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 그림책으로 만났던 [걸리버 여행기]는 분명 많은 이들에게 재미와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해 준 책이었다. 소인국에 도착하여 온 몸에 수많은 줄로 꼼꼼하게 묶여 있던 걸리버의 모습이라든지 그들의 군함을 줄로 묶어서 유유히 바다를 걸어서 건너오던 장면들은 확실히 신기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 소인국에서 거인으로 취급당하는 설정 자체가 확실히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러한 설정 덕분에 [걸리버 여행기]는 단순히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만 생각했지만, 최근에야 이 작품이 풍자문학의 진수로서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가 당시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의 의도는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화나게 만들려는 것"이라는 스위프트의 평만 보더라도 내가 알고 있던 [걸리버 여행기]는 원전의 극히 일부라는 점과 또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접한 것이 전부였음을 깨닫게 된다.
현대지성에서 출간한 [걸리버 여행기]는 그동안 거친 표현과 풍자 등을 삭제하여 발행된 판본과 달리 원전을 그대로 번역하여 출간한 책이다. 실제로 책의 내용은 걸리버가 약 16년 동안 4번의 항해를 통하여 '릴리펏(소인국) - 브롭딩냇(거인국) - 라퓨타(날아다니는 섬)를 중심으로 한 세계 - 후이늠국(말의 나라)'이라는 곳의 경험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만 보더라도 우리가 어렸을 때, 읽었던 내용은 원전의 극히 일부분이며, 그마저도 단순히 모험이라는 측면만 부각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1726년에 출간된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서 우선적으로 그보다 훨씬 전에 출간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지게 된다. 당시 유럽인이 두려워하면서도 동경하던 몽골 제국의 곳곳을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동방견문록]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비록 마르코 폴로의 상상과 허풍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는 평가도 있지만, 어쨌든 유럽인 입장에서는 존재하지만 실제로 간 적이 없는 그곳의 이야기가 흥분될 수밖에 없었다. 동방에 대한 이들의 동경은 훗날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여는 데 일조한 것도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마치 실제의 모험처럼 서술한 [걸리버 여행기]는 역시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는 어렸을 때, 축약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에 열광하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성인이 된 이 시점에 만나는 [걸리버 여행기]는 확실히 재미있다. 처음 읽었던 흥미로운 대목들을 보다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로서는 '릴리펏'이라는 소인국에서의 경험담을 읽은 것이 전부였기에 전혀 정반대의 세계인 '브롭딩냇(거인국)'을 포함하여 움직이는 섬(라퓨타)과 말들의 나라(후이늠국)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통의 인간세상과는 전혀 다른 그곳에서 말을 배우고 적응하는 걸리버를 통하여 우리는 그 상상의 세계를 모험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기존에 접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걸리버의 모험은 확실히 눈길을 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스위프트의 당시 세태에 대한 비판을 풍자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흥미진진한 스토리보다는 오히려 그 안에 내포된 다양한 의미를 찾아보는 것에 더욱 주력할 필요가 있다.
우선 '릴리펏(소인국)'의 온갖 설정이 스위프트의 상상과 함께 당시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먼저 눈에 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 이 작품이 출간된 1726년을 전후로 한 당시의 역사에 대한 배경은 물론 스위프트의 개인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아야 된다. 이는 [걸리버 여행기]가 단순히 문학이라는 장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예를 든다면 '릴리펏'의 양대 정치 세력인 트라멕산과 슬라멕산을 그들이 신는 신발의 굽 높이에 따라 분류하고 있지만, 이는 당시 영국의 보수적인 토리당과 진보적인 휘그당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릴리펏'의 적국으로 등장하는 '블레푸스쿠'는 당시 영국의 라이벌인 프랑스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작품이 모험이 전부가 아니라 오히려 모험을 가장한 당시의 시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엿볼 수 있는 풍자 문학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두 제국은 그들 언어의 유수한 전통, 아름다움, 활기찬 표현 능력 등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상대 제국의 언어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경멸을 표시했다."(p.64)라는 걸리버의 묘사는 끊임없이 경쟁하는 영국과 프랑스의 세계관을 자신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들의 종교 갈등을 삶은 달걀을 위쪽 또는 아래쪽부터 깨는 방법에 따라서 묘사하는 부분 역시 유럽의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은 물론 영국 내부의 국교회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걸리버 여행기]에서 스위프트의 상상의 소산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부분들이 실제로는 당시의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비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풍자를 통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예의 관심을 끌게 된다. "군주들에게 해 준 커다란 봉사는, 군주들의 야심을 충족시키기를 거부하는 태도와 견주어 볼 때 아주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p. 62)라는 문구는 비록 걸리버가 '릴리펏'의 군주에 대한 불만을 언급한 것이지만, 실제로 스위프트에 대한 영국의 '앤 여왕'의 차가운 시선 내지는 당시 유럽 대부분의 군주들의 행태에 대한 비판임을 알 수 있다.
'릴리펏'에서의 걸리버의 경험담을 통하여 우리는 [걸리버 여행기]가 단순히 모험에 관한 책이 아님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스위프트가 이 작품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후의 모험에서 더욱 상세히 묘사된다.
"(중략) 무지, 나태, 악덕이 입법자 자격을 얻기 위한 필수 요소임을 아주 명확하게 입증했어. 법률은 그 법률을 왜곡하고 혼란을 주고 회피하려는 자들의 개인적 이익과 능력에 의하여, 임의로 설명되고 해석되고 적용되었지. (중략) 공직을 얻기 위해 완벽한 자질은 필요 없는 것 같아. 사람들은 미덕의 힘으로 귀족 작위를 얻는게 아니고, 사제는 종교적 경건이나 학문으로 승진하는게 아니야. 군인들은 행동과 용기, 법관들은 성실성, 상원의원은 애국심, 고문관은 지혜로 인해 그 자리에 보임되는 것 같지 않다."
- p. 162 中에서 -
'브롭딩냇(거인국)'의 왕이 걸리버로부터 그의 조국인 영국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위와 같이 평가하는 부분은 스위프트가 바로 거인국 왕의 입을 빌어 당시 영국의 문제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현재에 그대로 들어맞는다는 점에서 공감을 이끌어낸다. 법률에 근거하여 판결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임의로 설명되고 해석되어 판결이 내려지는 의혹을 우리 역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것도 그러한 공감의 한 원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서 걸리버가 자랑스럽게 영국의 기술을 과시하기 위하여 화약과 대포를 이용한다는 설명에 대하여 '브롭딩냇'의 왕이 그런 파괴적인 무기가 가져오는 유혈과 살육을 당연하다는 듯이 전혀 동요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공포를 느끼는 부분은 인간의 끔찍한 살육에 대한 스위프트의 우회적인 비판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단순히 인간보다 거대한 존재로서만 묘사되던 '브롭딩냇'의 국왕에 대한 걸리버의 평가는 당시 유럽의 절대왕권을 신봉하던 군주들에 대한 쓴소리는 물론 갖춰야 할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눈에 띈다.
"그('브롭딩냇' 국왕)는 탁월한 통치 능력을 갖추었고 모든 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는다. 그런 군주가 국민들의 목숨, 자유, 재산을 한 손에 거머쥐는 절대 군주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다니! 유럽에는 그 개념조차 희미한, 선량하지만 불필요한 양심이라는 문제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중략) 이 양심의 가책이라는 문제 때문에 그의 성품은 영국 독자들의 견해로는 다소 시원치 않은 것으로 보이리라."
- p. 166 中에서 -
걸리버를 통한 스위프트의 비판과 풍자는 정치와 사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라퓨타(날아다니는 섬)'를 포함한 몇몇 도시에서 만난 학자들과의 만남은 스위프트가 다루려는 대상이 학문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영국이 '영국 왕립 협회'를 설립하고 과학을 중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부분은 과학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속내를 여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하여 그들이 추구하는 과학 기술이 현실과 맞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햇빛 추출 계획이라든지 배설물을 원래 음식 성분으로 되돌리는 연구, 얼음을 태워 재로 만들어 화약으로 만드는 연구, 지붕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만들어지는 건축술, 돼지를 이용한 경작 방법, 거미줄로 비단을 짜려는 계획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언뜻 흥미로운 연구 과제라 생각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구현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오히려 비용이 더 많이 들어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이기에 영국에서 일고 있는 과학 만능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는 그가 종교인인 사제로 활동한 점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또한 훗날 유럽에서 유행하게 된 강령술을 통하여 다양한 역사적인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철학, 과학, 역사에 대한 내용들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게 다가오게 된다. 이는 마치 단테의 [신곡]에서 이미 죽음을 맞이한 역사적인 인물과의 만남을 연상케 하는 부분인데, 강령술로 소환된 인물들이 오로지 진실만을 이야기한다는 설정을 전제로 하여 그들로부터 자신들의 학문에 대한 솔직한 생각과 잘못 알려진 역사에 대한 지적을 이끌어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그의 추종자와 비판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동안 유럽의 학문적 기반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라든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이 독살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을 술을 마시고 과로사한 것이라는 스스로의 진술,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기 위하여 식초를 사용하여 바위를 녹인 대목을 당시에는 식초가 없었다는 본인의 진술을 소개함으로써 당시 학문에 대한 그의 의심을 잘 이야기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스위프트의 비판과 풍자는 걸리버가 마지막으로 경험한 '후이늠국(말의 나라)'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사실 이곳은 앞선 나라들과는 달리 동물인 '말'이 주체이고, 오히려 걸리버를 그곳에서 짐승처럼 취급되는 '야후'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이전에는 비록 신체적인 부분 또는 관심사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인간과 같은 존재의 입을 빌어서 비판이 이루어졌지만, 이번에는 아예 동물의 관점에서 인간을 논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후이늠(말)'과의 대화를 통하여 걸리버는 이전의 모험과 달리 커다란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경험하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동안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 스스로에 대하여 들여다 봤지만, 이제는 '말'을 통하여 자연의 관점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바라보기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걸리버는 '후이늠'과의 관계를 인간인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과 대화를 하면서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그들과 이야기할수록 오히려 인간의 존재가 더욱 작아지고 있음을 이내 깨닫게 된다. 인간이 왜 자연 스스로가 준 것을 숨기라고 가르치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하면서 타고난 야만성보다 정신적 능력의 타락이 더 나쁘다고 지적하는 '후이늠'에게 오히려 걸리버가 감화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과 정반대 지점에 있는 저 훌륭한 네발 동물의 많은 미덕으로 인해 나는 진정한 지혜에 눈을 떴고 이해력도 넓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무척 다른 관점으로 인간의 행동과 감정을 보기 시작했고, 동족의 명예는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p. 315 中에서 -
걸리버의 이러한 심경 변화는 기존과 달리 '후이늠국'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됨은 물론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온 그가 인간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말을 구입하여 그들을 애지중지하는 인간 기준에서는 지극히 이상한 모습으로 간주되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그간 모르고 있던 것들을 새롭게 배우면서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걸리버 여행기]의 원전 역시 그러한 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책이 아닌가 싶다. 어렸을 때 마주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서, 또 새롭게 알게 된 이 책의 의미를 통하여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곱씹어 볼 수 있는 스위프트가 말하고자 한 다양한 의미를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 그러한 것을 깨우치기에는 한계가 있다. '린달리노(Lindalino)'라는 작품 속의 지명이 그 안에 '린(Lin)'이라는 단어가 두 번 들어감으로써 실제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Dublin)'을 상징하고 있음을 주석없이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의 대부분의 풍자가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도 [걸리버 여행기]를 마냥 이야기로만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도 그렇다.
따라서 현대지성에서 출간한 [걸리버 여행기]는 풍부한 주석과 함께 조너선 스위프트 본인의 삶에 대한 내용은 물론 그의 삶의 전후에 대한 영국과 유럽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원전에 도전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이야기만으로도 분명 재미는 있겠지만, 조너선 스위프트는 이 책이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화나게 만들려고 한 것이라는 말처럼 이야기에 가려진 그 본질의 이해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에 담겨져 있는 인간 사회에 대한 부조리는 물론 인간 자체에 대한 비판의 요소는 지금 다시 보아도 그의 말처럼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백년이 지난 이 시점에 조너선 스위프트가 비판하고자 한 부분이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점은 우리로서는 분명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기에 이 책의 내용이 더욱 와닿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