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가 1899년 발표한 《부활(2014.01.10. 문예출판사)》은 여죄수 마슬로바와 배심원 네흘류도프 공작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주인공인 두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살짝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슬로바는 스물여섯 살이며 지난 7년 동안 창녀 생활을 하였고 현재 6개월 동안 수감 중이며, 전형적인 귀족으로 자란 네흘류도프는 현재 코르차긴 공작 영애 마리야와의 결혼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과거 네흘류도프가 고모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마슬로바의 순결을 빼앗고 사라진 이후 서로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네흘류도프가 배심원으로 참석한 법정에서 살인죄로 기소된 마슬로바를 목격하면서 두 사람의 끊어진 인연은 다시 시작됩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귀족 네흘류도프가 창녀 마슬로바와 결혼하기로 결심하는 사건이 이야기의 시발점입니다. 그리고 네흘류도프의 결심에 따라 그가 마슬로바를 돕고 그녀 주변 인물들, 즉 죄도 없이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부활》의 전체 스토리입니다. 네흘류도프는 창녀생활을 한 마슬로바의 타락한 삶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았고, 귀족 신분인 자신이 창녀인 그녀와 결혼한다면 그녀의 삶도 구원받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희생으로 마슬로바의 구원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슬로바를 위한 네흘류도프의 행위는 귀족사회 안에서 안락과 안주를 찾던 자신을 변화와 변혁에 이르게 하리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합니다.
귀족 생활에 흠뻑 젖어있던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와 재회한 이후 성실하고 진실했던 청년 시절의 자신을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 잔혹성과 부조리함을 모두 갖춘 세상과 마주합니다. 그는 가난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농민들이 독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위해 자신의 수입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옥한 영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주었고, 배심원들의 실수로 죄가 없는 마슬로바가 4년 징역형을 선고받자 상소를 준비합니다. 이처럼 네흘류도프는 모든 일에 용감하고 열정적으로 맞서는 듯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갈등하며 부끄러운 감정을 느낍니다. 자신의 결심과 행동이 옳다는 확신이 부족했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의 생각과 행동은 러시아 사회를 지탱하는 상류사회의 규칙에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마슬로바가 과거 순진하고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돌아올지에 대한 의구심도 네흘류도프가 혼란스러움을 느끼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의미를 제대로 인지하기 위해서는 톨스토이의 삶과 당시 러시아 제국 상황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소설 속에서 정직하지 못한 재판 과정, 처참한 감옥 상황, 더럽고 비참한 농민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농민의 삶에 애착을 갖고 있던 톨스토이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하는 평민, 지주 소유인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대대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농민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과 대조적으로 육체적인 아름다움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문란한 사생활에 빠져있는 정직하지 못한 귀족들의 삶도 보여줍니다. 톨스토이가 네흘류도프의 입을 빌려 오늘날 러시아에서 성실한 인간이 몸을 둘 유일한 장소는 감옥이다! (2권 p.131) 라고 말하였을 정도로 러시아 상류사회는 타락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사회 안에서 중요한 인물이라고 착각하며 살던 네흘류도프 역시 타락한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가 그가 아닌 시몬손과의 삶을 선택하면서 진정한 자유를 찾고 모든 혼란과 고민이 사라지면서 오롯한 자신만의 삶이 시작됩니다. 마슬로바를 위해 용감한 선택을 했던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뿐 아니라 자신도 과거와 다른 사람으로 부활시켰습니다.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네흘류도프는 과연 어떤 행동을 하였을지, 소설 밖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톨스토이의 명작 중의 명작인 <부활>을 이제야 접하다니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그간 다양한 분야의 도서를 읽어 왔지만 정작 고전의 부류이면서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을 많이 읽지를 못한 것은 신간에 치우쳐 고전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시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후로는 가급적 고전을 가까이 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시대와 삶의 패턴을 달라도 고전이 주는 재미와 유익함,교훈은 심대하기만 하다.또한 부활을 번역한 김학수작가의 정교하고 군더더기 없는 내용은 신선하고 강렬하면서 내용의 전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부활은 1~3부로 나뉘어져 있다.1권은 1부 및 2부(상)까지 되어 있고 2권에서 2부(하) 및 3부 그리고 작품해설,작가연보가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다.
톨스토이가 살았던 시대는 흔히 제정 러시아시대라고 한다.황족이 국가 최고의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 신분체제가 뚜렷했던 것으로 보여진다.흔히 고위층이라고 하는 공작,후작,남작,백작을 비롯하여 판사,변호사,검사 등의 계층이 있고 농민,노동자 등은 하위계층으로서 거의 노예에 가까웠다는 것이다.공작과 같은 계층은 속칭 '빵빵한 집안'으로서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높아 돈과 물질,명예가 남부럽지 않을 정도였을 것이고,농민,노동자는 지주 등에 예속되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게다가 인간관계 역시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겠지만 인간관계 형성도 비슷비슷한 계층끼리 어우러졌다는 점이 관례이고 인습이다.그런데 부활은 이러한 관례적인 틀을 깨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 인상이다.
귀족계층인 네흘류도프는 공작 집안에서 태어난 청년이면서 재판정의 배심원이기도 하다.또한 인맥이 풍부하여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는 핫라인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부러울 정도였다.반면 네흘류도프가 마음으로 사랑해 마지 않는 카튜샤는 사창가 출신으로 네흘류도프와 정을 나누게 되고,카튜샤는 상인의 반지를 훔치려 하고 독약을 주입하여 상인을 치사에 이르게 한 혐의로 지방 재판소에서 4년의 징역을 언도받게 된다.4년 징역언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네흘류도프는 카튜샤의 평소 행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녀의 실형은 잘못된 것이라면서 그의 친구 변호사에게 이 사실을 알려 원심파기를 요청하게 된다.그러나 당시 사회상으로 볼 때 천민에 가까운 카튜사가 귀족계층과의 스캔들은 상인의 죽음과 관련하여 죄를 뒤집어 씌우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여진다.즉 카튜사는 고위층에게 미운 털이 박힌 셈이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에 의해 카튜사가 실형을 받게 되었다고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속죄의 뜻으로 원로원 등 고등기관에 항고를 하려고도 하고 황족에게도 간청을 하려 했지만 결국 법원이 언도한 원심대로 카튜사는 징역을 살아야 한다.카튜사가 감옥에 있을 때 네흘류도프는 그녀를 어렵사리 만나게 되고 돈까지 찔러 주지만 그녀는 이 돈으로 술을 사서 몸을 망가트린다.결국 카튜사는 시베리아 이르츠쿠츠라는 곳으로 유형을 가야 할 상황이다.네흘류도프는 자신이 갖고 있던 토지를 농민들에게 싼 값으로 배분하려고 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하려고 한다.네흘류도프는 비록 귀족계층이면서 제정 러시아의 봉건시대에 살고 있던 인물이지만 사랑은 신분을 뛰어 넘는 고귀한 것이고 돈과 물질이 소수계층에 몰려 있는 비합리적인 시대의 고통을 대다수의 농민,노동자들에게 분배하여 삶의 질을 바꿔 보자는 톨스토이작가의 삶의 가치관이 명징하게 투영되어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고전 『부활』 전문을 처음 읽었을 때는, 만화책이나 압축본으로 읽었을 때 네흘류도프와 카튜샤의 사랑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던 『부활』 이 권력자들의 이득을 위해 사회 제도와 법이 집행되었을 때 혼란한 사회의 모습과 그것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네흘류도프와 비슷한 처지였지만 여러 제약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실제로는 그렇게 실천할 수 없었던 작가 톨스토이가 그의 입장에서 치열한 고민과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을 보고 언젠가 나도 저이처럼 후대에도 자신의 생각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내게 톨스토이는 언제나 동경의 작가였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비롯, 우화처럼 짤막한 이야기들을 엮은 책부터 『전쟁과 평화』까지 탐독하면서, 언젠가 이 작가의 전작을 읽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 그 유명한 톨스토이의 대작 속 여자를 꼭 만나보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문예 출판사로부터 『부활』을 다시 읽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전에 톨스토이의 마지막 작품이 바로 이 『부활』 이라는 점에서, 또 아직도 안정되지 못하고 혼란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부활』 은 부당한 사회의 권력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지적하고 있기에 그 역사를 비추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부활』 읽기는 나에게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다시 만난 『부활』 은 내게 카튜샤와 네흘류도프의 권력 관계에 대해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네흘류도프가 자신의 부도덕한 생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갱생의 의지로, 옛적 그녀의 몸을 탐해 그녀를 윤락의 길로 빠져들게 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녀를 돌보겠다는 의지로 매달리는 것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물론 카튜샤의 타락에 있어서 네흘류도프는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녀는 네흘류도프의 욕망에 의해 희생된 이후로, 쾌락의 도구로 쓰인 그녀의 육체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며 쾌락적 인물로 변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네흘류도프가 그녀의 삶에 대해 전적으로 개입하여 그녀의 도덕성에 대해 운운하는 모습이 불편했다. 이에 대해서 카튜샤의 반응은 처음엔 그의 돈과 권력을 이용하려고만 했지만, 점차 그녀 자신이 또 다시 이용당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분노를 표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분노에 사무친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이렇게 외쳤다. "당신은 나를 미끼로 자신을 구하려는 거죠." 그녀는 가슴속에 복받치는 모든 말을 단번에 쏟아놓으려는 듯이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나를 노리갯감으로 만들어놓고 저세상에서도 날 미끼로 자신을 구하려는 거죠! 보기도 싫어요. 그 안경, 기름진 더러운 상판도 다 보기 싫어요. 어서 가요. 어서 가!"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서 이렇게 외쳤다.
- 『부활』 中 p.271
그러나 그랬었던 카튜샤도 네흘류도프를 다시 사랑하고 진정으로 그의 인정과 애정을 얻기 위해 (네흘류도프의 시선에 의해서만 비춰지는 모습이기에 명확하게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없지만) 맹렬히 자신의 쾌락만을 좇기 이전의 삶으로 점차 돌아가게 된다. 그렇지만 사실 애초에 그녀를 매춘부로 취급하여 그녀의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끌어내린 인물은 네흘류도프가 아닌가? 이제 정신적인 각성으로 기존에 생각해오던 도덕적 이상과 일치시키는 삶을 살겠다하여 그녀를 쫓아온 네흘류도프가 그녀와 무언의 권력 구도를 형성하는 것을 용인하고, 점차 그녀에 대한 그의 암묵적인 개입들을 수용해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표면적으로는 카튜샤를 동등하고 자유로운 입장으로 추어올리기는 하지만, 실상은 그 관계 또한 권력자와 피지배자 간의 불공정하고 억압적인 또 다른 관계의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계획과 이상이 뜻한 대로 실현되지 않게 되어 그녀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갖기도 하였지만 이윽고 홀로 남았을 때 성경 구절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진정한 부활을 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그 마지막 장면을 통해 부당한 권력과 그 가운데 혼란한 삶 속에서도 진정한 사람으로서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제시한다. 그 모습은 흡사 종교의 예배와 설교 말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에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이와 별 다를 바가 없다. 인도주의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 자신의 죄많음을 인지하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교정하는 일을 그만두는 것 등등은 우리들로 하여금 보다 더 나은 차원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에 대해 분명히 일러두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지금 『부활』 을 읽었을 때 우리의 삶에 적용해볼 수 있는 문제들은 이 텍스트 속에 더 많이 존재한다. 먼저 기존의 네흘류도프가 단순히 욕망만을 따르는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도덕적 타락에 빠졌던 이유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생각을 따르기 보다는 타인의 가치판단에 의존하고 그에 대한 타인의 개입을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네흘류도프의 이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관계성이 지나쳐진 나머지 타인들과의 관계망은 긴밀해졌지만 그만큼 우리 자신에 대한 타인들의 개입 가능성은 커졌다. 그 가운데 타인들이 생각하고 비판하는 가치들이 마치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합당하다 여기는 것마냥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이 시대의 네흘류도프들이 많은 것이다.
온전한 정신적인 독립을 위해서 네흘류도프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첫 번째로 그는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일기는 일종의 자아와의 대화로써, 잊고 지내던 자신 내면의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행위는 자존을 다시 세우고 자기 주관과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일에 초석이 된다. 모든 것에 앞서서 먼저 자기 스스로 바로 설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옳지 못하다 생각하는 일(불의)과 허위를 용인하다 점차로 무감각해져 익숙하게 저질러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일이었다. 네흘류도프는 그 자신과 권력층의 인물들을 통해서 옳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비슷한 환경에 젖어 있다보면 함께 물들게 되고, 불편하게 느꼈던 생각을 지워버림으로써 거리낄 것 없이 점차로 동화되는 모습들을 확인했다. 우리는 우리 내면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받아들이다 무감각해져 익숙하게 허위나 불의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마땅히 돌아볼 일이다.
『부활』은, 당시 톨스토이가 바라보는 시대 전반의 부조리함에 대해 가감없이 그려낸 명작인만큼 표면에 내세운 카튜샤와 네흘류도프의 애정 관계와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그 이면들을 통해서 우리 삶에 비추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는 훌륭한 텍스트이다. 자기 위선과 허위의 거짓된 목소리에 취해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금 펼쳐 보면서 하나같이 치열한 자기 고민과 반성이 가득한 그 문장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내가 책을 가장 읽지 않았던 시기는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가장 열정적으로 책을 읽었어야 할 때에 책을 읽지 않다 보니 그 무렵에 읽었어야 할 세계고전문학작품들 중에서 읽지 못한 작품이 꽤 많은 편이다. <부활>도 그 중 한 편으로, 우연히 시골집에 있던 세로쓰기로 된 낡은 <부활>의 하권을 발견해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인연의 전부이다. 그래서 전권을 제대로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자꾸 미루다 보니 끝내 읽지 못한 채로 지금까지 왔다. 그 동안 당연히 읽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 겨울 들어서 <돈키호테>와 <파우스트> 등 그 동안 미뤄두었던 책을 읽었고, 마침내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으니 미뤄두었던 숙제 중 하나를 끝낸 것처럼 기쁘다.
자기 자신의 흠을 항상 제때 발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더 좋은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권 166쪽)
드미트리 이바노프 네흘류도프 공작은 배심원으로 참가한 재판에서 살인과 절도의 피고인 예카테리나 마슬로바(카튜샤)를 알아본다. 네흘류도프는 고모 댁의 하녀로 있던 열여덟 살의 그녀를 순수하게 사랑했지만, 그녀를 유혹해 몸을 빼앗은 뒤에는 그녀를 잊어버렸다. 마슬로바는 고모 댁에서 쫓겨난 뒤 타락하여 몸을 파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재판 과정의 착오로 인해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는다. 네흘류도프는 속죄를 위해 마슬로바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고, 만남이 거듭될수록 그녀는 그에 대한 사랑이 되살아난다. 한편 네흘류도프는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통해, 귀족들의 향락적이고 부패한 삶이 가난한 계층에 대한 억압과 착취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네흘류도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슬로바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고 그는 죄수들과 함께 시베리아를 향하며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힘쓴다.
다 같은 인간이면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또 무슨 권리로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감금하고, 못살게 굴고, 유형을 보내고, 매질을 하고, 죽이는 것일까? (2권 145쪽)
네흘류도프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기도 하고, 아름답고 순진한 처녀 마슬로바에게 거짓 없는 사랑을 느끼는 순결하고 정직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향락과 사치에 빠져든 그는 자신의 첫사랑을 유혹해 하룻밤 쾌락의 대상으로 삼고는 무책임하게 떠나버리고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운명은 때로 예상치 못했던 모습으로 찾아오기도 하는 법이고, 마슬로바의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한 그는 처음에는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의 잘못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까 하는 것만 두려워한다. 하지만 무죄임이 분명한 그녀가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게 되자 그는 속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하는데, 처음에는 진정한 희생이 아닌 일종의 자기만족을 위한 희생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그녀에게 실망하고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차츰 도덕성을 회복하고 그녀뿐 아니라 사회적 모순으로 인해 고통 받는 농민들과 죄수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진정한 희생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단지 속죄를 위해 마슬로바의 무죄를 밝히려고 했지만, 그녀의 면회를 다니며 19세기 제정 러시아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더 큰 희생의 길로 나아간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여기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일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최대의 모독이며 조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1권 227쪽)
농민이 궁핍해진 전적인 원인, 아니 적어도 아주 그 궁핍의 중요하고도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그들을 먹여 살리는 땅이 그들의 수중에 있지 않고,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이용해 농민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지극히 명료한 사실이었다. (1권 358쪽)
아래로는 법정 정리에서 위로는 대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관이나 사법 관료들은 입으로는 정의와 민중의 행복을 떠들면서 실제로는 그런 데 아무런 관심도 없고, 오직 이 같은 고통이나 타락을 초래하는 일을 하는 데 지불되는 매달의 봉급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이다. (2권 311쪽)
네흘류도프는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이 아닌 지주들에게 땅의 소유권이 있다는 점에 있으며, 토지 사유를 인정하는 한 결국 부자들이 땅을 독점하고 농부들은 끝내 땅을 팔고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심 끝에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각자가 지불한 땅값은 공동재산으로 산입해 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한편 교회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마음으로 신에게 기도하는 외에 회당이나 제단, 십자가와 복잡한 의식 등의 일체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뜻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더욱이 재판소과 감옥, 행정을 맡은 관료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는 것만을 우선하며, 무고한 한 사람을 벌주지 않기 위해 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열 사람을 형벌이라는 수단으로 제거할 뿐이다. 결국 톨스토이는 자신의 대변인이라 할 수 있는 네흘류도프를 통해 당대 러시아가 안고 있던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모순 등을 밝히고 이를 개혁할 필요가 있음을 소설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일은 모두 인간이 서로 사랑 없이 교섭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비롯되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란 있을 수 없다. 물건이라면 애정 없이도 다룰 수 있다. 그러나 애정 없이 결코 인간을 다룰 수는 없다. (2권 207쪽)
사회의 질서가 존속하고 있는 것은 남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이들 합법화된 범죄인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부패와 타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이 서로 돌보며 서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깨달았다. (2권 358쪽)
우리는 <부활>을 통해 톨스토이가 인식하고 있는 당대 러시아의 부패와 구조적 모순을 관찰할 수 있고, 그가 지향하는 인간과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톨스토이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사랑’이라고 보고 있다. 법률이나 행정, 경제와 종교 등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것들은 인간의 삶을 이롭게 할 때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인데, 오히려 사회 제도가 범죄자를 만들고 있으므로 그것은 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네흘류도프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성찰과 선(善)의 실천을 통해 작가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 다만 네흘류도프라는 인간이 작가의 이상을 구현하는 인물이다 보니, 지나치게 관념적이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전환하는 계기 등에 필연성이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라는 두 사람의 사랑에서 출발하여 러시아를 비롯해 현대 문명이 안고 있는 문제를 종합적으로 진단하고, 70을 넘긴 노작가가 자신의 평생을 통해 이룩한 사상의 정수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