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분만 시간 내서 알아두면 후회하지 않을 작가"
조라 닐 허스턴(Zora Neale Hurston)
-오프라 윈프리로 하여금 영화제작에 뛰어들게 한 작가
-1925년 명문 바너드 컬리지에서 인류학을 공부한 유일한 흑인 여성
-흑인을 위해 정치적인 글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흑인 남성 작가에게 비판받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작가
-"천재를 내다 버린 것"이라며 흑인 사회를 비판받게 한 작가
-<타임>지 선정 '1923년 이후 출판된 100대 영문 소설'을 남긴 작가
- 가난과 병에 시달리고 묘비명도 없는 묘지에 묻혔다가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은 작가
-본인 이름으로 매년 축제가 열리는 작가(미국 이튼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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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을 알고 싶으면 그곳에 직접 가봐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른 어떤 사람도 그걸 알려주고 보여줄 수 없어.
다음 두 가지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해야 해.
하느님을 찾아가는 것과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찾아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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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디서나 똑같은 것이고 만나는 모든 것에
똑같은 영향을 미치는 맷돌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해줘.
사랑은 바다 같아.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지만
가 닿는 해안에서 모양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어떤 해안에 닿느냐에 따라 모양이 다 달라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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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본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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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멈추지 않고 단숨에 끝까지 읽었습니다. 읽고 나선 그녀가 왜 흑인 남성 작가에게 비판을 받게 되었는지, 왜 흑인 사회가 '천재를 내다 버린 것'이란 비판을 받게 되었는지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소설은 1920년을 배경으로 하며, 남북전쟁 후 자유를 얻은 흑인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흑인 여성 재니의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흑인들이 자유란 스스로 무엇을 만들고 그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말할 때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
> 억압하는 백인이 없기에 흑인과 흑인이 서로 시기하는 모습,
> 눈치보지 않고 유희를 즐기고 싶어하는 마음,
> 먹고 사는 것이 편해지자 인간의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는 모습,
>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서 사회적 가면을 인식하는 모습 등
이제 막 노예의 신분을 벗어난 흑인들이 자유인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며 보이는 실수나 어설픔이 드러납니다. 이런 모습들이 당시 흑인 남성 작가에겐 흑인을 희화화한다고 보일 수 있었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인류학적 시선과 문학적 감성으로 인종 문제, 사회 문제, 인간 본연의 마음까지 절묘하게 그려내는 조라 닐 허스턴의 글은 정말 천재적이라고 할만 합니다.
또한 민속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흑인들의 민담, 속담까지 아주 자세하게 표현한 점도 매력적입니다.
더불어 이 모든 것들이 어렵지 않고 자극적이며 아름답기까지한 시적 표현들로 이루어져 우리가 그 의미를 생각하기 전 머리속에 메시지가 먼저 전달되기도 하구요.
^^
조라 닐 허스턴, 그녀의 삶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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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라 닐 허스턴(Zora Neale Hurston)
허스턴은 1891년 앨라배마 주 노타설가에서 태어났고 세 살 때 침례교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 최초의 흑인 자치 도시인 플로리다의 이튼빌로 갔다. 허스턴은 이튼빌을 자신의 고향처럼 생각했고 이곳이 자신의 출생지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중에 이튼빌의 시장이 되었고 이튼빌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그녀의 작품들에 여러 가지 형태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재혼한 아버지에게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한 허스턴은 고학으로 하워드대학과 바너드 컬리지를 졸업했다.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그녀는 인류학자로서 마거릿 미드 같은 유명한 인류학자들과 함께 흑인 민속을 연구하기도 했다. 허스턴은 1927년에 재즈 음악가이자 나중에 의사가 된 허버트 쉰과 결혼하지만 1931년에 헤어졌고, 1939년에 25살 연하의 앨버트 프라이스와 결혼하지만 7개월 만에 헤어졌다.
1925년에 허스턴이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할렘 르네상스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허스턴은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와 월리스 서먼(Wallace Thurman) 같은 작가들과 함께 《파이어!!(Fire!!)》라는 문예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고 카리브해와 미국남부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문화적 관습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1934년에는 소설, 《요나의 박 넝쿨( Jonah ’s Gourd Vine)》을, 1935년에는 민담의 고전으로 간주되는 논픽션 《노새와 사람들(Mules and Men)》을 출간했다. 1937년에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가 출간되었고 1939년에는 《모세, 산의 사람(Man of the Mountain)》이 출간되었지만 이 작품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허스턴의 동시대 흑인 남성 작가들은 허스턴이 작품에 흑인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백인들의 취향에 부합해서 흑인 문화를 희화화했으며 허스턴의 작품에 정치적인 주제가 없다고 비판했다.
당시 랠프 앨리슨(Ralph Ellison) 같은 흑인 작가들은 흑인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노골적인 정치적 용어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룬 《그들의 눈을 신을 보고 있었다》 같은 작품은 이런 투쟁에 적합하지 않았다. 허스턴은 말년에 투병 생활을 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살다가 1960년 플로리다의 한 복지원에서 심장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여러 가지 정치적・사회적 이유로 몇십 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던 허스턴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나게 된 것은 1970~198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여러 대학에 흑인 문화 강좌가 개설되면서 흑인 문학을 연구할 수 있는 학문적 분위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메리 헬렌 워싱턴( Mary Helen Washington), 오드르 로드(Audre Lorde), 앨리스 워커 등이 이끄는 흑인 페미니즘이 점차 부상하면서 허스턴을 재발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났다. 앨리스 워커가 《미즈(Ms)》 매거진 1975년 3월호에 쓴 ‘조라 닐허스턴을 찾아서’라는 기사는 허스턴을 재조명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앨리스 워커는 1970년대 초 어느 백인 민속학자가 쓴 에세이를 읽다가 허스턴이 마이애미의 어느 이름 없는 묘지에 묻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곧바로 허스턴의 무덤을 찾아나섰고 이 과정을 글로 써서 발표했다. 이 글에서 워커는 흑인 사회가 허스턴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천재를 내다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1977년에는 로버트 헤멘웨이(Robert Hemenway)가 국가 보조금을 받아 허스턴의 전기를 썼고 1978년에는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가 재발행되었다. 1975년에는 현대언어협회에서 허스턴을 집중적으로 다룬 특별 세미나가 개최되었고 1981년에는 모건주립대학에 조라 닐 허스턴 학회가 설립되었다.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들과 내용을 담고 있는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차츰 미국 흑인 문학과 여성 문학에서 독보적인 작품으로 간주되었고 이제는 문학 의 고전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작품은 2005년에 《타임》지가 ‘1923년 이후 출판된 100대 영어 소설’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여성의 지위가 상승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역시 조선 시대를 거쳐 개화기를 지나 지금은 문명화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아선호사상이 존재하고 직장내에서, 가정내에서,,그리고 곳곳에 차별이 존재한다.
흑인, 그것도 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도 예전과 같지는 않지만 백인으로 남자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분명 차별이 존재하고 힘들 것이다.
흑인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차별받고 억압받았던 시기의 여성의 모습을 그린 책을 발견했다.
'조라 닐 허스턴'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라는 책이다.
대학을 다닐 무렵 유일한 흑인여성이었다고..
책을 쓰고 문명에 관심이 많았지만 어린 남자아이를 추행했다는 오명을 쓰고 힘겹게 노년을 보내다 생을 달리했다.
흑인 여성 소설가들의 행보를 이끈 최초의 흑인 여성 소설로 인정받으며 대학의 교양 필독서로 읽힐 정도인 이책....
어떤 내용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엄마 아빠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 할머니 손에 자란 재니는 할머니가 일하는 집의 백인 아이들과 어울려 자라며 여섯 살이 되어 사진에 찍힐 때까지 스스로가 흑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다.
할머니는 학교에 다니며 시샘받고 상처받는 손녀를 위해 새롭게 집도 마련해 줄 정도로 애정을 가진 분이었다.
늙어가는 할머니는 그녀가 좋은 사람을 만나 의지하기 바라고 아픈 그녀의 과거를 들으며 재니는 삶에 순응하기로 한다.
결혼생활은 사랑으로 이어져도 쉽지는 않다.
워낙 변수가 많기에 사랑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도 많은데 그래서 어른들은 비슷한 환경의 사람들과 결혼하라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재니에게도 결혼 생활이 쉽지만은 않다.
요리를 잘했지만 빵이 부풀어오르지 않고 생선 뼈 부분이 익지 않았다고 고막이 터지도록 맞은 후 그녀의 마음 속 선반에선 뭔가가 떨어져나가 버린다.
열살이나 많은 남편 조디는 콩팥에 문제가 생기고 장례를 치른 후 그녀는 주변에서 재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된다.
혼자 살기엔 너무 젊고 예쁜 그녀..
그녀보다 나이가 어린 티 케이크를 만나며 주변의 시샘과 관심을 온 몸에 받는다.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삶이란 이런 것이란 것을..
어쩌면 이런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 모든 여자들에게 내려지는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 남자.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버림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진정하게 그로 인해 구원받았다.
그로 인해 그녀가 행복하고 삶이 윤택해졌고 또 앞으로 힘들어질지라도 그녀가 선택한 삶이 후회는 없을 거라는 걸 책을 덮으며 느낄 수 있었다.
당신들은 오늘날의 세상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는가? 당신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만족스
러운가? 아니면 불만스러운가? 그것의 답은 물론 단순하지 않다. 분명히 그 답은 각각의 가
치관과 현실의 갭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갈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때 세
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싫어하고, 저항한 '세상의 부조리'가 엄연히 존재했고, 또
그 부조리를 통해서, 인간은 스스로를 계몽시키고 더 나아가, 과거 낡은 국가관과 고정관념을 파
괴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아왔다. 때문에 오늘날의 세상에는 과거에 만연했던 부조리가 상당히
개선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를 '문명인' 이라고 자부 할 수 있을 만큼의 법
률과 도덕심이 잘 구축되어 있다. 이제 이 세상에는 '폭력' '성차별' '인권유린'은 분명한 '잘못
' 이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시대의 흐름을 보면, 인간은 분명하고 활실하게 인도주의적 입장에 서서, 세
상을 변화시켜 오고있다고 정의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조금 반대로
해석하면, 과거에는 우리들이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당연시 되었으며, 인간은
그 오랜시간 동안 그 잘못을 받아들이며 살아왔다는 정의도 함께 내릴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역사에는 많은 사건이 있었다. 한국에는 '동학운동' 미국에는 '남북 전쟁' 중국에
는 '태평천국' 등과 같은 많은 사건이 일어나,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개선을 외쳤고, 이 책의 주
제 이기도 한 (여성)흑인들에 대한 인권신장은 마틴 루터 킹을 포함한 인물들의 노력과, 당시의
현실을 바꾸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의 열망에 의해서 쟁취된 진득한 투쟁의 결과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의 주된 이야기(목적)은 당시 시대의 부조리였던 '흑인에 대한 차별이 존
재하는 사회와, 여성라는 이유만으로 자유를 억압받는 사회를 적나라하게 그려내며, 그
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하는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요인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제니의 삶 그 자체
이다. 그녀야말로 아름답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이상(理想)을 위한 방황' 이라는 단어
가 어울리는 삶을 살았고, 또 오로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위해서, '안정된 삶' 도 '부유
한 삶'도 모두 져버리고 도박꾼이자 무일푼인 티 케이크와 늪지에서 함께하는 것을 선택 함으로
서, 분명 현대의 사람들도 누리기 힘든 진정한 자유를 추구한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이 만들어진 '당시의 사회' 와, 소설이 "어쩨서 굳이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제니를 주인공으로 삼았는가?" 하는 이유를 생각하면, 어디까지나 그녀의 삶은 당시 여성들
이 꿈꾸었던 이상향에 불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소설이 등장한 이후 미국사회는
분명 제니와 같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서 점차 변화되어 왔다.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고, 사회진출이 본격화되었다는 오늘날의 현실이 분명히 이를 뒷받침 하지 않는가?
물론... 그런 제니도, 처음에는 흑인노예 라는 신분 때문에, 인생의 대부분을 짖밟히며 살았던 할
머니의 간청에 못이겨, 지극히 평범한 농부에게 시집을 간다. 그러나 그녀는 그 울타리가 만들
어준 안정의 틈바구니에선, 결코 자신을 위한 행복을 발견 할 수 없다고 결론을 짓고, 결국 자신
을 끔찍히 구애했던 조디의 품에 안겨, 결과적으로 시장(권력자)의 아내이자, 큰 상점의 안주인
이라는 신분을 얻게 되지만, 여기서도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행복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다.
따스한 보금자리가 만들어주는 안전한 울타리...그것은 어디까지나 할머니가 원했던 가치관이
였고, 권력자의 아내라는 신분 또한 조디가 멋대로 자신에게 달아준 성가신 명찰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제니는 조디와 함께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못한다. 그러나 남들은 그녀를 보
고 '아릅답다' '가장 부러운 인생을 산다' '가장 성공한 흑인 귀부인'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남편인 조디 또한 분명히 자신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는것이 사실... 그렇기에 제
니는 그렇게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가면서 서로 정을 함께 품어가면 좀더 만족스러울 것이라 스
스로 생각을 고쳐먹어보지만,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본심은 언제나 외롭고 슬픈 마
음을 우려낸다.
그렇게 꽃다운 16살을 시작으로 어느덧 40에 이른 제니는, 결국 남편 조디를 병으로 떠나보낸 가
장 부유한 '미앙인'이라는 신분을 새롭게 얻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 동시에 자신이 직접 스스
로 도박꾼이자,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인 티 케이크와 사랑에 빠지면서, 주위 사람들이 '정
말로 멍청한 짓' 이라고 말하는 행동을 하고야 만다. 바로 티 케이크와 결혼하여 상점과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그를 따라 '습지'로 이주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이40의 제니에게 있어
서, 티 케이크와의 삶은 언제나 행복하다.
티 케이크는 과거 2명의 남편이 미처 주지 못한 것을 주었다. 그것은 바로 '자유' 그는 제니에
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어울리고,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취미생활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자
유를 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제니만 바라보고 제니만을 숭배하는 열혈한 정열을 그녀에게 헌
상했다. 때문에 제니는 행복하다. 그녀는 따스한 집, 창고에 쌓아둔 막대한 재물과 베
이컨보다, 빈털털이와 함께하는 자유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