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이 두살 연상의 외사촌 누이 알리사에게 처음 사랑을 느꼈던 시절에야 어려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해도, 십수년이 지나 대학생이 될때까지 학교에서 온갖 것을 공부하고 여행하고 좋은 책을 수없이 읽었는데 제롬은 왜 인간적으로 그다지 성숙해지지 않는 건지 알 수 없다. 알리사가 당시 사회관습에 따라 어머니가 떠난 시골집에서 장녀로서 가정을 보살펴야 하고 교육의 기회도 얻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는 점에서 제롬 쪽에서 그녀를 더 많이 이해해주며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했다고 본다. 알리사를 평생 지켜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어머니의 불륜을 목격하고 울면서 기도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때라면 더더욱 내성적인 그녀가 드러내지 못하는, 아픔과 죄책감을 동반하는 사랑에 섬세하게 공감했어야 한다.
이 두 사람의 지극한 사랑을 가족들, 친구들이 모두 알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도와주는 어른이 없고, 친구들은 어리석은 충고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솔직하려는 그를 오히려 만류했다. 몇 번의 어긋남끝에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사랑의 찬란함이 가시게 되자, 사랑에 대한 고정관념과 고집으로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대해 종교적 대답만 되풀이하게 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그러나 그들이 들어가려던 좁은 문은 너무나 협착하여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좁은 문 보다 더 좁은 바늘 구멍을 스스로 만들어 낙타까지 끌고 들어가려 헛되이 애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누구보다 제롬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신에게로 향한 사랑만이 진실된다고 믿고 제롬을 자신에게서 밀어내고자 했던 알리사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좁은문].
인문학 강의 세 번째도 문학 평론가 이경호 선생님의 강의로 [좁은문]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접할 수 있었다. 인간적으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희생하면서 신에게로 향하는 사랑에서만 진정함을 깨달을 수 있다는 청교도적인 사랑과 희생 사이에서 갈등하는 알리사. 그런 알리사의 사랑을 자신에게로 돌리고자 노력하지만 그것이 헛되게 끝나버림에 괴로워하는 제롬. 그 둘의 사랑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제롬을 포기하고 나이 많은 사업가와 결혼하는 알리사 동생 줄리에트.
세 사람의 사랑이 하나같이 비극적으로 끝나버리는 [좁은문] 에서 말하는 사랑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작가 앙드레 지드의 자전적 소설인 [좁은문]은 저자가 16세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 외사촌 누이 마들렌과의 사랑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소설에서와는 달리 두 사람은 마들렌이 죽을 때까지 함께 하지만, 그 길은 그리 순탄한 사랑의 길이 아니었다. 책에서 알리사와 제롬의 사랑이 신을 향해 있듯이, 앙드레 지드도 그의 부인과의 사랑이 청교도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져 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평생을 다양한 경험으로 글쓰기 활동을 한 작가의 이력답게 작가의 삶 또한 다양한 형태의 삶으로 이루어졌었다.
정신적인 사랑으로 이어가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 앙드레 지드의 동성애적 성향으로 인해 금이 가기시작했지만, 마들렌의 병이 깊어가면서 다시 함께 하게 되었던 두 사람의 삶은 [좁은문]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는 대조적이다.
[좁은문]을 읽으면서 세속적인 사랑을 거부하고 신에게로 향하는 사랑에 자신의 사랑 제롬을 희생해 버리고 죽음으로 마감한 알리사의 사랑을 대하는 태도가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인간만이 가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현실적인 사랑이 과연 알리사가 가진 종교적인 가치관과 맞바꿀 정도로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적인 사랑이 모두가 세속적이고 비도덕적으로 치부해 버리는 알리사의 행동이 지나친 교조주의로 빠져서 사랑이 이상화되어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또한, 알리사가 보여주는 신을 대하는 태도에도 현실적인 사랑을 거부하는 편협한 시선과 의식을 가지고 있는 불안한 행위는 아닌지 읽는 내내 너무 답답했었다. 제롬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현실에서의 둘의 사랑을 이룰 수도 있고, 그 속에서 신에 대한 사랑을 얻을 수도 있을 텐데, 너무나도 한쪽으로만 쏠리는 알리사의 태도는 내겐 분명 올바른 종교인의 태도로 보여지지 않았다.
제롬을 사랑하고, 제롬 또한 알리사를 사랑하는 맘이 진실되다면 그 진실된 사랑을 받아 들이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할 수 있음도 숭고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리사가 종교에 귀의하는 삶을 택했더라면 제롬의 고통도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고, 알리사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시선이 넓었을 듯하다. 끝까지 제롬의 사랑을 거부해 버린 알리사가 그래서 더 안타깝기만 한 이야기 [좁은문].
[좁은문]을 통해 고전의 가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고, 영혼과 육체에 깃들여져 있는 사랑에 대해 고민해 보고 고민해 보는 좋은 시간을 가져 감사하다.
처음에는 제롬의 시선으로 본 '알리사'를 같이 바라보며, 그녀가 어떤 마음인가를 생각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요.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 있는 알리사의 일기 속 진실에서 느낀 내면의 갈등을 보며 혼자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1. '좁은 문'은 두 사람이서 함께 들어가는 길이 될 수는 없었을까? 라는 의문에 대하여.
알리사가 도달하고자 하는 좁은 문 너머에는 '하나님께로 인도된 제롬'이 있고, 제롬이 도달하고자 하는 좁은 문 너머에는 '알리사'가 있습니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 서로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관계인듯 해요. 알리사와 제롬은 서로를 위해 좁은 문을 통과하고자 힘씁니다. 알리사는 자신의 마음을 포기해야 제롬이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제롬은 알리사의 마음을 얻기 위해 좁은 문에 들어가려고 견디며 노력합니다. (두 사람이 나눴던 파스칼에 대한 영혼의 희생과 보상에 대한 대화도 생각나는 군요.) 좁은 문 끝에 서로가 있었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계셨으면 단순히 해결될 문제인데, 그랬으면 이 소설이 탄생하지 않았겠지요. 알리사가 제롬이 아닌 스스로를 위해 좁은 문을 통과하려 했다면 또 내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2. 알리사는 현실의 행복을 불편해 합니다. 행복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생 줄리에트의 삶을 바라보며 괴로워합니다. 알리사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동생에게 행복을 주려 했으나 정작 동생은 그와 상관없이 쉽게 행복해져 버립니다. 어쩌면 이것이 알리사에게 현실의 행복을 부정하게 된 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녀는 행복 그 이상의 무언가-성스러운 것을 바라게 됩니다. 처음에는 알리사가 제롬과의 만남을 미루는 것이 평범하게 행복해지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제롬과 함께 힘쓰며 만든 평범 이상의 사랑이 단번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사실 그녀는 손만 내밀면 잡을 수 있는 행복이 눈앞에 있는데 그 앞에서 손발과 마음을 자승자박한 모습 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평범한 사랑에 머무르기엔 이미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후 실제 제롬과의 상봉 이후 알리사는 그들의 이상적인 사랑에 구멍이 나버린 것을 느낍니다. 알리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것은 '미덕'을 우선에 두는 것 입니다. 그리고 제롬 또한 미덕을 행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의 부인'을 해야 야된 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는 만남을 미루는 것을 넘어 제롬이 앞에 있어도 일부러 무심히 행동하는 것, 다시는 만나지 않는 것으로까지 표현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여전히 제롬을 사랑한다는 것이 비극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을 생각하게 됩니다. 미덕(성스러운 것)과 현실의 행복, 또는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걸까요?
3. '자기 마음의 부인'은 제롬을 위한 알리사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것을 통해 제롬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제롬은 고통을 받습니다. 알리사 자신도 이로 인해 고통받고, 갈등 속에 죽어갑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 이후로도 제롬은 알리사를 안고 살아갑니다. 알리사는 부인함으로써 하나님께 도달한다고 믿습니다. 그녀는 현실적 행복에서부터 자신의 마음까지 부인하기에 이릅니다. 알리사는 숭고한 목적과 사랑으로 결정한 것이었지만, 제롬에겐 정작 자신이 거부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에 대해서 서로 얼마나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했던지 정작 제롬의 시선으로 본 알리사의 모습으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롬은 알리사의 죽음 이후, 일기장을 읽고야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죠. 제겐 이 부분이 좀 불편했는데 사랑하는 이의 생각이나 마음을 전제되어 있지 않은 상황의 사랑은 이기적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리사는 늘 말했지요. 여전히 너를 사랑하며, 너를 위한 것이었다고. 제롬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겠지요.
4. '마음의 부인' 그것이 가져오는 것들에 대하여. 너무나 원하는 것 앞에서,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해야 할 상황 앞에서의 모순. 그것의 반복으로 알리사는 스스로도 너무도 멀리 가버렸습니다. 끝없이 자신의 마음을 번복하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 앞에서 그녀가 원하던 참된 평안을 얻었는지는 책을 통해서는 잘은 모르겠습니다. 알리사가 자신의 마음을 부인하며 제롬을 멀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들, 그 모습들을 제롬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면서 저는 다른 측면의 공감을 느낍니다. 주말동안 고민하고 있었던 '진심'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느끼는 것들을 자꾸 부인하며 반대로 행동하고자 노력하지만 마음은 더해만 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은 거부해야 할 것이 아니라 포괄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짧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알리사의 목적은 숭고했지만, 그녀처럼 행동하는 것은 자신과 타인에게 너무도 큰 고통을 유발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돈이 없다. 사고싶은 책의 리스트는 꼬리를 무는데 지갑은 쓰잘데기
없는 구두 상품권 따위가 차지 하고 있는데다 주말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갑속의 엔화와 호주 달러를 비롯한 환전 못한 종이돈들이 야속하다.
그렇다고 잔고가 얼마 남지 않은 현금 카드는 수수료가 더 무섭다.
집에 옷들을 뒤적 뒤적 구깃한 청바지 주머니 속에서 발견한 3000원과 아무렇게나 올려둔 책상위의 동전들을 모아보니 5000원이 조금 넘는 돈이 날 흐믓하게 한다.
돈을 들고 간만에 집 옆의 책방을 찾았다.
형형 색색의 책장 마다 그득 한 책들이 나의 눈을 혼란 스럽게 한다. 코를 벌름 거리며 폐부 깊숙히 눅눅한 책냄새를 음미한다. 코가 간질 거려 오는다.
오랜 만에 찾은 동네의 조그만 책방은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다를 바다 없다. 아줌마는 머가 그리도 신나는지 티비 드라마에 희희낙낙 이다.
겹겹히 둘러쳐진 책장들 사이에서 이책 저책 을 고르다 보니 마치 흡사 보물 찾기라도 나선 기분이다. 그렇다 거 귀퉁이 맨 아랫단에서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발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찌 이런 동네 책방에 이런 책이. 내가 좁은 문을 읽었던 지가 언제 더라?
녀석은 너무나 오랫동안 아니 어쩌면 한번도 누군가의 손을 타지 않았을 모양으로 나에게 다가 왔다. 다만 조용히 늙어가는 모습으로 빠닥빠닥 한 책장을 둘러가며 누렇게 익어 가고 있었다.
마치 인심이나 쓰 듯 꺼내든 '테스' 또한 녀석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벌써 내가 좁은 문을 읽은지가 10여년이 다 되어 간다. 하지만 내나이 25에 만난 좁은문은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예전 내가 좁은 문을 읽었을 적엔 난 다만 사랑을 꿈꾸는 것만을 허락 받은 나이였고, 좁은 문은 나에게 사랑과 아픔에 대한 환상만을 키워 준 책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몇번의 사랑을 경험하고, 이별이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는, 사랑은 용서하고 기다리것 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버린 나에게 좁은 문은 다만 환상에 불과 했다.
마치 처녀의 순결을 잃어 버린듯한 부끄러움이 엄습하면서 좁은 문은 더이상 나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 다만 환상이라는 그래 나는 이제 세상을 알아 버렸구나 라는 쓸쓸함이 엄습한다.
2004.08.23
좁은 문을 꼭 읽고 싶었다.
사촌을 사랑하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이라는 글귀를 접하고서였다.
옆에서 보기에 열심히 신앙생활한다(그 의미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
연애나 결혼의 조건으로 같은 종교를 가지고 신앙을 가진사람을 찾곤 한다.
나 역시 그러한 사람 중 하나였고,
외적인 조건이 충분히 내 호감을 사는 흔치 않은 사람을 만난 경우에도
그러한 기준 때문에 애써 그런 감정을 억제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금도 어느정도는 그런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숨기지 않겠다.
그러나, 소위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과 선을 보고 소개팅을 하면서
나는 자신의 바라는 바(욕망)에 솔직하지 못한 위선적인 모습들이 너무나 싫었던 경험들을 했다.
차라리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한걸음 더 하나님께 다가서는 노력을 할 수는 없는 것인지..
신앙의 출발점이란 자신의 욕망이 어느정도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닌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술잘 마시고 솔직하고 사람들과 소통할 줄 아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신앙은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보다 솔직하고,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ㅎㅎ
그래서 난 올해도 연애 못할 가능성이 꽤 많아 보인다..
알리샤로 말할 것 같으면, 답답함의 극치..
나처럼 여러~~번 선이나 소개팅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요즘같이 스피디하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이들의 아날로그적인 연애담이 얼마나 옛날옛적의 이야기로 여겨질까?
제롬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제롬의 우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약혼하고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알리샤에게는
그저, 쯧쯧쯧...
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사세요~ 라고 냉소에 찬 멘트를 날리고 싶은데.
죽는다... 그러면 에효~ 한숨만 나올뿐...
이런 시절도 있었구나...
그런 알리샤라면, 수도원에 들어가 살면 좋았을텐데 참 설정 자체가 답답함의 극치다.
앙드레 지드는 답답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싶었을터..
청교도 신앙은 이런 답답한 면이 있다.. 라고
근 한 세기가 지나간 지금의 시점에서 청교도 신앙이 정말 좋은 신앙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내 개인적으로는 글쎄올씨다.
이 시대에 청교도와 좁은문이라는 작품은 옛날 이야기 아닌가 싶다...
그러니 옛날책만 고집할 게 아니라 요즘 책도 읽어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