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도 없이 이 작품을 읽은 이유는 다른 책들을 접하면서입니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이 작품에 대한 언급을 했습니다. 도무지 그 책이 뭐였는지 생각이 나질 않네요 ㅠㅠ 다시한번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한 저를 탓해봅니다. 얼마전 읽은 작품 외에도 몇몇 작품들을 읽으며 아Q정전에 대해 접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매력이 있길래 많은 책에서 루 쉰이라는 작가를 언급하고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것일까 궁금하여 선뜻 이책을 읽게 된것입니다. 읽는내내 어렵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겠다, 다시 읽어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많이 부족해서인지 아직은 내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다시 이책을 꼭 읽어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책에는 표제작인 아Q정전과 광인일기외에도 여러 편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보다 아Q정전은 그리 길지 않은 내용임에도 쉽게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정독을 하지 못하고 빠르게 읽어내려가는 조금은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 책은 그 나쁜 습관마저 잊게 합니다. 요근래 읽은 책 중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려 읽은 책입니다. 왠만한 장편소설하나 읽는 것보다 오래 걸리고 하나하나 내용을 짚어가며 읽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역사적 배경을 떠나 이름조차 생소하고 상황들도 낯서니 저처럼 이해력이나 독해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읽기에는 조금은 버거운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포기할수 없었던 것은 도대에 아Q가 누구이며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하여 책을 놓을수가 없었습니다.
이 작품을 만날수 밖에 없었던 운명일까요? 한 온라인 서점에서는 매일 작품이나 작가와 관련된 사건들을 알려줍니다. 솔직히 평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보지 않는데 어제는 굳이 보려하지 않았는데 하나의 사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다른 것들은 기억도 나지 않는데 하나의 일만 생각납니다. 1881년 9월 25일은 루 쉰이 태어났다는 것이 보였습니다. 평소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내용인데 이렇게 책으로 만나려는 운명이 있었는지 루쉰이 태어난 날 이 책을 읽기 시작하고 하루가 지난 오늘 그의 작품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아Q정전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려면 시대적인 상황부터 알아야할 것입니다. 지금은 역사가 제게 또다른 재미를 주는 분야이지만 학창시절에는 역사가 싫어 이과를 선택한 바보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모르는 것들이 많아 이 책을 읽기 전 역사적인 내용들부터 훒어보았습니다. 2000년간 계속된 전제정치가 끝나고 중화민국이 탄생하는 시기이니 그 혼란스러움은 말하지 않아도 알것입니다.
신해혁명이라는 시대적 배경속의 아Q는 어떤 사람일까요? 읽으면서 비열하기도 하고 기회주의자에 강자에 굽신거리고 약자에게 힘을 쓰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읽어가며 우리들이 연민을 느끼고 바라보는 인물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의 본성이라기보다는 시대가 만들어낸 인물이지 않을까 합니다. 만만하게 보던 왕후와 몸싸움을 하려다 오히려 자신이 먼저 맞게 되자 그가 내뱉은 한마디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들은 알수 있습니다. 또한 왕후에게 당한 수모를 자신보다 힘이 없는 비구니에게 그 화풀이를 하는것을 보며 밉상 캐릭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군자는 말로 하지 손을 쓰지 않는 법이다!"
아q가 처량한 모습으로 소리쳤다. - 본문 33쪽
중국 신문학의 개척자,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쉰의 아Q정전. 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와 같이 힘없고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약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며 강자에게 이용당하고 무시를 당하는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들끼리 더 큰 상처를 남기는 조금은 슬픈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아Q는 슬픈 현실속의 희생양이 아니였을까요? 읽는내내 어렵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은 시대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그럴수 밖에 없는 현실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제목 부터 내용이 어려울 것 같았다. 읽어볼까 고민하던 찰나에 구매해서 읽어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너무 어려운 책은 아니어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한번쯤 읽어보기에 정말 좋은 책 같다. 이 책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방관자의 모습을 잘 띄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의지를 저버렸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려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 보다는 힘 있는 자들의 의견에 존중하고 의지하고 있는 모습은 안타까우면서도 씁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에도 이러한 모습들이 있었다는 것에 새삼 사회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중국에 머무를 때,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치안이 불안한 도시에 머무르며 호적이 없는 사람들, 黑人口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찍이 접한 중국의 사회문제였지만 실제 중국에서 생활하며 그들의 삶과 몇몇 黑人口의 범죄상을 대할 때면 그 문제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상상 때문에 밤길과 평소 행적에 신중을 더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함께 떠오른 안타까운 사실은 최소한 한 나라의 영토 내에서 출생했으므로 그들이 응당 부여 받아야만 하는 권리에 대해 무대책으로 일관하는 중국 정부의 안일함이었다. 큰 발전을 이루며 마천루를 이루는 대도시와 미처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지방과의 경제적 격차는 서서히 줄여나가면 된다지만, 이미 국민으로서 배제되며 기본적인 인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최소한의 생활을 이어가는 그들과 정부 체제의 모습을 보노라면 루쉰이 끝없이 외쳤던 정신적인 면에서 중국의 반봉건 사회에서의 탈출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되묻게 된다.
정확한 이름마저 언급되지 않는 아큐는 집도 없이 미장에 있는 토곡사에서 살며, 날품팔이로 내세울 것 없는 삶을 이어가는 청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인할 길 없는 화려한 과거를 굳이 강조하는 강한 자존심의 소유자다. 게다가 온갖 모욕 속에서도 스스로 이겼다고 생각하는 ‘정신승리법’ 을 통해 합리화에 능한 인물이었고, 가진 능력이 없지만 혁명당원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기도 했으나 결국 총살당하며 그 끝을 맺는다. 반면 마을의 지주인 자오씨 집안은 혁명당이 들이닥쳤음에도 그 여파에 휘둘리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지적하기 보다는 사실 자체만을 그려냈지만 루쉰은 그 속에서 당시 중국의 그릇된 현실을 비판한다.
신해혁명을 통해 신중국을 꿈꾸던 지식인 루쉰은 체제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전근대적인 의식 또한 변화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혁명의 의미가 퇴색되고 시비의 기준이 모호한 시점에서 아큐라는 인물의 희화화를 통해 자국의 현실과 그를 이루는 중국인의 모습을 꼬집고 비판한다. 아큐에게 동정보다는 행동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묘사는 일반 중국 대중을 겨냥하였음이 작가의 사상을 미루어보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변화의 대상이고, 당연히 그 변화의 수용을 인정 해야 할 입장인 중국인 스스로가 반봉건적인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꺼리고 안주하려는 태도는 루쉰의 입장에서 집단이 가진 무지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한 국가 체제 내에서 국민이 가지는 위치에 대해 곱씹어 보면, 실질적인 권력 행사의 범주에서 벗어난 대중은 반드시 보호 받아야 하며, 만약 그 일원의 하나가 체제에 의해 불합리한 처사를 당했다면 자신에게도 그 칼끝이 돌아올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권력의 그릇된 휘둘림을 막아야만 한다. 하지만 루쉰이 그린 중국인은 그렇지 않았다. 아큐의 총살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계급을 가지고, 유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큐가 어리석은 행위로 비웃음을 받았지만, 구경꾼들 역시 어리석기로는 아큐에 버금간다. 자신의 무지를 무기로 삼아 아큐를 비웃고 공격하는 그들은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를 죽음을 그저 타자(他者)의 것으로 치부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인생에 한 명 있을 법한 익살꾼이 것이 아닌 먼 훗날 본인의 모습이라 깨닫고 아큐의 말도 되지 않는 죽음 앞에 현실을 비통해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루쉰이 악취 나는 닫힌 세상을 묘사하며 아큐는 중국인의 아둔함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존재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 절대적으로 어리석은 체재의 모순을 그리기 위해 절대적으로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아큐는 루쉰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불러낸 인물이다. 엉뚱한 자의적 승리의식의 소유자 아큐가 곧 중국인을 대표하여, 세계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과거의 영광에 빠져 도태되어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기를 서슴치않는 당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변화하지 않는 시대의 미아가 되어버린 ‘黑人口’ 문제 역시 대두되며, 현대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할 국민의 인권이라는 사안에 대해 중국정부의 뚜렷한 대안이나 정책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씁쓸함을 더하고 있다. 루쉰은 광인일기에서 “救救孩子......”라는 글귀로 끝맺으며 미래 중국에 대한 희망과 함께, 부족한 자신감을 드러냈던 예견이 들어맞은 것은 아닐까.
9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등장인물 명지의 대사이다.
“소련에 있을 때 기차를 탄 적이 있어요. 몇 날 며칠을 계속 가는데 그게 다 소련 땅이래요.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구요. 나는 왜 이렇게 넓은 땅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어쩌다가 좁고 한심한 땅에 태어나서 이 고생을 하는가. 그런데요. 그러다가 어느 간이역에서 조선 사람을 만났어요. 누가 지나가면서 혼잣말을 하잖아요. "어휴. 더럽게 춥네". 그 조선말을 듣는 순간. 참 이상하죠. 눈물이 왈칵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막 울었어요.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도망칠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어요? 그래요?”
루쉰도 명지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의식의 긍정적인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민족에 대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민족애를 가진 중국인으로서 당시 중국을 살아가던 지식인의 귀속점을 이미 깨닫고 있기에 그 역할을 감내할 수 있었다고 본다. 소설 속에서는 담담한 나레이터였지만 중국 민족혼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온 몸으로 증거했던 루쉰의 절박한 외침을 아직도 이어지는 듯 하다.
불안은 사랑하는 대상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조국의 현실을 꿰뚫고 의식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며 “중국인이 깨어난다면……” 이라는 숨은 욕망을 드러낸 것은 그의 불안감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또한 그 감정은 중국의 ‘멈춤’이 원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 국가의 운명이란 본디부터 그렇게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깨어지기 쉬운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본래 그런 조국을 유독 불안정하게 느꼈던 것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는지 되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