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토마스만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주말에 <베네치아에서의 죽음>과 <토니오 크뢰거>를 읽었다. 두 권 모두 중편인데 전자책으로 모아놓은 세트에 겹치기로 중복되어 있어서 골라가며 읽을 수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가 들어 있는 전자책은 세 권으로, 문예출판사 버전은 <토니오 크뢰거>를 표제작으로 환멸, 트리스탄, 마리오와 미술사까지 총 네 개의 중단편이 들어있다. 열린책들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표제작으로 글라디우스 다이(1902) , 트리스탄(1902) , 굶주리는 사람들(1902), 토니오 크뢰거(1902), 신동(1903), 힘든 시간(1905), 벨중족의 혈통(1905), 베네치아에서의 죽음(1912) 까지 총 7편이 들어있고, 마지막으로 현대문학에서 나온 토마스만 단편집 여기서 언급된 것 외에도 키 작은 프리데만 씨 행복에의 의지,타락,죽음,어릿광대,루이센,토비아스 민더니켈이 더 들어있다. 집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판으로 민음사의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 등도 더 언급할 수 있겠다.
전부터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알았는데 못읽고 있다가 우연히 펼쳤더니 중단편 분량이라 얼씨구나 시작했는데, 처음 읽는 토마스만이 뭔가 잡아끄는 듯한 힘이 있어서 토니어 크뢰거를 읽게 되었다. 특히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경우는 더 그런데, 두 권 읽고 작가의 전체를 언급하는 건 무리지만 두 권 모두 스토리상으로만 보면 사실 크게 드라마틱한 내용이 없이, 주인공의 자아가 일으키는 내적 상태와 욕망 갈등을 산문처럼 쓰고 있다. 따라서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 있는 작가일 거 같다. 내 경우, 먼저 읽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계기로 그 작가의 뭘 읽어도 후회 않을 안심 작가 목록 같은 거에 자동 등록되었다. 헤르만 헤세같이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을 받는 독일 작가도 많은데, 토마스만을 굳이 찾아읽게 되지 않았는데, 그 유명한 헤세도 제대로 읽은 게 없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사실 단편 소설에서 어떤 대단한 스토리를 기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100~200페이지 분량의 중편이라서, 나름 지지부진하게나마 스토리의 전개가 이루어지고, 결정적인 반전이 사소한 외부 사건을 계기로 주인공의 내면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스토리는 사건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가 만들어내므로 세세한 생각을 꼼꼼히 이해하며 읽기에 집중이 요구되었다. 100년전의 소설 답게 내면 묘사는 세세한 풍경 묘사와 더불어 이루어진다. 주인공은 주로 여행중이어서 이국적 혹은 낯익거나 낯선 풍경에 내면을 투사하는 경우가 많다.
소설은 토니오 크뢰거의 14세 16세 그리고 중년의 현재로 시간이 쪼개져있으며 단막단막 쪼개져서 공간적 배경이 바뀐다. 14세 소년 남국적 외모와 이름을 지닌 토니오 크뢰거는 금발 소년 한스를 사랑한다. 16세가 되어 사랑한 잉게는 이성이지만 한센과 마찬가지로 금발에 강철빛 눈을 가진 밝은 세계, 의심하고 고뇌하지 않는 밝고 쾌활한 세계에 속해있다.크뢰거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뮌헨은 남국이라 부르고, 유럽의 북쪽과 출생에서 소년 시절까지를 보낸 덴마크와의 국경 도시 루벡을 북국이라 부른다. 이러한 분류는 애초에 토니오 크뢰거가 사랑했던 대상들이 푸른눈과 금발, 이성, 쾌활함, 상냥함 등으로 자주 분류되는 북쪽을 상징하고 남쪽은 그 반대의 대척점으로 놓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설속에서는 소시민과 예술인을 남북으로 가르고, 이성과 열정, 쾌활함과 우울함, 냉정함과 광기 등의 속성을 심는다. 남과 어울리지 못하고 우울한 예술가 성향의 크뢰거지만 정작 자신이 동경하는 것은 금발머리의 환하고 순정적이고 착한(?)것들이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어쩌면 자신이 반쪽은 혈통으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며 그 속에 소속되어 있어야 했을 그 세계와는 정반대쪽의 세계에 속해있으며, 이제 그 속된 세계가 자신이 속한 예술가의 세계에서는 때로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안다.
시를 쓰는 것을 수치로 여겼던 크뢰거는 조금씩 그 대단하던 가문이 쇠락하면서, 자신 역시 그 금발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길을 가서 이제 대단한 문학가가 되어 있고, 그의 옆에는 연인인지 지인인지 애매한 관계의 예술가가 예술가들의 세계와 대화의 창이 되고 있다. 예술가란 무엇인가. 고뇌하고, 슬퍼하고, 밝은 빛 아래 어둠을 보고, 그것들을 열정적으로 표현해 내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정신적 고통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제 그 세계에서 인정받았고, 자신이 미운오리새끼처럼 따돌려졌던 푸른눈의 금발의 세계는 이제 잊어도 좋을 위치에 있다. 그럴까.
이제 그는 여행을 하고 있다. 자신이 떠나온 도시로 돌아가 자신을 알아보지만 존재감이 없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는 그 도시 주변을 맴돌며,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자신이 떠나온 도시에서 이방인이 되어 경찰에 잡혀갈 뻔한 상황을 떫떠름하게 여기며 발트해를 여행하는 크뢰거는 고독하다. 예술가에게 고독은 형벌처럼 따라다니는 짐일까. 어쩌면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도 그렇고, 아마도 내게 이 두 소설이 꽂힌 이유는 작가의 고독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화에서조차 그는 소통하다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침잠해서 스스로의 생각을 꺼내놓는 창구일 뿐이다. 대화에서조차 타인의 말은 자신의 말에 대한 반향으로 읽힌다. 그는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북쪽 출신의 대단한 가문의 아버지와 그가 닮았다고 생각하는 남쪽 출신의 정렬적인 예술가 기질의 어머니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간다.
처음에 열린책들 버전을 읽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나와 문예버전을 읽다가 또다시 이해가 안되는 버전이 나와 현대문학 버전을 읽다가 했는데, 비교를 해보려고 퍼온 부분을 공개해보면 이렇다. (스포에 해당되기 때문에 주의).
내 그대들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그는 스스로 반문했다. 천만에,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한스, 너도 그렇거니와 금발의 잉게, 너 역시 잊은 적이 없다! 내가 일을 했던 것은 그대들 두 사람 때문이었고, 내가 박수갈채를 받을 때, 너희들이 그 속에 섞여 있지나 않을까 남 몰래 돌아보곤 했다……. 네가 네 집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약속했던 《돈 카를로스》를 이제 읽어보았느냐? 한스 한젠, 그런..고독해서 우는 왕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너는 시(詩)와 우울을 넋 잃고 들여다보다 네 맑은 눈을 흐리거나 꿈꾸듯 몽롱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다시 한번 처음부터 시작해서 너와 같이 자라나고, 마음을 곧고 즐겁게, 그리고 순박하고, 올바르고, 질서 있게, 신(神)과 사람들과도 뜻이 맞아 순진하고 행복한 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리고 잉게보르크 홀름, 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한스 한젠 너 같은 아들을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인식(認識)과 창조의 고뇌라는 저주를 벗어나 복된 평범함 속에 살고, 사랑하고 찬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문예출판사 /강두식역)
예술과 생활의 병존
지난 해 가을
책 소개를 서둘러 달라는 말을 듣고 나는 왜 이 책이 떠올랐을까? 멋진 인문학 강의 책이나 소개하여야 할 텐데, 고작 소설이라니? 그것도 고리타분한, 1세기도 훨씬 넘은 옛적의 책을 들먹이다니….
오로지 내 사랑의 집착 때문이다. 스무 살이 갓 넘은 나는 대학에도 두 번씩이나 낙방하고서도 아직 세상의 두려움을 몰랐다. 오히려 가을 새벽에 어쩌다 잠이 깨어 바라본 이웃집 지붕의 빨간 색이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고매한 가치를 힘써 말해주고 있다고 자신하던 중이었다. 그때 나는 이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바그너의 음악을 미친 듯이 좋아하던 때라 잘 맞아떨어지기도 했지만, 이 책은 예술적인 삶과 일상생활의 병행을 과감히 차버리는 용감하고 상쾌한 책이었던 것이다.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즐거움과 기쁨들은 이 아름다운 어두움과 비애에 감히 대적하지 못하리라.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어야 하며, 고뇌를 껴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빨간 청춘의 색깔을 뒤집어쓴 나는 토니오 크뢰거를 가슴 속 깊이 사랑했고, 그를 알지 못하는, 아니 관심도 두지 않는 뭇사람들의 저급함을 비웃었다.
이제 나이 육십을 바라보는 이때, 이 책을 다시 읽고 싶고,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지 궁금하다. 20대 이후로 나는 이 소설을 접하지 않았다. 몇 해 전부터 딸의 서가에 꽂혀있는 걸 보면서 잠시 가슴이 설레었지만 꺼내어 읽지는 않았다.
새해 어느 겨울
긴 추위 끝에 오늘은 날씨가 좀 풀려서 좋다. 담벼락에 비치는 겨울 햇살이 너무 여려 애처롭다. 그래도 저 담에 기대어 눈감고 잠시 하늘에 내 뺨을 내밀어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조용히 추상할 시간만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텐데 너무 여유가 없다. 우리 일상은 마치 금방 사라질 듯 조심스럽게 내비치는 저 겨울 햇살과 같다.
감수성이란 세상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방해한다. 아침에 차창에 부딪는 희푸르스름한 겨울 하늘을 보면서 생각에 빠져 버린다. 말도 안 되게, 쓸데없는 생각 속으로 끌려들어 가 허우적거린다. 책상 앞에 앉을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 허황한 생각과 느낌 속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출근하면서 오늘 할 일에 대해서 정리해볼 시간을 어김없이 빼앗긴다.
"삶에서 90%가 절망이어도 10%의 희망에 주목하라."
신문에서 본 어느 기업 회장의 광고 문안이다. 그들의 밝음 지향적 삶에 숨이 막힌다. 나는 우울하여 그런 희망에 주목할 자신이 없다. 절망이 전부인 삶을 응시하느라 쉽게 희망에 웃을 수는 없다.
세상에는 한스와 잉에 같은 사람들이 환영받는다. 그들은 아름답고, 건강하고, 유용한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토니오 크뢰거가 멋진 한스를, 아름다운 잉에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데도, 그들은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금발의 훤칠한 한스와 아름다운 잉에는 유쾌하게 깔깔거리며 멋진 춤을 즐기기만 한다. 그들은 재미없는 철학적 소설 이야기나 중얼거리는 토니오를 그저 가여워서 따뜻하게 대해줄 뿐이다. 토니오는 자신의 방식으로는 잉에와 한스에게 동정만 살 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입술을 깨물며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과 같이 환하게 웃으며 가벼운 농담을 하거나 장난칠 수는 없다. 그런 일은 또 토니오에게 고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그들 둘이서 밝게 웃으며 대리석 회랑을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 세계의 밝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는 고독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은 남몰래 어두운 뒤뜰의 의자에 앉아 문학이나 할 수밖에 없다고 중얼거린다. 토니오 같은 이는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패배자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예민한 감수성을 천형처럼 지닌 사람은 생활에서 성공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생활에서 그것들은 몹시 거추장스러워 다른 사람들을 침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멸적 절망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생활에서는 10%의 희망으로 집을 짓고, 빵을 만들고, 가엾은 사람을 보살펴주는 건강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대가로 그는 이 세상을 유형 당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운명으로 선택한 길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의 기쁨은 저 밝은 세상 사람들에게 바치고, 자신은 지극히 깊고도 아득한 또 다른 사랑을 광야의 선지자처럼 목놓아 외쳐야 한다.
이튿날
겨울 속의 봄이다. 짧은 따스함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진다. 날이 풀리면 하려고 했던 일, 세차하기, 베란다 청소하기 같은 일들을 잠시 접어두고 따스한 볕 아래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어제의 상념에 다시 빠져든다.
예술가들은 특별한 종족이어서 생활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에다 정말이지, 동의하고 싶지 않다. 지난 19세기식의 영웅주의에 빠진 논리다. 그래, 바그너 음악을 듣지 말아야지. 그것들은 몽유병자처럼 혼자 영웅이나 된 듯이 숭고함에 도취하여 듣는 음악이다. 대중들과 웃고 울면서 그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일에 미쳐버려야 한다. TV 드라마 이야기를 오늘 아침에 처음 만난 사람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관해서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 삶을 더 멋지게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둘 중 하나다. 예민할 것인가? 아니면 건강할 것인가? 내가 사랑하는 처녀와 결혼하여 예쁜 집을 장만하고 재산도 불려 알콩달콩 잘 살 것인가? 아니면 그 처녀에게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Liebestod]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살아갈 것인가? 지루해서 춤이나 추자고 하다가 결국은 도망가버릴 그녀에게….
너무 비극적인 세계관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커피를 마시면서 사랑의 죽음을 듣고 함께 약 1시간 정도만 이야기한다면 그녀에게 오히려 멋지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아하고 세련된 19세기 영국 귀족들처럼, 풍요롭고 진취적인 20세기 미국 중산층 가정처럼. 충분히 예술적 감수성을 달랠 시간을 가지면서도 생활을 멋지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생활의 방편으로 예술을 사랑하면 될 것이 아닌가?
토니오 크뢰거, 이놈의 책을 저 낡은 서가에서 다시는 끄집어내지 말아야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쿨'한 맛에 길든 우리가 이따위 낡은 생각 속에 빠지는 것은 못난 짓이다.
아,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하다. 이제 이 조그마한 겨울 양지 녘을 박차고 나가야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해야지. 단 1시간 동안만. 그 뒤에는 같이 빨래를 하는 거야. 음식도 만들어야 하잖아? 할 일이 참 많지. 그러고 보니 생활이 예술의 한 방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생활과 예술은 병존하는 거야. 아니 같은 거야. 그렇지 않니?
진정한 예술가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걸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 인생을 통틀어 가장 예술가적 삶을 살고자 추구했던 인물로 토마스 만이 좋은 예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192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헤르만 헤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더불어 20세기 독일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이 책은 토마스 만의 단편을 모아놓은 단편 선집이다. <토니오 크뢰거>, <환멸>, <트리스탄>, <마리오와 미술사> 이렇게 총 4편이 실려있다. 그중에서 <토니오 크뢰거>는 작가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추구하는 예술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다. 토니오 크뢰거라는 주인공을 앞세워 그는 '예술가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폭넓게는 인간에 대한 진리 탐구가 이뤄지는 듯하다. 그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가도 곧 인간이기에 이 둘의 차이를 별개로 바라보지 않는 듯하다.
고전 작품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해석이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듯하다. 토마스 만이 추구하는 예술가적 문학관이 작품 전체에 담겨 있다고 하는 <토니오 크뢰거>를 이해하기 위해 3번을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어 내려갔다. 전체적인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 한번,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옮긴이의 해제를 읽은 후 한번 그리고 토마스 만의 삶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여전히 어렵게만 느껴진다. 미처 발견하지 못 했던 어느 문장에서 또 다른 나름의 해석이 이뤄진다. 작품을 읽으면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 3명의 토니오 크뢰거를 만난 듯하다. 시를 쓰며 일찍 문학적 감성을 보여주는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은 다른 듯한 어린 토니오 크뢰거, 당당한 한 사람의 예술가로 성장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연도 하고 그의 작품을 드러내는 작가 본연의 모습이 투영된 예술가 토니오 크뢰거, 예술가적 삶을 떠나 인간으로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 자신이 태어났던 고향으로 회기 하는 인간 토니오 크뢰거.
<토니오 크뢰거>라는 작품은 일생을 예술가적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토마스 만의 혼이 담겨 있기에 그의 전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그의 인생관과 예술관이 모두 담겨 있기에 그런 평이 내려진 게 아닌가 싶다. 빙산의 일각이지만 토마스만의 세계관을 이해했으니 이제는 나머지 단편들을 읽어볼 차례가 된 걸까. 두렵기도 한 반면 기대도 되면서 설레기도 한다. 다시 한번 고전 읽기에 빠진듯하다.
토니오 크뢰거 , 토마스 만
독일의 소설가인 토마스 만의 단편집을 읽었다.
그가 유명한 이유는 여러 가지 꼽을 수 있는데 나에겐 제일 첫번째 이유가 바로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라는 것이다.
그가 수상한 노벨문학상 작품은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이다.
그는 평론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토마스 만의 자전적 내용의 스토리가 담긴 [토니오 크뢰거]는 철학적 고뇌와 현실 세계와의 괴리에서 오는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을
주로 다루고 있어 사건보다는 감정 묘사에 치중하는 성격을 띤다.
소설의 제목 [토니오 크뢰거]는 느낌 그대로 주인공의 이름이다. 소설의 중간 중간 마다 주인공 이름이 가지는 특이함과 불편함을 자주 언급하곤 한다. 이름이 주는 비범함이 결국 타인과는 다른 구별성을 띠게 하고 그것이 더 나아가 성격과 환경, 대중과 섞이지 못하는 나름의 변명으로 작용한다. 그는 이름만 특이한 것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남들과 다른 시각을 가졌고 그것이 융화를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토니오는 그런 이유를 독일의 북쪽 지방 출신의 이성적인 아버지와 남쪽 지바의 정열적인 어머니의 양극화된 성격의 피를 동시에 물려받았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토마스 만을 평가할때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언급하는 태도는 그의 탁월한 식견과 세련된 언어라는 점이다. 책을 읽으면서 토마스 만이 지나치게 그런 점을 도드라지게 표현하려는 의도를 보게 된다. 그가 활동했던 시대나 그 이전 작가의 글들을 보면 그런 특징을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토마스 만도 작가로서 사실적 묘사, 정서적 표현에 정성을 쏟는다. 토마스 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토니오 크뢰거] 뿐 아니라 다른 작품도 읽어 보아야 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분류되는 또 다른 작품인 [트리스탄]은 흥미로운 전개로 읽는 시간이 즐거웠다.
[토니오 크뢰거]에서 리자베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특히나 그의 정신적 세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 토니오는 봄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한다.
"문제는 제가 봄에 대해 부끄럼을 탄다는 점이지요. 봄의 순결한 자연성이며 그 모든 것을 물리칠 수 있는 청춘을 그만 부끄러워한다는 점입니다."
그의 계절에 대한 부끄럼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정확하게 와닿았다.
토니오는 그와 리자베타와의 대화에서 또는 편지에서 그의 내면세계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가 인생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서민적인 것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애정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토니오 크뢰거]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토니오가 마음에 품었던 두 사람인 한스와 잉게보르크를 우연히 만난 장면이다.
한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조금은 특별한 설렘으로 그들을 마음에 품었었는데 그 둘이 연인이 되어 삶의 어느 한 장면에 맞딱뜨려진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때 속절없는 사랑의 고민을 맛보게 했던 두 사람이다. 그 두사람은 종족과 유행이 똑같고 청순하고 명랑하며 자신만만한 동시에 소박하였다. 한번도 잊은 적 없었던 두 사람과의 조우, 그는 이렇게 되뇌인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시작해서 너와 같이 자라나고, 마음을 곧고 즐겁게, 그리고 순박하고 올바르고 질서있게, 신과 사람들과도 뜻이 맞아 순진하고 행복한 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리고 잉게보르크 홀름, 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한스 한젠 너 같은 아들을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인식과 창조의 고뇌라는 저주를 벗어나 복된 평범함 속에 살고, 사랑하고 찬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 몇줄의 문장이 토마스 만의 진정한 내면적 고백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토니오 크뢰거]는 소설의 내용이 끝날때쯤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가 되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읽는 내내 진도가 안나가 불편했음에도 다 읽고 나서는 왠지 아쉬워 이별을 하고 싶지 않아 자꾸 뒤돌아보게 했다.
그런 매력이 있는 책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EBS 최다니엘의 낭독<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을 먼저 들어보았다. 그래서인지 흥미를 가지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토마스 만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은 처음이다. 해설을 읽고 난 후 '내가 읽은 책이 딴 얘기야, 뭐가 이렇게 형이상학적이야. 해설이 더 어렵다' 하고 투덜거렸다. 내가 느낀 것이 토마스만이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책이란 독자를 만나야 완성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토니오 크뢰거> 외에 <환멸> <트리스탄> <마리오와 마술사> 4편의 단편소설이 들어있다.
'토니오 크뢰거'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시를 쓰는 소년이다. 자신이 남다른 재주를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며 말이다. 어린시절 아름다운 소년, 소녀인 한스와 잉게를 동경하며 지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고향을 떠나게 된다. 성인이 된 후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지만 세상의 여러가지 사조를 비웃으며 어디에도 잘 적응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화가 친구인 리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분출구다. 어느날 덴마크로 여행을 간다. 자신의 고향, 자신의 집을 구경하고, 옛 이웃을 만나도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현상수배자로 오해받으면서도 자신을 밝히지 않고 자신의 직업만을 밝힌다. 그리고 휴양지에서 춤추는 무리들 속에서 옛 친구 한스와 잉게를 우연히 발견하지만 그들이 바라보고만 있을 뿐 그들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자신을 먼저 알아봐주기만을 바라며 회한에 젖은 눈물만 흘린다. 그리고 리자에게 자신이 정말로 바라는 인생이란 무엇이었는지 예술가다운 편지를 쓴다.
<토니오 크뢰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던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으로 어리석게 보내버린 인생에 대한 후회에 대한 부분이다. 지인들과 식사를 하며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또한 그렇지 않은가 수많은 sns의 자기자랑으로 엄지를 모으는 사람들 그리고 엄지를 누르며 자기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는 매우 잘 살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다. 그리고 인정받고 싶다. 토니오 또한 한스와 잉게가 자기가 작가로 인정 받고 상을 받을 때 혹시 그 자리에 와 있지 않을까 찾아보았다고 하는 고백을 한다. 원래 인간이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이 더 좋아보이는 법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황폐하고 삶의 에너지를 탕진해버렸을 때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할 것인가.
<환멸> 등장하는 두사나이 관찰자에서 청자가 되는 사람과 관찰대상에서 화자가 되는 두사람의 아주 짧은 이야기다. '환멸'이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삶을 허비한 사람의 희망없는 죽음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트리스탄> 한 요양소의 환자 클뢰터얀부인과 슈피넬이라는 한 작가의 이야기다. 산후병으로 기관지병을 앓고 있다고 하는데 각혈을 하는데도 폐에 이상이 없어 다행이라고 하며 위로한다. 슈피넬은 클뢰터얀의 결혼 전 아름다웠던 시간을 회상하게 하며 그녀의 죽음 직전에 남편에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회손한것은 당신이라는 도발적인 편지를 쓴다. 남편은 그 편지를 보며 슈피넬에게 노발대발하며 그의 편지를 반박한다. 슈피넬이 늘 답장없는 편지를 쓰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 환자들의 남편들에게 쓰던 것이었을까? 해설에서는 예술정신과 시민 정신의 극단적인 대립, 에술정신이 인간 정신과는 거리가 먼 병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시민 정신이 지닌 바 건전성을 파괴한다는 작가의 초기 이념을 부각되고 있다고 한다.
예술이니 이념이니 어려운 해석은 잘 알지 못한다. 또 술술 잘 읽어내갈 수 있는 만만한 소설은 아니었지만 토마스만의 작품을 읽으며 우리가 추구하는 삶과 예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독서였다.
-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서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