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최근 어느 저자의 책을 통해 이 소설을 지은 작가가 젊은 여성인데다 영국의 선구적인 페미니스트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책을 쓴 어머니는 그녀를 낳고 1년도 안 돼 출산후유증으로 죽었고 그녀는 계모의 눈치를 보며 이복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자랐다. 그당시 다른 여성들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당대에 영향력 있는 무정부주의 사상가였던 아버지와 시인이었던 남편 덕분에 그들이 친구들과 나누는 정치, 사회, 과학, 문학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에 참여하고 독서하고 글을 쓰는 지적 토양이 작가를 있게 했다. 어머니가 일찍 죽어 전반적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는데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기구한 처지 속에 작가의 경험이 투영된 듯하다.
성서의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으로 데려가 그곳에 있는 모든 열매를 먹어도 좋으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고 충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결국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권하면서 인류의 조상인 그들은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사실 아담과 이브를 비롯해 뱀과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참된 종교인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신의 뜻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세상 일은 신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들이 이끌어간다는 데 비극성이 있다.
오늘날 괴물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프랑켄슈타인은 사실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만든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성이다. 과학으로 뒷받침된 이성의 힘에 대한 맹신과 인간도 신처럼 될 수 있다는 오만함의 결과가 괴물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자신이 생명체를 탄생케 한 순간 흉측한 얼굴과 거대한 몸뚱이를 보고 혐오를 느낀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괴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만다. 어쩌면 자신이 창조한 괴물이 괴물인지 몰랐다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이야말로 괴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곧 우리의 자화상이다.
"네 결혼 첫날 밤에 나도 함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앎에 대한 욕망에 충실해 괴물을 탄생시킨 프랑켄슈타인은 사랑하는 가족들이 하나둘 목숨을 잃으며 번민에 휩싸인다. 그의 가족과 친구를 죽인 자가 자신이 창조한 괴물이라는 점에서 결국 자기가 죽인 거와 같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그가 받는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찾아온 괴물이 인간들로부터 받은 수모와 외로움을 호소하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짝인 여자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자 한때 마음이 흔들렸던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번식을 우려해 작업을 그만두고 괴물로부터 저주의 말을 듣는다. 결국 결혼 첫날 밤 자신의 아내를 잃고 마침내 그는 괴물을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 북극으로 쫓아간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프랑켄슈타인의 약혼녀를 비롯해 등장하는 여성들은 프랑켄슈타인의 앎에의 욕망에 반비례해 무기력하다는 사실이 두드러진다. 남성성의 원리가 강해질수록 여성성의 원리가 약해지는 자연적 힘의 불균형을 암시하는 듯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힘에 종속되어 사는 한편 그러한 남성성의 일방성을 우려하면서도 아무런 힘이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나약한 여성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성을 비롯해 일방적인 남성성의 추구가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그로 인한 비극과 불안정성은 인류 모두의 것이기에 지금의 페미니즘 운동과도 연계해 시사점을 주는 이야기다. 결국 괴물을 통제하지 못한 채 고뇌에 빠진 프랑켄슈타인의 탄식은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앎에의 욕망에 한계를 그을 수 있는 인간의 지혜는 결국 신의 뜻을 찾아야 얻을 수 있는 일인지 모른다.
"아! 불행한 사람은 그저 체념하면 그만이지만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평화란 없다."
고전문학 다시 읽기를 다짐하고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고전문학 전집을 사는 것이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나만 고전 문학을 읽을게 아니라 아이들도 자라면서 당연히 읽게 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한번 저질러봐? 그 생각이 온 몸에서, 온 머리에서 스멀거리기가 벌써 2주째... 마침 도서관에 갈일이 있어 고민하다가 일단 몇권 빌려서 읽어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도서관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보니.... 전집에 대한 나의 의지가 불타 올랐지만 전집도 참.... 다양하니.. 그 걸 고르는 것도 쉽지 않은일... 일단 글씨모양과 크기를 보고 이 책을 골라왔다.
다양하게 접해보긴 했지만 정작 책으로는 읽지 못했던 이야기.. 그래서 호기심이 동했던 모양이다.
조용하고 화목하고 평온한 중산층 가정에서 마음껏 교육을 받고 자란 청년이 바로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는 고향에서 대학을 다니지 않고 잉골슈타트대학교에서 공부하기로 결정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생명의 비밀에 대한 열정적인 연구 끝에 생명체 하나를 창조해냈다. 그러나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 일까? 그를 둘러싼 가족과 친구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몰려온다. 여러 사람들이 죽게 되자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창조물을 추적해 죽이기로 결심한다.
원래 프랑켄슈타인이 이런 이야기 였던가? 잔혹하고 무서운 괴물이라고만 생각했던 생명체...
그 생명체가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 하는 부분이 있다. 그 내면을 읽어내려가면서 과연 그를 괴물이라 칭할 수 있을까 하는 아픈 마음이 꾸물거린다.
나는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나의 겉모습에 만족하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배우나 텔런트가 아닌 이상 내 모습, 내성격, 내가 가진 사회적 지위들에 100% 만족하면서 지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습으로 살아간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며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 괴물이라고 그런 느낌이 없었을까? 피조물을 만들어 놓고 호의적인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친절을 베풀지 않았고, 동정의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 피조물의 마음을 헤아려준 적 한번 없었다. 그리고 오로지 피조물의 추악하고 흉측한 겉모습만으로 사람들은 도망가고 소리치고 못된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피조물이)가 프랑켄슈타인에게 겉모습은 추악하지 않지만 그 뒷모습이 누구보다 비리고, 더러운 인간의 이면을 말할 때는 과연 누가 더 치사하고 흉측한가 생각하게 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피조물이 인간 사회를 조롱하고 비웃는다. 하지만 그 말에 과연....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 피조물은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의 짝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럼 영원히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떠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내가 기억했던 프랑켄슈타인과 책의 내용은 묘하게 다르다. 아마도 수박 겉 햝기 식으로 괴물에만 촛점을 맞춘 탓일지도 모른다. 과학을 통해 생명를 탄생 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인, 종교적인 생각이나 사상으로 인해 대 놓고 만들지는 못하지만 분명... 인간도 복제하고 만들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하지만 그러기에 앞서 분명 생각하고 고민해봐야할 것은 너무도 많다.
단지 공포 영화의 한 부류 쯤으로 알고 있었던 나의 무지에 창피함을 느낀다.
그 당시 사회적 약자인 여성, 하층 계급, 노동자를 대변하는 괴물의 입을 통해 그 사회를 조롱하고 가치의 허구성에 펀치를 날린다. 하지만 그런 사회적 아픔들이 계속 변하지 않고 지금도 그대로 펼쳐지고 있는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작가인 '메리 셸리'의 극적인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거창하게 이 작품이 과학소설(scientific fiction)의 시초가 되는 소설이라는 말부터 해야 할지,
아니면, 1994년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에 대한 기억부터 나눠야 할지...
엊그제 휘몰아친 폭풍처럼...
오싹하고도 격정적인 감정의 회리바람이
지금도 제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여기서부턴 풀어 쓴 줄거리] -내용 아시는 분은 스킵하셔도 됩니다. ^^
세상의 아름다움을 누릴 줄 알고, 끊임없는 앎을 향한 호기심과 열정을 가진 유능한 청년 프랑켄슈타인.. 그에게는 요나단과 같은 친구 앙리 클레르발와 더없이 아름다운 연인 앨리자베스, 그를 신뢰와 애정으로 다독여주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있습니다.
전도유망한 이 젊은이 프랑켄슈타인에겐 아쉬울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가진 생명에 대한 호기심이 생명을 낳는 능력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을 경험하고는 그 광적인 호기심의 끝을 보고야 맙니다..
자신이 창조했건만, 불완전하고 유한한 그가 낳은 피조물은 자신의 눈으로 보아도 흉악한 괴물에 불과합니다.
괴물의 말대로 신은 자신의 형상을 닯도록 인간을 아름답게 만들었건만,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추악한 모습만을 그에게 담은 듯합니다.
인간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피조물..괴물...
프랑켄슈타인으로부터 자신과 꼭같은 여자 생명체를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거절당한
괴물은 자신의 창조자에 대한 복수를 단행합니다.
그의 사랑하는 형제도, 친구도, 연인도, 아버지도...
프랑켄슈타인은 죄없는 사람들을 죽인 괴물에게 복수하려는 일념 하나로 그를 쫓아갑니다. 얼음이 덮인 북극까지 말이죠...- (줄거리 끝! ^^)
책은 총 3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2권은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이 주고 받는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권과 3권은 프랑켄슈타인이 화자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우리는 담담히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아가서 그들을 판단하려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네요...
단지, 제게 있어선 '너와 나는 허물이 많은 불완전한 존재이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정도입니다.
세상엔 어쩌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큰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구요...
'메리 셸리'라는 사람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처음에는 남자 주인공의 목소리를 내는 듯하더니,
갈수록 프랑켄슈타인의 목소리가 너무나 섬세하고 감성적이기까지 해서,
여자가 하는 이야기처럼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 좋네요...
이미 결혼한 스무살 셸리(바이런 키츠와 더불어 요절한 낭만파 3대시인 중 하나죠..)와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했던 10대 메리 셸리...
그들의 부도덕함에 경종을 울리듯, 임신 중이던 셸리의 아내 해리엇은 투신자살을 합니다..
그 업일까요? 이복자매의 자살을 시작으로 그녀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잃고, 가장 소중했던 남편 셸리도 그녀가 스물 네살이던 해에 익사사고로 숨지고 맙니다...
페미니스트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그녀에 관한 해설도 좋고,
무분별한 과학이 낳을 수 있는 파국에 관해 의미를 찾는 것도 좋지만,
전 그냥..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욱 더 궁금해집니다..
이 책은 납량특집 소설로서도 충분한 시원함을 선사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연구에 대한 기준, 사형제도에 대한 생각, 인간의 불완전성.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칭송, 사회와 격리된 인간이 가지는 고통의 깊이 등등...
재미있습니다.
고전이란 게........ㅎㅎ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이라니...
정말 굉장히 강렬한 캐릭터네요.
여름의 무더위를 싹 가시게 몰입하게 만드는 책이랍니다.
여러분도 이 여름이 가기 전에 한 번 보시는 건 어떨까요?? ^^
(읽을 책 많으신 블로거님들을 도발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꾸벅-_-;;)
프랑켄슈타인은 한 과학자가 창조해 낸 생명체이고 그 모습이 흉칙한 괴물로 알고 있었다.가만히 생각해보면 소설보다는 애니나 동화로 먼저 프량켄슈타인을 만나서였는지 그가 끔찍한 괴물로 느껴지기보다는 개성이 강한 한 캐릭터로 기억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렴풋이 대략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생각에 읽지 않고 있었는데 막상 책으로 접해보니 알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 짧지만 우리의 내면과 모습들을 돌아보게 되는 심오한 이야기임을 알게 되었다.
1818년에 쓰여진 이 이야기.. 그 당시에는 허무맹랑하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공상과학과도 같은 내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인간들은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을 시도하고 있고 그것들의 윤리 문제가 대두되는 것을 보면 현재의 공상은 미래의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최근 다중인격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를 자주 볼 수 있었다. 내 안에는 여러가지의 인격이 공존을 하는데 서로 다른 인격들이 마치 다른 사람인양 나타나는 이야기들.. 물론 극적인 효과를 위해 극단적으로 보이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내 안에 서로 다른 성향들이 공존하면서 어떤 상황이 되면 좀 더 강하게 반응하는 면이 그 사람의 대표적인 성격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 같다.
내 안에 있는 웬지 내가 아닌 듯한 모습을 억누르며 살아가고 그것들이 너무 표출되지 않을 경우 정신적으로 힘들어지게 되므로 적당히 표현하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프랑켄슈타인은 물론 이런 이야기와는 좀 다른 이야기이다. 분노하면 바지가 찢어지고 옷이 벗겨지는 헐크처럼 내 안의 화가 들어나 괴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창조한 창조물이 마치 괴물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 그러나 그 괴물은 처음부터 악한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때문에 더욱 괴물처럼 변해간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에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성향 .. 그것을 표현하는 맥락에서는 어쩌면 비슷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작가는 이 괴물을 소외된 사회계층, 노동자. 여인. 어린이등.. 힘 없는 자들을 대변하는 인물로 묘사했다고 한다.
"인간은 부와 신분이 높은 순수한 혈통 중 하나만 지녀도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어느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랑자와 노예 취급을 받으며, 선택받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낭비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질 거요!" (P322)
빅터는 이런 창조물을 만들어 놓고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모습에 놀라 도망을 쳐 버린다.
이름조차 갖지 못한 이 창조물은 자신이 왜 그런 취급을 받아야하는지 알지 못한다.
점점 살아가는 감각. 그리고 하나 둘씩 익히게 되는 삶의 지혜.. 그리고 사람들의 관계속에서
사랑과 애정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된다.
우연히 찾아들게 된 한 오두막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을 통해 그러한 관계. 사회를 배우고 말하는 법, 읽고 쓰는 법들을 알게 되면서 자신도 그들과 함께 어우러진 삶을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팽배해진다. 그리고 저 정도 인격의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외모때문에 두려워하고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믿음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지고 자신이 태어난 이 세상을 증오하고 자신을 만든 창조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해침으로 그에게 복수를 하게 된다.
빅터는 생명체를 창조하면서 인격까지는 부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화학도구를 사용해 인간의 생체와 겉모습을 창조했을 뿐 ..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만든 창조물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경악하며 회피만 해야했을까..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했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있었을까..자신과 같은 여인을 하나 더 만들어 달라는 그의 간절한 애원을 들어주지만 그것조차도 진정으로 그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쪽 세상에 더 이상의 피해가 가지 않고 그와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은 맘에서 들어주는 빅터..
결국 그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더라고 그의 말대로 자신의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어떤 가능성이 발생해 또 다른 피해를 줄 지 모른다는 생각에 여인을 만드는 것을 포기해 버린다.
이 모든 상황들이 어찌보면 조금은 현실성과는 먼.. 소설적인 요소들일 수 있지만
당시의 시대상과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내용과 함께 생각해본다면 극적단이지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무서운 이야기의 괴담이라기 보다는 사회를 풍자한 고발적인 성향이 강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든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괴물을 만든 이의 이름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이었고 그는 이름조차 갖지 못했다.
어찌보면 그를 흉칙하고 악한 괴물로 만든것은 스스로가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기에 그에게 어떤 공포와 악한 감정을 느끼기 보다는 연민과 아쉬움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모두가 공생하고 어우러질 수 없는 현실.. 그렇기에 쫒고 쫒기고 그러다가 결국 가족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고 괴물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결론은 오히려 현실을 비웃으며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전을 읽으면 글이 쓰여진 시대를 대변하지만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표현하는 방법이나 인물들의 묘사등 디테일한 것은 많이 다르지만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의미는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릇된 욕망, 그리고 편견등..그러한 것들을 생각하며 또 한번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 고전읽기가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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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창조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발행하는 잡지(MIT Technology Reviews)를 보다가 2018년 주목할 만한 10대 기술 목록에 인공배아 기술이 올라 있는 것을 봤습니다. 이 기사는 난자와 정자 없이 줄기세포만을 사용해 쥐 배아를 성장시킨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자들의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궁극적으로 인간 줄기세포를 이용해 인공배아를 만들고 싶어합니다. 이 때 실험실에서 성장하게 될 배아, 즉 생명에 대한 윤리 논쟁은 불가피합니다.
생명 창조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생명공학뿐만 아니라 로봇 및 인공지능 연구로도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 신체를 가지든 가상 공간의 시스템으로 존재하든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창조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자들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은 사고능력을 갖추게 되는 시점이 왔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에서도 윤리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며 연구자 사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인간들은 어느 수준까지 도달하고 싶은 것일까요? 신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생명 혹은 사고하는 존재를 창조하는 데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들은 수많은 공상과학 소설과 영화들을 통해 다양한 상상을 펼쳐오고 있습니다. 한 극단에선 인간이 창조한 대상을 통제하지 못하게 될 때 일어날 일들에 극단적인 두려움을 표현하기도 하고 또 다른 극단에선 인공지능 로봇과의 행복한 공존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메시지를 던지기에 고전이다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미래는 디스토피아로 그려지기도 하고 유토피아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도 현대 생명공학 및 인공지능 기술 분야에서 제기되는 과학기술의 윤리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소설로 시작해 영화, 만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입니다. 이 소설의 작가 메리 셸리는 생명을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나온 지 200년이나 지난 책인데도 최근 현대 과학분야에서 일어나는 윤리 논쟁에 바로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작품입니다. 그렇기에 고전이라 불리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읽는 것이겠지요. 각고의 연구로 여기저기서 부분 부분을 모아 조립한 거대한 신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인조인간을 만든 인물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창조한 메리 셸리는 적정한 선을 넘는 지식과 기술을 추구한 결과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경고합니다.
메리 셸리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를 창조하게 될 때 일어날 수 있는 극단적 상황을 상정했습니다. 그녀는 멈출줄 모르는 창조 열망을 가진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들어낸 피조물을 창조자 자신도 공포를 느낄 정도의 괴물로 그렸습니다. 메리 셸리는 도를 넘는 창조 열망을 괴물같은 존재를 만들 수 있는 위협으로 봤던 것이겠지요. 핵무기와 같은 현대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미친 충격적 경험을 고려한다면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 현대의 과학기술자들은 작품속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을 얻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자신의 자질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위대해지려고 열망하는 것보다 자신의 고향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더 행복한지를 배우기 바란다.”(58쪽)
메리 셸리의 이 소설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많은 장르의 작품들이 만들어져왔기 때문에 소설의 줄거리를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작품속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통해 메리 셸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오늘날 과학기술분야 연구자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은 얼마나 진보했을까?
메리 셸리 시대의 인간과 2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인간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인류는 점점 나아지는 방향으로 발전해 오긴 한걸까요? 작가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한 괴물의 눈을 빌려 인간을 바라봅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을 창조했을 때 이 피조물이 처음부터 괴물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외모만을 보고 괴물이라 두려워하거나 무턱대고 자신을 공격하는 인간들을 만나 고통을 경험하며 괴물이 되어갔습니다.
괴물은 인간들을 피해 달아나다 발견한 오두막에서 한 가족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이들을 관찰하며 인간에 대해 배워갑니다. 그는 이 가족을 관찰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하고 이 가족의 가난과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가족들을 돕기도 합니다. 인간들로부터 이유없는 핍박을 받았지만 이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소통의 희망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수용될 자신을 기대하기도 하지만 인간 세상에 대한 정보들을 알아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토록 강하고 고결하고 훌륭한 인간이 그렇게 사악하고 비열하단 말인가? 인간은 어떤 때는 순전히 악의 근원에서 태어난 자식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고귀하고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이기도 했소. (중략) 오랫동안 나는 한 인간이 어떻게 동족을 죽일 수 있는지, 심지어 법과 정부 따위가 왜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소. 하지만 악과 살육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품었던 의혹은 사라지고 역겨움과 혐오감이 몰려와 고개를 돌리고 말았소.”(153-154쪽)
메리 셸리가 봤던 인간들의 악과 살육의 역사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도 지속되어 왔고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 때문에 괴물이 되기로 선택했던 피조물조차 역겨움과 혐오감으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던 역사를 가진 인간들은 메리 셸리의 시대와 비교할 때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요?
프랑켄슈타인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 시대에도 많은 프랑켄슈타인들이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탐구와 창조 열망에 가득찬 생명공학자들과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 시스템을 창조해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싶어하는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대표적입니다. 과학기술 분야에 있는 연구자들은 종종 어떤 기술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 서려고 합니다. 자신은 가치중립적인 기술을 만든 것일 뿐 기술을 활용하는 문제에까지 개입하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과학을 응용한 기술을 만들고 사용하는 것도 사람들입니다.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열망 추구에 대한 책임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특히나 생명을 다루는 연구라면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괴물은 자신의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어찌 생명을 가지고 그렇게 놀 수 있는거요? 나에 대한 의무를 다하시오. 그러면 나도 당신과 다른 인간들에 대한 본분을 다하겠소.”라며 호소합니다.
이런 수준의 생명창조가 가능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공지능의 경우엔 로봇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피조물에게 해야할 의무를 이행하기로 했다면 이 괴물은 분노로 가득차 인간들을 죽이는 대신 프랑켄슈타인의 훌륭한 동반자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현대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의 연구결과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게 될 상황에까지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류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능력들을 썩이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거네. (중략) 감정과 이성을 지닌 존재를 창조해낸 일을 생각하면 나 자신을 평범한 과학자로 생각할 순 없었지. 하지만 내가 과학자로서 첫발을 내디딜 때, 힘을 복돋아주었던 그러한 생각 때문에 지금 내가 먼지 구덩이 속에 깊숙이 처박힌 거네. 나의 모든 생각과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고, 전능함을 갈망하던 대천사처럼 나는 영원한 지옥에 갇히게 된거지. (중략) 나는 천국을 밟는 상상에 빠져들었고 내 능력에 기뻐했고 그 연구의 성과를 생각하며 기쁨에 타올랐지. (중략) 한데 지금 나는 얼마나 몰락했는가!”(283-284쪽)
현대의 프랑켄슈타인들도 인류에게 유용함을 제공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을 썩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메리 셸리의 상상이 매우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최근 점점 가속되는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속도를 보면 충분히 그럴법 합니다. 많은 연구들에 대해서 창조자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창조물을 만드는 수준까지는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합의와 통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