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상은 왠지 커다란 장벽에 쌓인 것 같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은근히 답답하면서도 나태하고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그냥 사는 것 같은 그런 느낌말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평범한 회사원인데 어머니가 요양원에서 돌아가신 날 그는 느낌도 별로 받지 않고 그곳에 간다. 왠지 그곳에 가는 것도 귀찮아한다. 그곳에서 그냥 죽은 이의 아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그곳에 하나의 벽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생각은 많이 안하고 있어야하는 자리, 주변인들이 볼 때는 뫼르소가 좀 이사해 보인다. 물론 나도 처음에 제 왜 저래? 머가 그리 귀찮은 거야? 그냥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고 그냥 지나가기를 바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묻고 온 다음 날 마리라는 여자와 수영을 하고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같이 잔다. 그냥 일상의 나태한 생각이고 하고 싶은 대로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산다. 도대체 저렇게 까지 해야 하는 건가? 하면서 막연히 읽어 내려갔다.
이웃집 레몽이란 사람을 친구로 두고 그의 행실, 소문은 무시하고 그냥 친구가 되고 그가 바라는 걸 해주고 그냥 아무 의미 없이 해주는 것 같다. 일상이 그냥 흘러간다. 그런 다음에 바닷가에 가서 레몽을 귀찮게 하는 아랍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과 싸우다가 다치게 되고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수영을 하러간 뫼르소는 거기서 그 아랍인과 마주치게 도니다. 오랜 시간 햇빛 아래 서 있다 보니 너무 너무 뜨겁고 눈부셔 서로 싸움을 하기 시작하면서 총으로 그를 죽인다.
잡혀가서도 뫼르소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하다. 자기 일인데도 뫼르소는 다른 사람의 일인 양 은근히 방관하는 자세다. 그렇게 해서 제판을 받고 판결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나온다. 물론 살인을 저지르지만 그 결과를 따져 나가다 보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부터 시작해서 이상하게 살인자의 과정이 추리되어간다. 그 와중에서도 뫼르소는 그냥 남의 일인 양 지켜본다. 참 너무 황당하다. 처형되는 장소에서조차도 자기가 죽는데 남들에게 증오의 함성으로 자기를 맞아 주기를 바랄뿐이다. 뫼르소가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참 답답했다. 그냥 귀차니즘에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은 그인데 이렇게 만들다니 말이다.
뫼르소라는 주인공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남들이 머라고 하던 그는 모든 것에 무관심이다. 저렇게 까지 무관심이라니? 의식이 단절하여 빚어지는 인간 사회의 부조리라고 한다. 정말 의식이 단절되면 저럴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마리가 결혼하자고 했을 때도 자기는 사랑하지 않지만 너가 하자면 하고 하는 식이었다. 처음 읽어보는 ‘알베르 카뮈’의 책인데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그의 나태함 아무 생각 없음이 갈수록 이해가 가는 책이다. 왜 저래? 그리 읽어가던 뫼르소의 마음이 점점 아 저럴 수도 있구나! 하게 만들었다.
『이방인 』은 부조리에 대한 깊은 통찰과 신랄한 고발로 격찬 받는 카뮈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을 통해 카뮈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역시나 표현 능력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좋은 글만 쓰는 게 아니고 사회의 ‘부조리’ ‘반항’을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근본적인 성격은 잘 표현한 것 같다. 역시 평들이 이리 나오다 보니 나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는 까뮈의 작품이다. 책의 두께는 얇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답답한 장벽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생각을 달리하게 만드는 좋은 작품 같다. 내가 어찌 그이 작품을 평가하리~ 오래 전에 이웃님이 선물해주신 책인데 이제 서야 읽어 본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
난해하고 난해해서 난해함 그 자체라는 난해한 소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입니다. 제가 고전 몇 권 읽었다고 이제 겁을 상실했나 봅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많이 본 제목이라고 덜컥 집어들었다가 난해함의 극치와 난해함의 정의를 몸소 체험하는 중이거든요. 아무튼 내공이 부족하여 여러 서평들과 안내서들을 읽고서야 대략 짐작이 갔으니, '서평'이나 '책리뷰'라고 부르기 애매한, 그저 제 생각을 나열하는 글이 될 것 같긴 합니다.
첫문장 부터 난해합니다.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인데요, 별것 아닌 문장이 아닙니다. 원문은 프랑스어 '마망'입니다. 영어로 '마미'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우리말로 '엄마'라고 하기에도 좀 벅차다고 합니다. 다 큰 어른이 '마망'이라는 호칭을 쓴 것 때문에 전 세계의 번역가들이 골머리 아프다고 합니다. 문예출판사 번역본에서는 '어머니'로 표현했군요. 호칭이 왜 중요하냐면요, 주인공 뫼르소의 인격을 판단하는 자료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여자친구와 해변에서 즐겁게 놀고는 잠자리도 함께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나중에 재판에서 매우 크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맙니다. 요즘이야 어른도 엄마를 '엄마'로 부르지만 이 소설이 발표된 건 1942년 2차대전이 한참일 때거든요. 사람이 무수히 죽던 그 시대에 사형이라는 죽음을 앞둔 청년의 모습에 촛점을 맞춰보니 어느정도 풀렸습니다.
뫼르소만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 세계에서 이방인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만든 규범과 틀 안에서 내 생각대로 살아가려면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는지도 보릅니다. 살인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그 사람의 도덕성이나 인품으로 살인죄에 대한 형을 정하는 모습이 바로 그런 게 아닐까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처럼, 평소 행실이 나쁜 사람이 살인을 했다면 의도적 살인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평소에 법 없이 살 사람처럼 착하며 봉사도 많이 하는 사람이 살인을 했다면 정당방위거나 실수로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살인을 한 사실만 놓고 본다면 동일한 잘못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경우를 서로 다르게 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집니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뫼르소가 양로원으로 갑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매우 슬퍼야 할 텐데 그는 크게 슬프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죽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해 못하는 게 당연하겠지요. 관을 땅에 묻을 때까지도 그는 울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다음날 해수욕장에서 마리를 만납니다. 그녀와 즐겁게 놀고 영화도 보고는 밤을 함께 보냅니다. 그리고 며칠 후 이상하게 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친구 레몽이 아랍인들과 싸움이 나고 칼에 찔려 상처를 입습니다. 화가 난 레몽이 총을 들고 와 아랍인들을 쏘력 하자 뫼르소가 말리며 총을 건네받습니다. 여기서 마무리 됐으면 좋았을 걸. 뫼르소가 다시 나간 그 싸움현장. 그곳에 레몽을 찔렀던 그 아랍인이 있었습니다. 둘은 갑자기 서로 견제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뫼르소가 총을 쏘고 아랍인이 죽습니다. 이후 재판을 받는데, 정당방위 정도면 큰 벌을 받지 않을 것을 압니다. 게다가 사건이 벌어진 곳은 식민지 알제리이고 뫼르소는 프랑스인입니다. 하지만 그는 젊어 죽으나 늙어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이고 자신의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사실대로 모두 말합니다. 재판에선 그가 어머니 장례 다음날 여자친구와 논 것을 근거로 그의 도덕성을 문제삼으며 원래 나쁜놈이라고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사형집행일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신에게 증오로 욕을 퍼부어주길 바랍니다.
아무리 시대적 상황이 전쟁이라 해도 참으로 난해한 내용입니다. 혹자는 뫼르소가 잘했다고 할 수도 있고, 혹자는 뫼르소를 비난할 것입니다. 문제는 뫼르소가 왜 사람을 죽였느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의 행동이 중요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저 보통 사람과 달랐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잠시 근신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한 것 뿐입니다. 근신의 시간을 가진 후 여자친구를 만나는 것과 다음날 여자친구를 만나는 것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법에 '어머니가 죽으면 울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 것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다음날 섹스를 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재판은 그의 살인이 아니라 어머니가 돌어가시고 난 후 그의 행동에 촛점이 맞춰지게 됩니다.
사람마다 모두 생각이 다릅니다. 생각이 다를 뿐이지 내 생각이 맞고 네 생각이 틀린 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난해한 게 아닐까요. 관점에 따라 옳게도 보이고 그르게도 보일 것입니다. 관점에 따라 살인자 또는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고 관점에 따라 독립군이 될 수 있는 것처럼요. 이것이 바로 실존과 본질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느 현상의 본질은 같으나 실존은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 어렵다. 암튼, 이 어려운 책의 리뷰를 빨리 끝내야 겠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대여하여 읽고 쓰는 리뷰입니다. 문학적 상식, 지식이 희박한지라 짬내서라도 한 번씩 세계명작을 읽어보려고 하는데 이북으로 대여해서 짧은 분량으로 간단하게 읽어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채로 읽어보았는데 조금은 의아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이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