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착하게 살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랐지만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착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나는 인간이 착하지 않기 때문에 착하게 살기를 열망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물음은 과거부터 학자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지만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힘든 문제이다. 그래서인지 인간 본성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은 문학에서 항상 심도있게 다루는 주제이다. <마음>은 그런 인간의 본성인 에고이즘(이기주의)에 관한 통찰이 있다.
주인공은 ‘나’와 ‘선생님’인데 주인공 나는 선생님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끌린다. 그것은 인간 대 인간의 끌림인데 나는 선생님의 비사교적인 모습에서 왠지 다른 사람과는 다른 고결하면서도 고매함을 느낀다. 그러나 선생님은 좀처럼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에게 접근하려는 사람에게 본인은 가까이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므로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보내는 무언의 경고였다. 인정에 이끌리지 않던 선생님은 다른 사람을 경멸하기 전에 우선 자신을 경멸했던 것 같다."
선생님의 무관심에도 선생님을 존경하게 되는 ‘나’는 적극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데 점점 선생님은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할 뿐이다.
“나는 훗날 그런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고 싶네. 나는 지금보다 더 지독한 외로움을 참기보다 차라리 외로운 지금의 상태로 버텨가고 싶네. 자유,독립 그리고 나 자신으로 가득 찬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가 이 외로움을 맛봐야겠지.”
선생님과 가까워진 후에도 선생님은 마음을 다 보여주지 않지만 무엇인가 마음속에 커다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느끼고 선생님에게 비밀을 말해달라고 한다.
여기서 주인공 ‘나’는 학생으로서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다. 아무 의심도 없고 더군다나 에고이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순수함은 주인공 나가 선생님의 유서를 받자 아버지의 임종 가운데에도 기차를 타는 모습에서도 증명이 된다.
선생님의 유서는 선생님이 평생 가지고 있던 비밀에 대한 고백이 들어 있다. 여기서 선생님은 자신의 에고이즘으로 인하여 평생을 어둡고 좁은 방에 자신을 가두었다는 고백을 한다. 유복하게 자랐음에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작은 아버지가 재산관리를 해주셨지만 재산 때문에 작은아버지에게 배신당하게 되자 선생님은 인간관계에 대해 불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선생님의 가치관은 이 사건으로 큰 전환점을 맡게 된다. 이후 에고이즘의 결정체인 친구 K를 만남으로 인해 자신과는 정반대인 K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이 결국은 자신의 에고이즘에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작은 아버지에게 배신당했을 때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점을 절실히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건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지. 내 자신에게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나 자신은 멋진 인간이라는 신념이 마음속 어딘가에 있었단 말이지. 그 믿음이 K로 인해 무참히 깨져버리고 나 자신도 작은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 마음은 심하게 흔들리게 됐네. 인간들에게 등을 돌린 나는 결국 나자신도 닫힌 공간에 날 가두게 된 것이지."
결국 친구 K가 자살을 선택하자 ‘선생님’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견뎌내질 못한다. 아내에게는 자상한 남편이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애정차원이 아닌 돌아가신 장모님에 대한 예의와 더불어 더 인도적인 차원이란 것임을 밝히며 지독한 에고이즘이 자신을 누르며 끊임없이 내면의 전쟁을 치르고 있으며 감옥에 더 이상 틀어박혀 있을 수 없게 되었다며 목숨을 끊기로 한다.
이야기는 결론이 나지 않은채로 끝난다. ‘나’는 ‘선생님’의 유서를 읽자마자 기차에 오르고 선생님은 일주일 뒤에 자살할 것을 밝힌 것이 소설의 마지막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마지막은 작가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은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소설이 상반된 인간의 본질인 선과 악 두가지 모두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에고이즘(이기심)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극히 선한 인간의 모습 또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온전한 선을 가진 사람은 없다는 전제하에 주인공인 선생님이 선의 모습 , 즉 밝고 순수하였으나 작은 아버지로부터 인간의 악함을 발견하고 타인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지만 자신만은 선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보다 더 나약하고 에고이즘으로 똘똘 뭉친 K를 구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K가 사랑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스스로 선 자체라 생각하였던 선생님 안에 있던 에고이즘, 악이 표출하게 된 것이다. 결국 K의 죽음앞에서 자신의 에고이즘을 발견하게 된 선생님은 자신을 경멸하기에 이르른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의 마음이 지독한 에고이즘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K를 친구로서 사랑하는 즉 선한 마음으로 인해 괴로운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선과 악의 대립에 대한 갈등을 작가는 선생님의 내면에서 치열하게 갈등하는 모습으로 아주 섬세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아이러니 하지만 선생님은 자신 내면에 존재하는 에고이즘에 괴로워 죽고 싶어하지만 내눈에는 선생님이 너무 선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는 것, 나쓰메 소세키는 <마음>에서 그렇게 인간의 마음은 두가지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나보다. 선과 악 ,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두가지 마음인 것이다. 이야기는 무척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 안에 얽혀있는 마음이란 것은 단순하지 않다. 나쓰메 소세키를 일본의 세익스피어라 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인간의 본성인 에고이즘에 관한 심도깊은 통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작년 초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2016년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 되는 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귀동냥으로 들어온 소세키 문학의 영향력이 새삼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도련님」에서 그치지 말고 다른 작품들도 이어서 읽어보자고 마음먹었는데 이제야 읽게 되었다.
1914년에 발표한 『마음(2002.08.31. 문예출판사)』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 흔들리고 휘청대며 상처받는 모습을 그려낸 소설로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소설의 눈에 띄는 특징은 두 명의 ‘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1부와 2부는 ‘나’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3부는 선생님이 ‘나’가 되어 자신의 삶을 고백한다.
이야기는 바닷가에서 서양 사람과 함께 있는 남자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나’가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그와 안면을 트고 선생님이라 부르며 가까워진 뒤 집까지 찾아가서 친분을 쌓는다. 시간이 지나 친숙해질만한데도 간혹 거리감이 느껴져 서운하기도 했다. 그런데 특별히 반기던 기색이 없던 선생님께서 나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를 찾아와주는 게 기쁩니다.(p.27)라며 속마음을 보여준다.
어느 날 선생님 댁에 방문한 ‘나’는 선생님과 사모님의 다투는 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돌리는데, 묘한 불안감과 함께 선생님은 과연 행복하신 걸까?(p.37)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때부터 선생님께 궁금증이 쌓인다. 특히, 도쿄 제국대학 출신이면서도 일체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집안에만 칩거하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이 세상 밖으로 나가 활동할 자격이 없는 남자라 어쩔 수 없네(p.39)라고 말씀하실 뿐 내막을 알려주지 않는다. 게다가 사랑은 죄악이야. 그리고 신성한 것이고.(p.46), 날 너무 믿지 말게. 곧 후회할 테니까.(p.49)등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툭 던질 뿐이었다.
졸업 논문을 완성한 후 선생님과 함께 산책을 나갔는데 선생님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재산 문제를 정리해 둬야한다며 세상에 나쁜 사람이라고 정해진 인간은 없네. (...) 한순간에 갑자기 나쁜 사람으로 변하니까 무서운 거지.(p.90)라는 뜬금없는 얘기를 한다. ‘나’는 그런 말씀을 하신 뜻이 알고 싶었는데 과거에 다른 사람에게 기만당한 적이 있네. 그것도 피가 섞인 내 친척한테 말이야.(p.97)라는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된다.
결국 ‘나’는 그동안 감히 선생님께 물을 수 없었던 마음속 말을 털어놓는다. 선생님의 사상에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 더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의미파악이 어려워 혼자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더욱이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으니 선생님의 인생 얘기를 해 달라고 부탁한다. 선생님은 사상과 과거는 다르다고 말씀하시며 난색을 표하지만 ‘나’도 과거를 밑거름으로 탄생한 사상(p.99)이라며 물러서지 않자 적당한 시기가 오면 얘기해주겠다는 선생님의 답변으로 일단락된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고향집에 내려온 뒤 소통의 부재를 경험한 ‘나’는 외로웠다.(p.132) 부모님은 대학을 나왔으니 월급을 많이 받는 일자리를 쉽게 구하리라 믿었고, 내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사람 역시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앉아 큰일을 하고 있는 사람(p.135)으로 짐작하셨다. 식구들이 세속적으로 느껴져 불편했던 탓에 선생님이 더 많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해지는 바람에 고향집을 떠나지 못하던 중 선생님으로부터 묵직한 편지가 도착한다. 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해 자세히 편지를 읽지 못하고 훑어만 보던 중 이 편지가 자네에게 도착할 즈음에는 나는 이미 이 세상에는 없을 걸세. 죽어 있겠지.(p.170)라는 구절을 발견하고선 무작정 도쿄 행 기차에 올라탄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독자가 ‘나’의 시선을 따라가며 선생님을 향한 궁금증을 키워가도록 만든다. 그리고 소설 속 ‘내’가 적당한 때에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렸듯이 독자 역시 선생님의 고백을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도착한다. 세속적 기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자세는 선생님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었기에 가르침을 받고 싶은 배움의 욕구만큼이나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커진 상태에서 전해들은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소설은 여기서부터 ‘선생님은 왜 스스로 목숨을 버렸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유서가 되어버린 선생님의 편지에서 우울하고 염세적이었던 성향,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로 결심한 이유를 설명한다. 『마음』의 진면목은 3부(선생님과 유서)에서 드러난다. 잔잔하던 바다가 거친 바람으로 요동을 치다가도 다시 잔잔해지는 것처럼 의심했다가 안도하는 마음, 의중을 떠보고 질투하며 조바심 나서 동요하는 사람의 마음을 눈에 보일 듯, 손에 잡힐 듯 섬세하게 그렸다.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며 남겨준 유산을 작은아버지에게 빼앗긴 뒤 인간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숙집 외동딸과 결혼을 약속한 직후 친구가 자살한다. 친구의 자살을 비겁한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 작은아버지와 다를 게 없는 인간으로 치부하면서 자신을 어두운 그늘에 가두고 결국 잠식되도록 방치한다. 그가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는 윤리적으로 태어난 사람이며 윤리적으로 성장한 사람(p.178)이라고 밝힌 말에서 찾을 수 있을까? 상처 입은 마음을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곪아 터질 때까지 비밀로 간직한 그의 상황이 안타깝지만 세상을 버린 그에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 아니니 작은아버지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말이 그에게 위안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오랜 철학의 화두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람의 근본이 악한지, 선한지 살면서 늘 생각하게 되는 주제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기꺼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사람은 선하게 태어났을까? 아니면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일까?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사람, 양심의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는 사람은 악하게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나는 선한 사람일까, 아니면 악한 사람일까?
오랜 세월 고민했지만 해답을 얻지 못했는데 [마음]을 읽으며 작은 실마리 하나를 찾았다. 선한 사람도 한 순간 악한 마음을 먹을 수 있고, 나쁜 사람인 줄 알았지만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울 수도 있다. 결국 인간의 마음에는 두 가지 모습이 모두 있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사람이요, 그 똑같은 마음으로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사람이다.
[마음]의 ‘선생님’은 학자의 풍모가 느껴질 정도로 지적으로 아주 우수한 사람이며, 철학적으로 존경할 만한 식견을 갖고 있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나’의 눈에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이자만 그는 젊었을 때 하숙집 딸을 사랑하여 친구를 질투하고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결혼을 하였다. 친구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올바르지 못한 방법을 사용한 행동은 유산을 노리고 자신을 속였던 작은 아버지와 다름없는 비열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 일로 인해 친구는 자살을 하고 만다. 이렇게만 보면 배운 사람이건 못 배운 사람이건 상관없이 인간이란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친구와 가족을 배신할 수 있는 악한 존재인 것 같다. 사람을 믿었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고, 손해보거나 상처 입지 않으려면 내 것을 꽉 움켜쥐고 조심하며 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그런가. 사람을 믿었다가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일이 다반사일지라도 사람에 대한 희망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에 대해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은 나 또한 사람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었을지 모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혹여 살다 양보하고 싶지 않은 것이 생기면 한 순간 욕망에 굴복하고 나쁜 선택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희망을 놓지 않음은 혹여 잘못된 선택을 할지 모를 나를 위한 바람막일지도 모른다.
그 희망은 바로 ‘양심’이며 ‘인간다움’이다
‘선생님’도 친구의 자살 이후 죄책감에 시달리며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모든 즐거움을 뒤로 하고, 칩거하는 삶을 선택한다. 사회 생활을 할 만한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 생각하고 스스로를 벌주는 세월을 보낸다. ‘선생님’은 극단적으로 행동한 후에 후회하는 삶을 보내지만 보통 사람은 나쁜 행동을 하기 전에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고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에는 이기적 욕심도 있지만 그에 반하는 선한 마음, 양심도 있다. 이렇게 양면성이 있기에 인간이다. 바르지 못한 것도, 옳은 것도 모두 선택할 수 있지만 옳은 것, 선한 것, 바른 것을 선택할 수 있기에 진정 인간다운 것이다. ‘
어둡고 슬픈 이야기인데도 글 전체의 느낌은 사뭇 밝다는 것이 참 읽으면서도 이상했다. 아마 늙은 작가의 인간에 대한 애정이 글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기 때문이지 모르겠다. 양심껏 살고자 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친하게 지내는 사람 때문에 상처 입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마음’을 읽고 정리가 되었다. 나에게 상처 입힌 그 행동도 인간이기에 그러했던 것이고, 나에게 베푼 친절도 인간이기에 그러했던 것이지, 그 사람이 전적으로 나쁜 사람이거나 이중 인격은 아니었던 거다. 사람은 믿을 존재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