기에 목말라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얼마 전에 읽은 <에고 트릭; http://blog.yes24.com/document/6665347>에서 줄리언 바지니는 자아의 본질을 정리하면서, 자아는 항상 변화하며, 여러 요소들의 묶음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버지니아 울프는 당시에 벌써 우리의 자아가 영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한순간 지속될 뿐이며 ‘파도 위의 구름처럼’ 지나가는 것임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작가에게 ‘등대는 무슨 의미였을까?’를 붙들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읽어갔습니다. 정작 등대에 갈 계획을 세웠던 램지부인은 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고 램지씨와 제임스 그리고 캔이 3부에서 등대에 이르게 되고 이들의 의식 속에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남아있던 의식의 숙제가 풀리 것 같습니다. 이들이 등대로 향하는 동안 역시 자신의 그림에 대하여, “인간이란 기계는 그림을 그리거나 감정을 느끼기엔 정말 비참할 정도로 비효율적인 기계(279쪽)”라고 생각할 정도로 고민을 하던 릴리 역시 마지막 순간에 그림을 완성하면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그녀는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흐릿해 보였다. 마치 두 번째로 그것을 분명히 본 듯 그녀는 거기 중앙에, 갑자기 온 힘을 다해 선을 하나 그었다. 그림이 완성되었다.(302쪽)”
관심을 끄는 책,<음식철학> 발견. 목차를 살피다 버지니아울프의 <등대로>가 보였다.<등대로>를 읽어야 할 이유(?)가 생긴 샘이다.당연히 읽었다고 생각했던 <등대로>는 2013년 읽다 포기했더랬다.지난해 <올렌도>를 재미나게 읽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그런데 다시 읽게 된 <등대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너무 잘 읽혀져서 놀랐다. 잘난척이 아니라...'의식의 흐름'이란 말이 정말 자연스럽게 입밖으로 나오게 된다...^^
등대구경을 가고 싶어하는 아들(이름이 제임스다^^) 에게 엄마는 내일 가자며 약속한다.그러나 합리적(?)이라는 아버지는 오늘의 바람방향을 보았을 때,내일은 절대 등대를 구경하게 될 수 없을거라며 아이에게 헛된 희망을 주는건 좋지 않은 거라며 오히려 램지부인을 다그친다. 아이 눈에비친 그런 아버지는 독재자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뭐 여기까진 그럴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총 3부로 구성된 소설에서 1부는 대략 174쪽 정도의 분량인데.딱 하루의 시간이 그려진다.(정말 제임스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읽을수 있을 것 같은..마치 예행연습을 한 기분이다..) 하루의 시간동안 일어나는 일을 174쪽에 달하게 쓸수 있다니..놀랍고,신기하고..그런데 흥미로웠다. 어디서 끝날지 모르는 단락은 그 자체로 에세이같은 인상을 받게 했다.끊임없이 내일 등대 구경이 가능한지,아닌지를 토론하는 이들 속에서 램지 家에 속한 이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부부의 문제,친구,연인..등등 주로 램지 부인의 시점을 통해 남편을 보고,다시 릴리라는 노처녀 화가의 시점에서 바라본 램지 부인,예술,철학, 삶과 죽음의 문제 등이 상반된 감정으로 계속 이어진다. 속마음과 드러난 행동에서의 차이들의 반복...그리고 시간은 십년을 훌쩍 흘려보내더니..램지부인과 그녀의 딸 프루와 그녀의 아들 앤드루..가 죽었음을 언급한다.그녀가 그렇게 죽을줄 몰랐다는 릴리의 생각은,읽는 독자들도 했을 생각이다. 앞일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하니까..2부는 그렇게 자연과 인간에 대해,전쟁에 대한 언급한다.삶과 죽음의 문제,그리고 3부에서는 거의 폐허가 되어버린 램지 가에 사람들이 찾아와,자신의 과거와 고민 속마음을 털어 놓으며 다시 그날의 시간과 마주하고 극복(?) 하는 이야기다.주로 릴리의 고백이 가장 주를 이루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고민과 램지를 사랑했던 마음,램지부인에 관한 여러 감정들...그 환영에서 벗어나기위한 몸부림..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는.결말.사실 1부가 가장 흥미로웠다.온전히..아니 거의 릴리의 고백이 주를 이룬 3부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도 있었지만,조금은 상투적인 느낌이 보이기도 했고,하룻동안의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웠던 전반부가 너무 강력했던 탓일수도 있겠다.
2019년쯤인가 파리 리뷰에 실린 '등대로'에 대한 기사를 클라우드를 정리하다 다시 읽고 소설을 읽고 싶어져 대여해 보았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13살까지 형제들과 부모와 함께 여름을 보냈다는 세인트이브스, 콘월의 집에 대한 기사였었는데요, 작가가 50대가 되어서도 깊게 기억하고 써 낸 풍광과 추억을 엿볼 수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영미-유럽 소설의 한국어 번역판을 읽을 때 전 의외로 장애물인 것이 반드시 인물 (특히 남녀) 간에 반말과 존댓말이 도입된다는 점입니다. 서로 존대가 아니라 한국, 일본의 경우 한 쪽은 깍듯한 존댓말, 한 쪽은 무게 있는 반말 같은 어투를 쓸 때 그 인물들 간의 관계성도 굉장히 아시아적인 게 되어 버리는 아이러니가 있죠. 이 소설도 (다른 번역들도 다 그러니까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오프닝에서 부부의 대화를 읽으며 원작의 분위기는 깨지는 게 있습니다.
'등대로' 는 버지니아 울프가 40대 초반에 쓴 작품이다. 우리가 읽는 대부분의 소설은 사건 전개를 중심으로 진행이 되는데, 등대로는 1부는 하루저녁 이야기, 2부는 1차세계대전의 시기를 밤으로 묘사하고 , 3부는 1부 저녁이후 10년이 흐른 후의 아침 한나절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을 때는 램지부인이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생각으로 읽어야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며 수댜를 떤다는 생각으로 읽어야 스피드있게 읽을 수 있다.
1부는 현모양처인 램지부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구성이 되는데, 램지부인은 자식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지혜로운 어머니이고, 남편인 램지씨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좋은 아내이다. 집안일에 헌신적이면서도 다른 소외받고 어려운 가정을 챙기고, 또한 우유 공정과정이 깨끗하지 못한 것을 알고 우유를 직접 생산하고자 하는 마음과 가난한 이를 위한 병원을 세우고자 하는 사회개혁가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마음뿐이다.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의 사회활동의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소설속의 인물들처럼 모두 램지부인을 좋아하게 된다. 아들이든 딸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자기에게 헌신적이고 친절한 사람을 우리 모두는 원하기 때문이다. 램지부인은 삶에 긍정적이고 현실을 도피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현명한 부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1부에서는 램지부인 외의 가족과 지인들은 현실에 대한 불만이 내재해 있다. 남편인 램지씨는 20대 초반에 이룬 업적으로 명성을 얻고 살아가나 60대가 된 현실에서는 더이상 발전이 없고 다른 사람의 평판에 신경을 쓰면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면서 아들과 단절의 벽을 쌓게 된다. 아들인 제임스가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등대를 1부에서는 가지 못한다.
10년이 흐른 3부에서는 램지부인은 죽고 없다. 아버지인 램지씨는 가지 못했던 등대를 아들인 제임스와 딸 캠과 함께 가게 된다. 배를 타고 가면서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딸도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며, 램지씨도 아들과 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섬세하고 지적인 면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