戀戀(연연)치 않기를 바라는 이밤에....
어둠이 춥고 기나간 하루를 삼킨다.
남루한 하얀옷을 걸친채 회색의 겨울하루는 그렇게 덮혀간다.
무엇이 삶을 고뇌할거라는 의문을 타인들은 묻는다.
그러나 그러함으로 절반 이상의 호의를 채운채 깃든 회한으로 사는 사람들.
인생은 결국 내어줌으로써 자신을 해탈할수 밖에 없는 업보적인 운명에 갇혀 있다.
과거는 현재를 지나고 미래또한 언젠간 현재에 봉착하게 된다.
순간의 갈망으로 세상을 사 것은 어쩜 누군가 인위적인 계율에의한 절차와 같기도하다.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해갈할수 밖에 없는 한자루 양초와 같다.
세상을 연연하면 그만큼 마음만이 시련과 고뇌에 쌓일 것이다.
잠시 지나는 구름조각처럼 우린 힘껏 타오르는 욕망과 바랜 한줌의 회색회한으로 산다.
내어 줌으로 얻어지는 포만과 스스로의 자아를 이루기 위해 노력 했지만
만상이 무쌍한 속세에 휘말린 기만과 탐욕은 어느 한곳에 머물수 없는
외로운 모퉁이 외로운 바람 한줌이었다.
누군 무한한 욕망을 위해, 누군 허울적인 동경의 매직으로 살고
아직도 퍼득이는 우리들의 마음 한구석을 흔들고 만다.
채움이 결국 나를 결정할거라는 생각의 마디엔 그만한 욕망의 회한이나
후회의 참회가 자리하기 마련이다.
그것도 다 부질없던 기억의 조각으로 부셔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양자의 배려로 내어줌은 뭔가의 의미적 남김이 남을 터
그 남김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면 자신을 이해하고 마음을 해동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을......
우린 그 갈등과 불신으로 상대를 위협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기 일쑤이다.
물론 한두번쯤 불신의 벽에 갇히어 본 이라면 이해가 되는 일들이지만
삶은 서로의 이해의 배율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해의 배율이란 앞서 말한 상호의 배려의 차이이다.
목적을 잉태치 말고 마음으로 만이 자신의 최선을 다 할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도 어려운 상황의 현실이런가?
여유란 그만한 성공적 이해의 배려를 삼을 정도로 자신을 반석에서 배포되어야 하거늘.......
누구나 자신의 이기나 목적의 탈출을 위해 한없는 줄다룸을 거두고 있다.
세상을 연연치 않으려함은 크나큼 자신에 대한 확신이 중요한것 같다.
언제고 자신으로부터 고난이나 시련을 감당할 각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마음은 모두들 일정치 않아서 각기 자신의 명분과 이상의 가치가 틀리다.
기만을 맛 본 사람은 다신 실의의 기만을 싫어할 것이고
갈등을 매듭으로 지어 본 이는 다신 누굴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알고보면 사실 불신도 기만도 아니 행복마저도 인생의 삶을 연연하는 것이다.
연연함이란 과오를 지니고 다니기에 그만한 댓가나 응보적인 수순에 갇히게 된다.
그럼으로 회한과 잔재를 남기며 그만한 자신을 융화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마 윤회적 시간을 지나도 다시 만나지 못할 후회에 갇힐 수 있다.
순간의 마디적 상황에 내가 뱉은 그 많던 말들과 언약들이 부질없다는건
초연에 정하여진 우리들의 운명을 다스리지 못하는 오류의 허울에 있을것이다.
물처럼 연연치 않고 흐르면 언젠가 도달하는 마음의 순응은
순연스런 우리네 지향을 말하여 준다.
과거는 현재를 지나기 마련이고 현재 또한 과거가 되고 말것이다.
소멸하는 삶은 다시 새로운 시작을 일컫지만은 그 만큼의 반복된 복화술같은 것이다.
자신에 주어진 시간에 연연치 말라.
시간속엔 무수한 갈등과 기만 그리고 고뇌적 시련이 녹아있다.
물론 환희적 갈망과 희망 또한 자리한다.
그러나 무엇이던 연연한다면 그만한 시간안에 든 혐오와 그만한 댓가를 사게 될 것이다.
우리네 욕망안에 든 시기는 그만한 댓가를 치루는 것이다.
혹여 그만한 시간이 도래하여 떠나려 하는 것이 있다면 고이 보내주어라.
그건 마음이 잔재가 부린 기만적 독선이나 아집으론 채워지는 능력의 테두리가 아니다.
본연과 스스럼없이 사라지는 연연치 않은 순행의 차순이다.
아쉬워 말라.....
내가 연연치 않으면 그만한 잔재를 내려놓는것이니
소멸된 가슴에 새로운 갈망을 불어 넣는 시작이 될것이다.
내 것이 아닌 그 허탈한 잔재위에 자신을 부리면
아무것도 손에 쥘수 없듯 우린 원래의 무상함에 들것이다.
연연치 말자.
본연에 든 우연과 인연의 끈으로 남긴 잔재을 치료할 약을 지어라.
이별은 이별은...... 떠나 보냄은 ....
준비된 이별 이라면 더욱 슬프지만 다만 기만없는 스스럼 속에 남겨진
욕망에 연연치 않았음 좋겠다.
세상 모든것에 연연치 않은 그러함과 본연적 능숙함을.....
그러나 우리가 좀더 현실적이고 냉험함속에 산다면 어찌 악마의 속삭임에 달콤하지 않으랴.
삶은 연연치 않은 본연적 마음속에 산다.
흐르는 물처럼......
유진 오닐 사후에 발표, 공연되었다는 4막짜리 작품인 '밤으로의 긴 여로'는 느릅나무 밑의 욕망과 함께 작가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죠. 57년 퓰리처 상도 받았고요. 불행하고 다사다난한 가정사를 가진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상당히 포함된 극으로, 작가의 마지막 배우자에게 헌사도 붙어 있지만, 여하튼 한 부부와 그의 두 아들들의 피로하고 소진되는 한 하루를 다뤘다고 간단히 줄여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에 느릅나무 밑의 욕망만 읽어보았는데 이어 읽어보기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