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호의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작품의 이야기의 흐름을 뒤쫒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속에 녹여낸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일인 듯 하다. 톨스토이.. 하면 모르는 이가 없는 러시아의 대문호이다.그의 대표작들은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제목 정도는 익히 알고 있는 그런 작품들이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읽어야하는 책들이기에 그저 활자를 눈에 넣듯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독후감을 써야하기에 정답을 써 내려가듯 이 책을 읽으면 느껴야 하는 것들을 적어 내려갔던 것 같다. 그렇게 했던 독서 후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게 되는 그의 작품들은 그렇게 가볍게 읽어내릴 수 있었던 작품들이 아닌 심오한 이야기였음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안나 카레리나>를 완독한 후 등장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무엇인기 불문명했던 어떤 기준이나 가치관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을 수 있었다면 이번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수록된 세 편의 단편을 통해서는 '삶과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해 보게 된 것 같다.
누구나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다만 그것이 먼 얘기로 생각이 되기 때문에 막연하게 생각을 하게 되고 또 이 세상의 끝을 맞이하는 것이기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인 듯 하다.
아무리 죽음을 준비하고 그것에 대해 담담해야지 맘을 먹어도 인간인 이상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날것 그대로 잘 보여주는 듯 하다. 이 작품은 이성과 과학으로도 통제되지 않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을 깨달은 작가가 쓰게 된 작품이기에 톨스토이의 죽음에 대한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품인 듯 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판사로서 성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이반 일리치. 약간의 위기도 있었지만 그 정도면 성공한 삶을 살았기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행복을 느낄때 쯤 우연한 부상과 함께 몸에 이상을 느끼게 된다. 점점 자신을 억누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놓고 그 죽음을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과 죽음을 맞이하는 본인 이반일리치의 심경등이 솔직하게 묘사된다.
그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생각한 것은 그로 인해 생길 자리 이동과 승진이 전부는 아니었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누구나 그렇듯 그들 역시 속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죽은 건 내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야.'
그들 모두 생각하거나 느낀 건 이런 거였다. '아, 그는 죽었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 있어!' (p11)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 그의 자리에 누가 가게 될까? 내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리고 가족 조차도 연금 이외에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궁금해한다.
물론 그의 죽음 애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그거고 현실은 또 현실이다.. 라고 자위하는 우리네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막상 죽음을 맞이한 이반 일리치는 고통과 공포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주위 사람들의 걱정이 가식처럼 느껴지고 또 자신에게 무심하다 생각하며 그들이 밉기만 하다. 또한 죽음을 받아 들일수가 없다.
카이사르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었고, 그러니 죽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나만의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나, 바냐, 이반 일리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p62)
그러다가 이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건 아닐까?' '잘못된 삶을 살았던 건 아닐까?' 하는 자책을 하게 된다.
결국 자신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고통에서 구해내고 자신도 이 고통에서 헤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고통과 통증이 사라지며 주위 사람들이 " 다 끝났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반 일리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되니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p99)
이렇듯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속에서 인간이 겪게 될 내면의 변화를 이반 일리치는 솔직하게 보여준다.
<악마>
인간의 끝임없이 욕망을 추구한다. 그러한 욕망의 추구가 결코 옳지 않다고 이성은 자꾸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때문에 추락하는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훌륭한 가문의 청년인 이르테네프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산으로 남겨 주신 농장과 영지를 관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성실한 삶을 살아가지만 절제된 욕망을 견디지 못해 산림지기의 도움으로 스테파니다라는 유부녀와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아내를 맞이하고 스테파니다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다시 성실하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우연히 마주친 스테파니다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다시 솟아나는 욕망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결국 그 죄책감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 소설의 결말은 2가지로 서술되는데 결국 비극적이라는 것은 동일하다.
<신부 세르게이>
촉망받는 장교 카사츠키는 사랑스러운 약혼녀의 불륜을 알게 되고 그 길로 세속적인 인연을 뒤로 한 채 수도원으로 돌아간다. 멋진 신부를 유혹하는 세속적인 유혹들이 많았지만 그럴때일수록 기도에 정진하며 더 깊은 수도 생활을 한다. 그는 모든 세속적인 유혹을 거부한 성스러운 성자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그는 병든 사위와 손주들을 보살피며 어렵게 살고 있는 옛 친구 파센카를 만나 자신의 수도자로서의 삶과 명성이 헛된 것임을 깨닫는다.
파센카는 내가 되어야 했지만 되지 못한 바로 그 사람이야. 나는 신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사실은 사람들을 위해 살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람들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지만 신을 위해 살고 있는 거야. 그래. 하나의 선행, 보답을 바리지 않고 베푸는 한 잔의 물이 내가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은혜보다 더 귀중한 거야. 그런데 거기에도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열망이 있었을까? 그는 스스로 묻고 대답했다. ' 그래 있었어. 하지만 그 모든 열망은 세속적인 명성으로 더렵혀지고 묻혀버렸어. 그래 하나님은 나처럼 세속적인 명성을 위해 사는 자와는 함께 계시지 않아.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을 찾아야 해.' (p249)
이 두 작품속에서 욕망을 이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의 모습으로 표현하지만 이는 인간들이 추구하는 정신적, 물질적인 세속적인 욕망을 대변하고 있다.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항상 부족하고 그렇기에 불행하고 그것을 추구해야하기에 힘겨운 우리네 모습..
과연 누구를 위한 삶의 모습인지 다시 한번 되돌아 보며 작가 자신의 삶이 묻어나 있고 투영되어 있는 이야기를 통해 그의 삶 또한 되돌아 보게 되는 그런 시간이 된 듯 하다.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열망과 두려움. 그러나 그것 또한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가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러한 물리적인 유한성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그것에 지배당해 살아가는 삶보다는 그 또한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며 담대히 맞닥들이는 삶을 살아가라.. 그렇게 작가는 이야기해 주고 있는 듯 하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정 때문에 반성하는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실 수도 있을 것 같지만 톨스토이는 주인공 이반 일리치에게 기회 대신 죽음이란 고통을 주었네요.
이반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어쩌면 그가 한 실수에 비해 너무 과한 것 같기도 합니다.
죽음의 일이야 본래 불현듯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일은 꼭 그렇지 않죠.
톨스토이가 반성하는 사람에게 죽음을 주면서까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부정부패에 대한 권선징악도 가능해 보이고, 매 순간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라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죽음'은 다시 살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잘못을 수정할 기회도 주지 않죠.
인간의 삶은 유한합니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처럼
내 삶이 나를 배신한다고 느끼거나, 내가 살았어야 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고 느낀다면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러시아 원전 번역입니다.
죽음에 관한한 고민을 안해 본사람이 없었을것이고 한번쯤은 아름다운 죽음을 꿈꾼적도 있으리라. 아니! 더 깊게 생각하면 내가 과연 세상에 필요한 사람인지에 대한 회의부터 나 하나 없어진다고 슬퍼해줄이가 있을지... 세상에 대한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죽음이 마지막 돌파구라고 생각 할터이고 살야 할 가치를 눈꼽 만큼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악착같이 붙들고 늘어지는것이 생명 아니던가! 짧은 중단편 소설이지만 던져주는 메세지는 그 이상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 선택... 절망... 포기... 희망... 인정...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알려지는 자리에서 동료들은 그의 죽음에 애석해하기 보다는 그의 자리에 누가 오를것인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너무 죽음을 값어치 없게 몰아버리는 느낌도 들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솔직히 현재도 그렇지 아니한가. 그는 평범한 판사였고 그다지 아부를 하지 않고도 상류층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편이었다. 연수원 시절 전에 했던 부끄러웠던 일도 다른 동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것을 보고는 그냥 넘기기로 하는 순진형이기도 하다. 양가집 처녀와 결혼도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행복의 순간도 있었지만 이유없는 질투로 인해 오히려 가족이 족쇄로 여겨질정도가 되니 어쩜 좋으랴.
그래서 외적으로 특히 관직을 더 사랑하게 되고 승진의 꿈에 매진하기도 한다. 오히려 증오만 쌓여가는가 싶었는데 그래도 나중에 아내와 화해도 하지만 이번엔 그것이 권태로 이어지고 각자 서로에 대해 부족하다는것만 확인하게 되는것이다. 그런 그에게 불치병이 다가왔다.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그에게 아내는 빨리 죽어버렸으면 하면서도 없어지는 봉급을 두려워한다. 마찬가지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것처럼 진심으로 위로하고 다가서는 사람은 없고 이에 대해 그는 불같은 질투와 분노를 느낄수 밖에...
자신이 죽어가는것에 진심으로 절망하고 다른길은 없는지 찾아보려하지만 다른 피난처는 없었다. 주변 동료들은 혹시나 실수나 하지않을까 걱정을 할뿐... 유일하게 그에게 안식처가 되어주는 사람은 집사 게라심뿐이다. 자신의 삶의 기쁨을 죽어가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끔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을 시작한다. 어린시절을 빼놓고는 하나같이 혐오스럽게 느낀다. 일에대해 가정에 대해 친구들에 대해... 모든것이 가식적이고 진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그렇게 대해주지 못했던 아내와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주변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참회하며 용서를 빌게되니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진다. 죽음은 끝났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언제가는 죽음을 받아들일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들...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다가도 죽음의 문턱에 서면 달라지는 사람들...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이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도 필요하다. 물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 더 간절하다. 힘들어할때 들어줄수 있고 고민을 나누어 가질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자살율이 가장 높다는 한국... 특히 어린 청소녕이 많다는 사실... 죽음만이 희망이 될것이라는 착각을 주는 이 한국사회가 문제가 아니던가... 죽음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반성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빈손을 가야지... 훌훌 털어버리고...
사람들은 톨스토이에게 '대문호'라는 수식어를 붙입니다. 아직 그의 소설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이번 소설을 읽으며 그가 정말 대문호라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이리도 잘 설명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최고였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적절한 상황으로 설명했거든요.
이 책은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세 편을 담았습니다. 죽음을 다룬 최고의 명작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죄의 문제를 다룬 <악마>, 신앙의 문제를 다룬 <신부 세르게이>. 이 세 편의 소설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런데 또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주제들이 서로 연관되어, 한 권의 책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 소설을 모두 읽고 나니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 소설은 장례식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슬퍼해야 할 장례식이지만 왠지 사람들이 이상합니다. 이반 일리치의 지인들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올 득을 계산합니다. 그가 죽었으니 그의 자리가 빌 테고, 자신이 승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장례식 때문에 저녁에 카드게임을 못할까 봐 걱정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의 죽음으로 받게 될 연금을 계산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토록 계산적일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자연적으로 그의 죽음에 나를 대입했습니다. (묘비를 만들진 않겠지만) 내 묘비엔 어떤 글이 적힐까? 아내와 자식들은 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직장 동료들, 친구들, 지인들은 내 죽음에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까? 저는 대체로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이반 일리치처럼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절망적이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죽음 이후를 생각해본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악마>
이 소설은 죄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리고 독특하게 결말이 두 개입니다. 뭐, 두 결말 모두 불행으로 끝나지만, 암튼 두 개. 이 소설 주인공은 젊은 욕정을 참지 못하고 한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릅니다. 아주 잠깐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결혼 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 유부녀가 그 앞에 나타납니다. 그러자 그는 과거가 떠오르고 다시 욕정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결말은 매우 잔혹합니다.
'죄'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 박ㄹ혜는 제외입니다. 닭 수준의 지능인지 죄책감이 없는 것 같으니까요. 죄를 인식한다는 건 사람이 죄에 대한 근본적 해결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욕정을 품기만 해도 죄'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모두 벌을 받아야 할까요? 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처참한 최후를 맞아야 할까요? 저는 이런 극단적 결말로 마무리한 톨스토이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 소설 때문입니다.
<신부 세르게이>
이 소설에도 죄의 문제가 매우 크게 다뤄집니다. 신부 세르게이는 현존하는 성자라는 칭호를 받는 성인입니다. 그는 나쁜 생각도 곧 죄라는 성경 말씀대로 끝도 없이 죄를 고백하고 고행을 합니다. 은둔자 생활을 하며 오직 기도와 수양에만 힘씁니다. 안타깝게도 매우 미남인 세르게이를 유혹하려는 여자도 많습니다. 한 번은 어느 여자가 유혹하려고 하자 도끼로 자신의 손가락을 자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죄를 짓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된 세르게이는 22살의 여자의 유혹에 결국 넘어가고 맙니다. 그 후로 그는 극단적 선택을 하려다 돌이키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아마도 톨스토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일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 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결말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행위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는 것이며, 죄 사함은 공짜로 받는 선물이라고 합니다. 소설 속 세르게이는 자신이 고행하고 기도하고 무언가를 하면서 의인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방랑하며 만난 파셴카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파셴카는 기도도 자주 하지 못하고 생계 때문에, 여러 이유로 교회에도 자주 못 가는데도요.
세 소설의 공통적인 주제는 뭘까요? 삶과 죽음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아하는 것만큼이나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중요합니다. <악마>에서처럼의 죽음이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의 죽음보다는 <신부 세르게이>처럼 죽음을 준비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죄도 많습니다. 죄의 유혹을 뿌리치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거나 좌절하거나 피하는 건 정답이 아닙니다. 맞닥뜨리고 이겨내는 삶이 바로 올바른 죽음을 준비하는 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