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은 좋은 책을 연결해준다.
<세계가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을 읽으면서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고 싶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만난 줄리언 반스의 작품을 읽고 이 작가의 다른 책은 어떨까하는 호기심을 남겨주었다. <세계가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에서는 플로베르의 앵무새 주인공이 보바리부인을 떠올리면서 소설속의 주인공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으려면 보바리부인을 읽어야 했다.그러나, 사치와 향락으로 연상되어지곤 하는 보바리부인이 이제는 다르게 보여지기 시작했다. 예전의 나는 참 한심한 여인이라 생각했었다. 불륜, 간통, 향락과 사치, 현실적이지 않은, 꿈속에 사는 여자 보바리.
문득 책을 다 읽고 떠올리는 생각은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이다..
수녀원에서 생활하던 엠마는 늘 낭만주의 작품을 읽어왔다. 그녀가 생각하는 결혼생활은 멋진 남자와 시를 읊고 문학을 이야기하고 분위기 있는 식탁에서 우아한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소설처럼, 그러나 결혼한 후에야 보바리가 멋지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시를 읊거나 문학을 이야기하는 일은 더더구나 일어나지 않았다. 우연히 오페라에 참석하게 된 엠마는 그곳에서 가면무도회와 북적거림과 황홀함, 대담한 쾌락과 같은 미지의 흥분에 사로잡힌다. 이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자, 의사는 신경성 병으로 환경을 바꿔주라는 충고를 하는데 이에 보바리는 조금 큰 마을 용빌이라는 곳으로 이사가기로 한다.
이삿날이 가까워진 어느 날, 엠마는 서랍을 정리하다가 뭔가에 찔렸다. 그것은 결혼 꽃다발의 철사였다.엠마는 꽃다발을 불속에 던져버렸다. 그것은 마른 짚보다 더 빨리 타버렸다.그리고 잠시 후 재 위에 새빨간 덤불 모양이 만들어지더니 서서히 무너졌다.
이것은 앞으로 펼쳐질 엠마의 결혼생활에 대한 복선이다. 결혼 꽃다발이 무너지는 것처럼, 그렇게 엠마의 현실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엠마는 언제나 꿈을 꾼다. 수도원에 입학할 때도 토스트에 도착했을 때도 보비에사르에서도 어디서나 새로운 생활을 꿈꾼다. 자신이 겪은 이제까지의 생활은 늘 지루함 투성이였고 언제나 우울했으며, 소설처럼 환상적인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행복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엠마를 꿈꾸게 했다. 용빌에서 만난 젊은 서기 레옹은 자신이 늘 찾아헤매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는 시를 읽어주고 책이야기를 하며 태양을 볼 때는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었다. 보바리 부부는 레옹과 같이 어울리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레옹에 비해 한없이 촌스럽고 초라한 ,그러나 우직한, 그리고 미련한 보바리에게 더욱 싫증을 낸다.
그녀의 마음은 욕망과 극심한 고통과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주름이 똑바로 잡힌 옷은 동요하는 마음을 감추고, 정숙해 보이는 입술은 미칠 것 같은 괴로움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는 레옹을 사랑했다.
이리하여 육체적인 욕망도, 금전적인 욕망도, 그리고 정욕에서 오는 우울증도 모조리 하나의 괴로움 속에 한데 뒤엉켜버렸다.
레옹이 갑작스레 떠나고 엠마앞에 나타난 카사노바 로돌프. 로돌프의 눈에는 엠마의 그런 욕망들이 보였나보다. 엠마를 처음 본 순간 자신의 여자로 만들겠다는 장담을 한다. 엠마의 눈에 로돌프는 용빌의 다른 사람과는 다른 뭔가 세련된 것들이 있었다. 아무도 안 입는 꽉 끼는 조끼라든지 가죽장화라든지 , 허영심이 강한 엠마는 그의 풍채에 매료된다. (참 이런걸로 사람에게 반한다는 거 , 웃기는 일? ) 하지만, 로돌프는 카사노바라는 거. 엠마는 결국 버림받는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순정남 레옹.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젊은 남자와 사랑하는 데에는 그만한 댓가가 있어야 한다. 엠마는 결국 파산하고...............
그러나 뭐라 해도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어떠한 미소에도 권태의 하품이 숨겨져 있다.어떤 환희에도 저주가, 황홀한 키스에조차 충족되지 못한 더 큰 쾌락의 욕망이 입술에 남는 법이다.
보바리즘의 저자 쥐 드 골티에에 따르면 보바리즘이란 자신과 자신이 실제로 그러한 것과는 다르다고 스스로 믿는 능력이라고 한다. 플로베르의 소설에서 엠마의 전 생에 영향을 미쳤던 것은 처녀 시절 수도원에서 매일 읽었던 낭만주의 문학의 영향이었다. 그녀는 소설이 주는 이상을 꿈꾸며 세상을 바라보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현실과 이상이 엠마에게 주는 선물은 오로지 좌절뿐이었던 것이다. <세상이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의 저자 정혜윤은 플로베르의 주인공들은 모두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자신은 자신이 그러한 것과는 다르다고 스스로 믿는 능력'이 병리학적 양상을 제시하면서 나타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보바리도 아내의 권태와 증오는 모른채 행복한 가정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가장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다른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허황되고 편협하고 비속한 부르주아는 엠마만이 아니다. 약제사 오메는 더한 속물캐릭터이다. 오래 전에 엠마를 시쳇말로 된장녀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상을 꿈꾸고 늘 자신의 세계를 확인하고 싶어하며. 책을 사랑하고, 스스로 우아함을 잃지 않았던 엠마에게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엠마는 단지 꿈을 꾸었을 뿐이다. 깨어나지 못한 지독한 꿈을.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가 주는 선물이라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연휴 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읽으며 효용적 가치를 떠나 정신적 삶을 고양하려는 독서를 시작하였다. 강추위를 무릅쓰고 일출을 보러 나간 지인들을 배웅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남은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어제 떠오른 태양과 별반 다름이 없을진대 해돋이 명소에는 인파들로 끓어 넘쳐났다. 올해로 결혼 생활 23년째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은 인생에 회의를 품으면서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로 우여곡절이 많았던 지난한 세월이 무위로만 흘러가지 않은 듯해 자못 의미가 크다. 생각한 대로 살아지지 않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사는 게 재미없다며 뇌까릴 때가 있다. 각종 매체에서 미화하는 결혼 생활 속 배우자들의 생활이 주는 환상을 이식받아서인지 왕후 대접을 받고 싶었던 외사촌 동생의 올케는 그것을 빌미로 삼아 이혼을 하고 말았다. 지금도 외사촌은 자신이 왜 이혼을 당하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의아스러워할 정도로 부부 간의 사적인 이야기는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별에서 살다 온 둘이 화합하며 결혼 생활을 잇는 것도 여전히 힘든 일 중 하나다.
한적한 시골에서 옹색하게 살던 환경과의 결별을 위해 샤를과 재혼한 엠마는 결혼 생활의 환상을 가슴 속에 품고 지내왔다. 수녀원에 들어갔을 때도 그녀는 종교서적보다는 낭만주의 소설을 읽으며 달콤한 생활을 머릿속에 그려왔다. 의사의 아내로 그동안 갖지 못하였던 재화를 손에 넣고 문화적 향유를 즐기며 쾌락에 젖는 생활을 욕망하여왔다. 분위기 있는 식탁에 마주 앉아 상대에게 그윽한 눈길을 보내 교감하는 가운데 문학을 이야기하고 시를 읊으며 고아(高雅)한 생활을 잇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화된 결혼 생활은 생각만큼 재미와 흥미를 주지 않았고 의사는 아픈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몰두하여 그녀가 꿈꾸었던 장밋빛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단조로움 ․ 권태 ․ 밋밋함 ․ 무미건조함…….’
을 견디지 못하는 보바리는 남편인 샤를이 책 속 주인공처럼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욕망과 허영심을 채워줄 누군가를 찾아 궤도를 넘어서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생활 속 변화로 생기를 찾고 싶었던 그녀에게 오페라 관람은 북적거리는 인파들 속에서 가면무도회의 동적인 황홀함에 전율하였고,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추며 쾌락에 빠져드는 흥분에 휩싸였다. 이후 엠마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여 신경성 발작을 일으키는 등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오자 의사의 조언대로 용빌이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엠마의 건강 회복을 바라며 거처를 옮겼지만 남편의 의도와는 달리 그녀는 새로운 환경에서 권태를 이겨낼 방안을 모색하던 중 공증인의 서기 일을 하는 레옹을 만나 연정을 품게 되었다. 소심한 겁쟁이인 레옹은 엠마가 풍기는 묘한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도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못한 채 파리로 법률 공부를 하러 떠나버렸다. 비밀스런 만남을 즐기며 연애하고 싶음 마음이 강했던 엠마가 받은 상처는 컸지만 호색한 로돌프와의 격정적인 만남으로 그동안 고독한 결혼 생활이 주는 괴로움을 상쇄해갔다. 교묘한 언변과 기교로 엠마의 마음을 사로잡은 로돌프는 대담한 밀회를 즐기며 그녀와 열락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지금의 권태로운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컸던 엠마는 둘이 딴 데로 가서 살자고 약속했지만 로돌프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믿었던 이의 거부로 그동안 쌓은 사랑이 수포로 돌아가자 상심에 젖어 앓던 에마가 우연히 극장에서 다시 만난 레옹과의 사랑에 불길을 당겼다. 엠마와 레옹은 둘만의 밀회가 주는 향락적 생활에 젖어들수록 채워지지 않는 뭔가를 채우기 위해 사치를 일삼았다. 걷잡을 수 없는 낭비벽을 버리지 못한 엠마는 자금이 고갈되어 물건을 살 수 없을 때면 약속어음까지 손을 대었다 지불 능력을 잃고 경제적 파탄을 초래하고 말았다.
로돌프에게 버림받고 다시 만난 레옹과의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돈을 쏟아 부어 회생 불능의 상태에 이르렀지만 레옹은 비정할 정도로 그녀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지 않았다. 자존심을 버리고 다시 만난 로돌프에게도 경제적 파산을 말하며 그에게 경제적 지원을 요청해봤지만 어느 누구도 나서서 도움을 주지 않았고, 엠마의 소비 심리를 간파한 속물의 이기심에 굴복한 엠마는 음독자살에 이르고 말았다. 죽어가는 엠마를 지켜보던 샤를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면서도 아내의 장례 절차를 밟아갔다. 아내를 떠나보낸 뒤 절망과 비탄에 젖어있던 샤를이 우연히 로돌프의 연서(戀書)를 발견한 뒤 혼란은 가중되었고, 아내가 남긴 부채를 갚아가기에도 힘에 부쳤던 그 역시 자살하고 말아 부부의 한 점 혈육인 베르트는 혈혈단신으로 노동의 길을 걸어야 하는 운명에 놓였다.
세밀한 배경 묘사로 엠마와 샤를이 사는 동네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리며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생활 반경이 그려지길 바랐던 것은 비극적인 결말을 가늠해서일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욕망으로 현실적 삶을 중시하는 생활인으로 살 수 없었던 엠마의 습성은 오래 전부터 읽어 온 낭만주의 소설에서 기인하였는지도 모른다. 개연성 있는 허구로 가공된 세계를 현실적인 생활과 일치시킴으로서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살고 싶은 생각이 강해 기존의 윤리적 질서까지 파괴하는 일을 서슴지 않은 보바리는 한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였다.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생각 없이 돈을 끌어다 쓰다 종국에는 빚더미에 올라 채무를 이행할 수 없어 죽음으로 마무리한 그녀는 자본주의적 병폐를 숙명처럼 안고 살다 간 비운의 인물이었다. 현재적 삶에 만족하지 못한 만큼 욕망하는 세상은 환영처럼 머릿속을 부유하는 것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쏟다 파멸에 이르는 어리석음을 범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기쁨으로 밋밋함을 채워 다양한 빛깔로 변주하는 생활 속 리듬을 찾아 균형 있는 생활을 이어갈 때 권태는 우리 곁에서 물러날 것이다.
마담 보바리에게 사랑이란 언제나 낭만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했다. 화려하고 섬세하면서도 눈에 뻔히 보이는 비극에 자신을 던질만큼 비이성적인, 그래서 낭만적인 사랑. 그녀는 항상 로맨스 소설책에 나오는 낭만적인 사랑이 자신의 것이 되기를 바랬고, 결국 그 사랑 때문에 죽었다. 그녀는 꿈을 이루지 못했으며 남은 가족들 역시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견 마담 보바리는 쾌락과 허영에 눈이 멀어 불빛으로 돌진하는 어리석은 불나방에 지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뭇 사람들이 여성이 지녀야 할 정숙한 태도에 대한 자기반성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의 원류를 따라가다 보면 마담 보바리에 대한 평가는 조금 달라진다. 아르놀트 하우저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낭만적 사랑은 당시에 엄숙주의로 극에 달했던 성적인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라고 말한다. 기사들은 주군의 부인이 지닌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그녀에 대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낭만적이고 절절한 수사로 표현했다. 즉, 이 사랑의 찬가는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던 주군의 부인을 향한, 금지된 고백이었다. 낭만적 사랑은 그 태생부터가 현실과 자아 사이의 고뇌, 그리고 사회적인 금기에 대한 전복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낭만적 사랑은 집안끼리의 계약으로만 여겨지던 결혼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거부하고 연애결혼을 선택하는 계몽주의자들의 상징으로서 그 전복성을 유지했다.
이러한 낭만적 사랑의 전복적인 속성은 '마담 보바리'에서는 사회적인 금지, 즉 일부일처제로 표방되는 배타적 섹슈얼리티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 마담 보바리(엠마)는 소설 속 귀부인들의 낭만적인 사랑을 자신의 이상향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이상향을 위해, 특히 여성에게는 사회적으로 철저히 금기시되는 비배타적 섹슈얼리티를 적극적으로 실현한다. 그녀는 낭만적인 사랑을 원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소설책의 귀부인과 동일시하며, 그들에 비해 진부하고 남루해 보이는 자신의 현실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녀의 인생은 허영심과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금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 된다.
엠마가 알고 있던 사랑은 소설 속의 것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소설들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성적인 접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슈얼리티적인 관계는 그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래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정숙함'이라는 가치 역시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담 보바리'가 지닌 맹점은 엠마가 걸아갔던 전복의 경로를 단순히 한 여성의 일탈적인 행동으로 치환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녀의 전복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그 실패는 그녀의 허영과 문란함에 대한 처벌이며, 결말은 독자에게 배타적 섹슈얼리티라는 사회적인 가치를 따라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만약 문란함이 처벌 받아야 하는 속성이라면 그녀보다 더욱 문란한 생활을 했던 로돌프는 왜 무사한 것인가?
질문을 화작해 보자. 엠마는 비난 받아야 하는가? 비난 받아야 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에게 한정적인 역할만을 부여했던 당시의 사회이다. 그녀는, 여성이기 때문에, 활동 영역이 가정 내로 제한되었고,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었다. 그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소설뿐이었다. 엠마에게 소설 속 귀부인들은 자유로운 주제, 자신의 욕망의 충실하고 그래서 그 결실을 향유하는 독립적인 주체로 비춰졌다. 물론 낭만적 사랑을 위해 사는 귀부인들 역시 현재의 시각에서는 수동적인 여성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들은 당대의 다른 여성들과는 달리, 자신이 살아할 사람을 선택할 수 있었고,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행동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엠마는 생물학적인 조건에서 비롯한 억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고 싶어 했고, 그 수단은 낭만적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진취적인 자아와, 그녀가 무기로 택한 낭만적 사랑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전복적인 속성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당시 여성들은 정숙해야 했고 가부장적인 권위는 계속해서 신성한 것으로 여겨져야 했기 때문이다. 배타적이지 않은 섹슈얼리티는 사회의 근본을 흔드는 행위였으며, 엠마처럼 현실에 순응하지 않는 여성은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무대에 세우고 본보기를 보여 주기로 했다. 처음부터 엠마의 사랑은, 그리고 사회에 대한 그녀의 전복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낭만적인 사랑은 허영심과 눈먼 쾌락의 산물로 그려져야만 했다. 또한 그녀가 죽은 뒤에도, 가족들은 그녀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고난을 겪어야 했다. 즉, 마담 보바리의 비극적인 결말은 예정된 수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엠마가 충분히 교육 받았다면, 그래서 그 모든 억압과 금기를 거부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었다면, 그녀의 용기가 다른 형태로 구분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낭만적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신데렐라 서사가 아니라, 자아와 금기 사이에서의 혼란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전복적인 에너지이다. 맨 처음, 주군의 부인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그 에너지, 계약 결혼을 거부하고 스스로 사랑하는 이를 선택했던 그 에너지, 여성이 아니라 한명의 인간이 되고자 정숙함이라는 사회적 가치에 반기를 들었던 그 에너지. 한 개인으로서 엠마가 겪어야 했던 실패의 처절함은, 그러나 집단적 정체성의 측면에서 의지의 결과로서 그 가치를 획득한다. 그리고 이제야 '마담 보바리'는 그 의의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엠마의 맹목성은 자아를 찾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인 동시에, 억압받는 이들이 기꺼이 자신이 뒤를 따를 수 있도록 격려하는 확고한 신념인 것이다.
정말 유명한 고전을 읽을 때 번번이 곤욕스러운 이유는
내가 대부분 굵은 사건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얼마 전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을 때,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를 죽이고,
소냐를 만나 죄를 고백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해서 8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아니 라스콜리니코프는 대체 언제 살인을 하는 거야?
(작가는 그 사건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묘사들을
늘여놓는지 모른다.)
혹은 대체 언제 소냐를 찾아가 죄를 고백하지?
등의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마담 보바리]도 마찬가지였다.
엠마가 지루한 삶의 도피로써 불륜을 저지르는데
그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무려 200페이지를 넘겨야 했다.
굵직한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묘사하고 설명하고 표현하는
작가의 인내심만큼이나
고전을 읽을 때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마담 보바리를 읽고
보바리 부인이라는 소설의 제목을 보면서 서양의 이름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서 이름을 바꾸게 되고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게 만드는 느낌으로 정체성을 넘어서 존재감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하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보바리부인은 어릴쩍 수녀원 학교에서 공부하다보니 스스로가 사랑이란 것이 환상 아니 소설속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존재로 다가와서 진정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인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체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그녀이다
어찌보면 갇혀진 규율속에서 공부하고 있다보니 세상을 제대로 보는 공부를 못하는 것은 과거나 현재나 같은 것 같다.
그녀는 시골에서 의사생활하는 남자를 보는 순간 사랑이라고 느껴지는 감정을 믿고 사랑이라 인지를 하게 된다
기어이 결혼을 진행하게 되고 그녀는 그것이 사랑을 해서 결혼했다고 생각하고 그녀는 그것이 당연한 행복이라고 느끼는 그녀다
그저 고향보다 큰마을의 의사 샤를르의 청혼이 그녀를 흔들었고 그것이 환상과 어울려서 그것이 사랑을 통한 출발이라고 믿은 그녀였다. 현실속의 결혼은 그녀의 환상을 달리 와닿게 한다
.
상상속 남자는 남편과 다르다는 것이 그녀를 불륜으로 몰고 가게 만든다. 남편조차도 아내를 상랑하는 방법을 모르기에 서로 어긋나게 만드는 것이다.
불륜을 그녀를 파탄속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동기였고 그녀의 사랑이 욕정을 만들었으나 서로가 시간이 지나면서 권태가 다가오고 다른 사랑의 로돌프의 흑심에 빠진 엠마는 육체적 사랑조차도 감미롭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그 사랑이 들키게 되면서 돈으로 무마하기 위해 사치와 낭비 그리고 파산으로 가는 위치까지 가게 된다.
소설을 결국에 그녀를 자살로 몰고 간다.
그녀를 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코 우리가 그러한 스스로의 환상으로 만들어진 대상으로 그것을 대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생각도 해봐야 하고
스스로 우리가 어찌 대상을 대하고 있는지 고민도 해보아야 한다
보바리 부인의 불륜을 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우리가 어찌 살아가는지 생각하는 관점을 한번 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고전의 시각이라는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인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