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전인가. 코로나 전이였는데. 새해에 오랜만에 만난 어렸을 때 친구가 본인이 읽었는데 너무 좋았다며, 너도 좋아할 것 같다고 책을 선물해주었다. 책 선물을 많이 받은건 아니었지만, 본인이 읽고 좋아서 그 책을 그대로 선물 받은 경험이 없어서 신선했다. 나도 읽고 누군가에게 넘겨야 할 것 같은 기분..!
[싯다르타] 제목만 들어도 어려울 것 같아서 손이 선뜻 안가다가, 작년 10월에 읽기 시작했다. 여러 병렬독서중에 끼어 있다가 이제서야 다 읽었다. 막상 읽으면 술술 잘 읽히는데, 더 재밌는 책이 많으니까 손이 잘 안갔다. 하지만 정말 좋은 책이었다.
여기서의 싯다르타는 우리가 아는 '부처'가 아니다. 붓다는 따로 있음. 뭐,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싯다르타가 나중에 붓다가 되긴 하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집에서도 나오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붓다'에게도 가지만 싯다르타는 이게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리를 경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거라 생각하고, 그것은 말로 전달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사실 모두가 그렇지. 경험하지 않으면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 깊이 그것을 알지 어렵지 않은가. 앉아서 생각만한다고 깨달음이 얻어지지 않는다는걸 깨달은 싯다르타는 속세로 돌아간다. 속세로 돌아가 사랑도 하고, 돈도 벌고, 도박도 하고. 그래도 기존의 신분 덕분에 쉽게 많은걸 경험할 수 있었다.
이 때의 싯다르타가 할줄 알았던 것은 '생각하는 것, 기다리는 것, 단식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구도자들이 왜 단식을 하고 소식을 하는지 쉽게 와닿지 않았다. 그저 음식에 대한 집착이나 배부름에 대한 평온함이 구도자에게 방해가 되나, 생각했는데. 단식의 효능(?)에 대해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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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싯다르타가 단식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는 오늘 안으로 어떠한 일이든지 하려고 들 것입니다. 당신에게서든지, 다른 어디에서든지말입니다. 배고픔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강요할 테니까요. 하지만 싯다르타는 조용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는 초조함을 모릅니다. 그는 절박함을 모릅니다. 그는 오랫동안 배고픔에 빠져 있을지라도 웃어버릴 수 있습니다. 주인이시여, 그런 점에서 단식은 좋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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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을 할 줄 아는 것은 배고픔에 무엇이든 선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급하게 무언가 하지 않아도. 조용히 기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배고픔의 절박함에 나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멋진걸..?
이렇게 세 가지의 능력과 글을 쓸 줄 아는 브라만의 신분으로 즐거운 속세 생활에서 도박의 바닥까지 맛보았다. 구도자였던 싯다르타가 도박에 빠지는 것도 신기했는데, 싯다르타는 도박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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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엄청난 것을 걸고 도박하는 동안의 두렵고 가슴 조이는 불안을 싯다르타는 사랑했고, 그 불안을 끊임없이 새로이 하고, 끊임없이 상승시키고, 끊임없이 자극하여 북돋우려고 애를 썼다. 왜냐하면 지금의 포만하고 미지근하고 맥빠진 자기 생의 한가운데서, 그는 유독 이러한 불안감속에서만 행복 같은 것, 도취감 같은 것, 상승된 생의 맛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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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 중독에 다달은 싯다르타!!! 현대인같지 않은가. 싯다르타는 이 생활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해 다시 숲속으로 돌아가던 길에 뱃사공을 만나 그와 함께 뱃사공의 생활을 한다. 뱃사공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바수데바'라는 이름 자체가 신의 이름이었다. 나는 몰랐다.. 바수데바는 비슈누의 화신 가운데 하나로, 크리슈나와 동일시된다고 한다. 그곳에서 싯다르타는 바수데바와 강에게 깨달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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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 또한 하나의 강이었습니다. 그러지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그리고 노년 싯다르타와 단지 그림자에 의해 구분되었을 뿐, 현실적인 것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전생도 과거가 아니었고, 그의 죽음도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현재이며, 모든 것이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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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 멋져....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없다. 모든것이 현재고 모든 것이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다 . 전생도 후생도 없고, 이 모든 것은 지금의 나일뿐.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고, 너도 나도, 저 강아지도 나고, 뭐 그런건가. 예전에 봤던 영화 '컨텍트'도 생각났다. 원형의 언어를 쓰는 외계인에게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영화 다시 보고 싶네..)
싯다르타의 아들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모든 육아인들은 이 부분만이라도 발췌해서 꼭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오은영박사님의 이론과 같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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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 않아도 부드러운 마음을 갖지 못한 그애를 어찌 인간 세계에 내보내겠습니까? 그애가 사치에 빠지지 않을까요? 쾌락과 권력에 눈이 멀어 스스로를 잃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경험한 온갖 오류와 걸어온 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혹시 그애가 완전히 윤회 속에 빠져 파멸하는 것은 아닐까요?”
”…스스로 삶을 살고, 스스로 업보를 짊어지고, 스스로 쓰디쓴 잔을 마시고, 스스로 자기의 길을 찾으려는 것을, 어떤 아버지가, 어떤 스승이 막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당신은 그 누군들 이 길을 걷지 않고 살아갈 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친구여, 혹시나 당신의 어린 아들만은 당신이 사랑한다고 해서, 당신이 그애의 번민과 아픔과 실망을 덜어주고 싶다고 해서 그것이 가능할 줄 아십니까? 비록 그애를 위해 열 번씩 죽는다 한들, 그것으로 당신이 그애의 운명을 손톱만치라도 덜어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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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와 바수데바의 대화.
자식이 나를 힘들게하는 고통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서 옆에 두고 싶은 싯다르타와. 그것을 지켜보는 바수데바. 망나니같은 아이가 걱정되어서 세상으로 보내지 못하는 싯타르타와 우문현답을 하고 있는 바수데바. 아이를 위해 열 번씩 죽는다 한들, 아이가 생각을 고쳐먹지 않는 이상 그 애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아이가 생각을 고쳐먹으려면 너처럼 실제로 부딪쳐봐야 깨닿게 될거야. 라고 말하는 바수데바... 천재님.. 역시 신이였어. 걱정이 많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동생이나 남편을 끌고가려고 하는 나에게도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쉽지 않아.. 사랑한다고 다 내 맘대로 될 수는 없으니까.
마지막 싯다르타가 예전 친구 고빈다를 만나서 나누는 대화는 이 책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몇 장을 그대로 필사해두었는데, 책 읽다 지겨운 사람들은 이부분만이라도 읽었으면 좋겠다. 싯다르타가 깨달은 바를 우리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으니.
앤디위어의 단편소설 en egg 이야기도 생각났다. 처음 들었을 때 충격적이었는데.. 그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싯다르타도 해준다. 내가 세상이 되는 경지에 닿으면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 좋은 책이었다. 헤르만헤세의 책을 처음 읽어봤는데, 다른 책도 읽어보아야겠다. 아, 싯다르타는 많은 출판사에서 번역이 되었는데 이번에 '문예출판사'와 '더클래식' 버전 을 번갈아가면서 읽게 되었다. 같은 부분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더클래식'부분이 좀 더 쉽게 써져있는 것 같다. 그만큼 의역이 많이 되었다는 것이겠지만, 싯다르타 읽기가 힘들다면 출판사마다 번역이 조금씩 다르니 비교해보고 골라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새해 시작부터 좋은 책을 읽어서 마음이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