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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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리뷰 총점 9.0 (5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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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일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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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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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나쓰메 소세키를 이제야 읽다 평점10점 | g******1 | 2015.05.31 리뷰제목
책을 사 놓고 오래도록 못읽은 이래, 얼마 전 행사 때 구입한 열린책들 세계문학 이북 전집에 포함되어 중복적으로 구매한 것을 알고 나서야, 팔을 걷어 부치고 읽었다. 그동안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미루고 있었던 이유는 1906년에 발표된 근대소설이라는 선입견 속에 고루하고 지루한 자연주의 혹은 사실주의 류의 소설이 연상되었고, 엄청나게 두꺼운 텍스트의 양 때문이기도 했
리뷰제목

책을 사 놓고 오래도록 못읽은 이래, 얼마 전 행사 때 구입한 열린책들 세계문학 이북 전집에 포함되어 중복적으로 구매한 것을 알고 나서야, 팔을 걷어 부치고 읽었다. 그동안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미루고 있었던 이유는 1906년에 발표된 근대소설이라는 선입견 속에 고루하고 지루한 자연주의 혹은 사실주의 류의 소설이 연상되었고, 엄청나게 두꺼운 텍스트의 양 때문이기도 했다. 종이 책의 페이지 수가 464로 조금 두꺼운 편에 속하지만, 행간과 자간을 아끼고 종이 여백도  거의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기 때문에 요즘 띄엄띄엄 글씨를 헐렁하게 배열해서 나오는 책들에 비하면 읽어내야 할 텍스트의 양이  엄청나게 많다. 


첫 페이지를 읽고, 그 다음 몇 페이지를 계속 넘기면서 들었던 생각은, 다르다 라는 것이었다. 선입견과의 차이는 그렇다고 쳐도 기존(에 내가 읽은)의 문학작품과도 확연히 차이가 나는 이 소설을 이제서라도 읽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문체와 구성과 시점 모든 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대해왔던 소설의 구성과 형식을 따르지 않았고, 대화와 문장 역시 위트와 유모가 철철 흘러 넘친다.  대화는 진지한데, 읽는 이는 낄낄거리다 못해 캑캑거리면서 읽게 되는 묘한 재미를 제공하는 이 책이 1906년도에 쓰여진 데다가, 나쓰메 소세끼의 데뷰작이라고 하니 더욱 믿어지지 않는다. 작품해설을 보니, 원래 소설로 생각하고 쓴 글이 아니라 우연히 문학 모임에 게재한 1장이 글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2년여동안에 걸쳐 연재된 글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소설적인 드라마나 커다란 사건 없이, 그저 하릴없는 고양이가 집안을 관찰하며 드나드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옮겨적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소설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화자는 대개 주인공 혹은 주인공을 관찰하는 작중 인물이거나, 신적 위치에 있는 작가 자신이다. 소설의 시점은 어떤 1인칭 시점인지 전지적 작가 혹은 3인칭 시점인지에 따라서 작중 인물의 내면 세계를 얼마나 깊이있고 섬세하게 표현하는지, 혹은 이야기 전체의 구조를 얼마나 객관적으로 투명하게 독자에게 보여주는지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파괴적인 소설적 구성과 이야기 전달 방법이라는 첫번째 점으로 고양이 관찰자 시점이라는 점을 가장 첫번째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일반적인 1인칭 관찰자 시점이지만, 그 관찰자가 인간이 아닌 고양이이며, 게다가 그 고양이 관찰자 시점이 점점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변환해 가는 시점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처음에는 한 어리석은 고양이가, 저 인간이 왜 저러는가 이해하지 못하고 고양이 관점에서 관찰만 하다가, 나중에는 주인의 생각과 회상 같은 것들을 읽어 전달해주는 것이다. 이 고양이가 참으로 가소롭게도 고양이 주제에 인간의 내면을 읽어낼 뿐 아니라, 주인 및 주변 인물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여 이면의 심리를 분석하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고양이가 등장 인물들에게 공감하거나 대변한다는 것은 아니다. 고양이는 어디까지나 고양이, 냉소적이고 뻔뻔하며 자기 위주의 고양이는 자신의 그런 특징들이 자기 밥을 주고 빌어 붙어 먹고 사는 주인집과 닮은 점이 많기에 자신의 그 냉소적 눈으로 바라본 주인을 독자에게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작가들이 작품 내에서 의도적으로 시점을 이리저리 다양하게 처리하는 것을 하나의 트릭으로 사용하는 점은 자주 눈에 띄지만 이 때는 1900년대 초,  이 때라면 내가 이해하기로는 서양 문화가 무분별하게 들어와서 일본식으로 확실하게 자리잡기도 전이 아닌가.  고양이의 눈을 통해 해학과 풍자로서 당시 지식인들의 허세를 꼬집고, 웃음과 지식을 동시에 선사한 소세키의 산문 형태의 소설 연재가 어째서 발표와 동시에 2년을 연장할 정도의 인기를 끌었으며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는지 이해가 된다. 

 

 처음엔 이름없는 고양이의 고양이로서의 처지와 고양이 관점에서 구샤미라는 이름의 주인과 그 가족, 이웃을 바라보는 단순한 관찰자 입장에서 시작한다.  이름없이 버려질 뻔한 고양이는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극진한 보호를 받거나 귀여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몇 번이나 목덜미를 잡혀 내버려진 고양이 스스로 억척스럽게 먹고 살 작정으로 다시 들어오기를 반복하여 그 집에 눌러살게 된 것이다. 고양이 눈에 비친 주인은 실제로 구샤미라는 인물 자체를 객관적 시각으로 보여준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중학교의 영어 선생인 그리스 철학과 한학 등을 줄줄이 꿰는 만큼 높은 학식을 가졌지만 세 딸이과 '마누라'와 함께 겨우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궁핍한 생활을 한다. 고양이 눈에 비친 주인은 못생기고, 싱경질적이고, 소리를 버럭버럭 잘 지르며 다혈질이지만, 막상 중요한 순간에는 꼬리를 내려버리는 소인배이다. 


그 집을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미학자인 친구 메이테이와 제자 간게쓰와의 대화는 코메디 만담 수준이다. 그들은 아슬아슬 서로를 비방하기도 하고, 서로의 경험담을 자랑하듯 늘어놓기도 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구샤미의 집을 들이 닥쳐 이야기 꽃을 피운다.  특히 친구 메이테이는 허풍을 심각하게 늘어놓고 엉뚱한 철학을 그럴싸하게 꾸며대며 구샤미를 속여먹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제집 드나들듯 구샤미집을 들락거리며, 온갖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미래론과 철학 미학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데,  구샤미는 그가 늘 속여먹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 진지하게 속아넘어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예 무시하고 딴전을 부리기도 한다.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등장인물들의 만담에 가까운 해학적 대화이다.  심오한 철학과 예술, 역사에서부터 주변 인물의 험담까지 그들의 주제는 무궁무진하고, 그 광활한 주제들은 정말로 두서없이 이리저리 옆길로 뒷길로 앞길로 샛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마치 정교하게 짜여진 개그 콘서트를 보는 듯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다보면 거기에는 의미심장한 진짜 철학들이 숨어서 뒤통수를 친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지식인들의 유쾌한 대화, 그리고 민속학적 가치가 살아있는 1906년대 일본의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가 그 삶의 엉뚱하고도 진지한 모습들을 관찰하는 느낌이었다.


10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0 댓글 18
종이책 이름만으로 판단하지 말라-나쓰메 소세키 평점10점 | j******1 | 2010.05.27 리뷰제목
처음 일본소설을 접한 건 91년 하루키를 읽으면서부터다. 신문 광고란에서 그 유명한 문구,    봄날의 아기 곰을 껴안고 뒹구는 만큼 너를 사랑해(오래되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라는 구절을 보고 일본문학의 세계에 빠져 들게 되었다. 그 때 광고 속에 인용된 책의 표현들은 여지껏 한번도 접한 적이 없는 문장들이었다. 그리고 언어란, 인간의 감정을 이렇게 손에 느껴지도
리뷰제목

 처음 일본소설을 접한 건 91년 하루키를 읽으면서부터다. 신문 광고란에서 그 유명한 문구,

 

 봄날의 아기 곰을 껴안고 뒹구는 만큼 너를 사랑해(오래되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라는 구절을 보고 일본문학의 세계에 빠져 들게 되었다. 그 때 광고 속에 인용된 책의 표현들은 여지껏 한번도 접한 적이 없는 문장들이었다. 그리고 언어란, 인간의 감정을 이렇게 손에 느껴지도록 할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느꼈었다.

 

 분명 책도 인간처럼 나와의 인연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소개로, 혹은 우연치 않게, 더러는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운명처럼 친해지는 경우가 있듯, 책 역시 그러하다.

  

 지금은 빛이 많이 바랬지만, 내게 있어 하루키는 그런 면에서 운명에 가까운 만남이었다. 이십대의 그 시절, 나의 감수성을 현실과 타협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으며,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처음 주었고, 어떤 식으로든 청춘(청춘의 생물학적 나이를 이십대로 봤을 때)의 끝을 함께한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노르웨이의 숲, 댄스 댄스 댄스, 양을 둘러싼 모험, 스프트니크의 연인, 렉싱턴의 유령,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태엽감는 새, 먼 북소리등, 소설부터 수필집까지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나는 이십대의 대분분을 보냈었다(지금이야 하루키가 보통명사가 됐지만, 이십년 전만해도 그렇게 유명한 작가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만 알고있는 그런 작가였다. 해서 하루키를 좋아한다면 묘하게 동류의식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소설에는 공감이 있었다. 세상에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인간은 너뿐만이 아니라고, 역경을 헤쳐나가 강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인간도 충분히 멋지다고 위로해줬기 때문이었다. 젊었었고, 젊은 만큼 상처받던 시절이었으니까 위로만큼 인생에 힘이 되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책은 거의 읽지 않는다. 지금도 그의 신간이 나오면 사기는 하지만 예전만큼 감동하지도 않는다. 공감만으로 위로받기에는 세상을 조금 알아버린 탓일게다. 나이가 들 수록 공감보다는 구원이 더 절실한 법이니까(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경우가 그렇다는 얘기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나의 일본소설 섭렵기는 아베 코보, 오에 겐자부로(너무 어려워서 읽어 낸 자신이 대견스러울 뿐이다), 미시마 유키오, 마루야마 겐지(그나마 납장미는 소설구조라도 가지고 있었다^^;), 미야베 미유키, 마츠모토 세이초, 아사다 지로, 다니자키 준이치로, 다자이 오사무등 장르를 불문하고 읽게 되었다. 하지만 그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도 여지껏 읽지 않은 작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나쓰메 소세키다(언제나처럼 오늘도 서두가 길었다).

 

 만약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을 읽지 않았다면, 어쩌면 소세키의 책은 평생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민하는 힘을 읽으면 소세키의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도서관이나 웹서핑에서 대충 훑어 보고 지나 가기는 했지만 한 번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도 없기 때문이다.

 일단 일본의 국민작가라는 타이틀도 부담스럽고(도대체 그런 호칭은 누가, 어떤 자격으로 붙이는 것이냐?) 100년전의 작가라 꼭 춘원 이광수의 느낌이 나서 왠지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선입관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이래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편견과 선입관을 깨면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강상중의 책이 워낙 좋았던 탓에, 또 자신의 생각이 소세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기에 작심하고 소세키를 읽기 시작했다. 길 위의 생, 그 후, 도련님, 마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순이었다(문, 몽십야, 유리문 안에서는 아직 읽지 않았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흐음~. 이거 정말 국민작가라 할만한 걸.

 

소세키는 짧은 활동기간에 비해서는 꾸준히 작품을 썼다고 생각되는데, 아마도 신문연재를 주로 썼기 때문일 것이다. 소세키 소설의 특징은 묘사가 많지 않고 지극히 담담한 서술, 그리고 문학적 기교를 버리고 쓴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쉬운 문체여서 오히려 감동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묘사와 근대사회에서 인간의 삶을 꿰뚫어 보는 해안에 놀라게 된다. 무려 백년 전, 근대 사회가 시작될 때, 이미 인간의 고독과 소외를 예측했다는 점, 그리고 현대의 시점에서도 전혀 그 관점이 낡아보이지 않고 충분히 수긍이 간다는 점에, 문학이란 단순이 허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관통하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감동했거나 수긍했던 문장들은 아래와 같다.

 

 

 

부르주아 청년 다이스케가 친구의 아내인 미치요를 선택하면서 얘기는 끝난다. 하지만 나는 연애소설의 틀을 빌렸을 뿐, 인간과 사회의 메울 수 없는 거리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일본은 서양에 빚을 얻지 않으면 도저히 꾸려갈 수 없는 나라야. 그러면서도 선진국이라고 자처하고 있지. 그러고는 어떻게든 선진국 대열에 끼려고 하고 있어. 그러니 모든 방면에 걸쳐서 깊이보다는 넓이를 확장해 선진국처럼 벌려놓은 거야. 무리하게 벌려놓았기 때문에 더욱 비참한거야. 소와 경쟁을 하는 개구리처럼 이제 곧 배가 터지고 말 거야. 그 영향은 전부 우리들 개인에게 미치게 될 터이니 두고 보게나. 이렇게 서양의 압박을 받고 있는 국민은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으니 일다운 일을 할 수가 없지. 모두 빡빡하게 짜인 교육을 받고, 그러고 나면 눈 돌릴 틈도 없을 정도로 혹사를 당하니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신경 쇠약에 걸리게 되지. 한번 이야기를 시켜보게나. 모두 바보일 터이니. 자신의 일과 자신의 현재, 아니 눈 앞의 일 외에는 아무 생각도 없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한 상태이니 어쩔 수 없긴 해. 정신적인 피로와 신체적인 쇠약은 불행하게도 항상 붙어다니는 법이니까.

(한국으로 단어를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나는 고등학교가 정말 싫었다. 주위의 친구들 중에는 고등학교가 제일 재밌었다고 말들하지만, 나는 지금도 꿈에 고등학교가 나오면 식은 땀부터 흘린다. 3년 내내 찾지 못했던 것이,

 

 도대체 왜, 도시락을 두개나 싸서 새벽부터 밤까지 학교에 있어야 하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물론 선생들은(직업이 선생이나 목사, 신부, 스님이라는 이유로 내가 존중해야 될 이유가 뭐 있는가? 인간은 자신의 위치와 상관없이 그 자신의 인격으로 존경받아야 하는 것이다) 너희 자신을 위해서라고 했다. 현실적으로 말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차, 이쁜 마누라, 뭐 이런 것들, 그러니까 삼년만 고생하면 다른 건 다 가질 수 있다는 식으로 학생들을 몰아갔었다. 마치 양치기 개 한마리가 수백마리의 양을 우리에 넣듯이.

 

 우리나라의 교육이 어쩌고 저쩌고 할 생각은 없다. 단지 나는 그런 생활이 싫었다. 싸인, 코싸인인 따위는 관심도 없었고, 미국애들이 쓰는 언어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건 학교에서 강제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고? 아마 동물원 원숭이의 출,퇴근 시간도 나보다는 나았을테니까.

 

 그래서 줄곧 수업시간엔 공상만 했더랬다. 빨간머리 앤처럼 아마 별의별 상상은 다했을 거다.

 

심지어는 스머프가 지구를 정복해서 고등학교 따위는 없애고 스머프 딸기나 따러다니는 상상까지.

 

그리고 야자시간이면 엉뚱한 책만 읽었다. 쇼펜하우어, 소크라데스, 공자, 불경, 성경, 고전, 역사, 철학 등등. 시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책이었다. 하지만 나의 인생에는 중요한 책들이었다. 내가 여지껏 어떤 식으로든 삶에서 버텨왔다면 그것은 전부 그시절 읽은 책 때문이었지, 절대 싸인, 코싸인이나 미국애들 언어 때문은 아니었다(쓸모없다까지는 아니지만 중요성이 과장됐다고는 생각한다).

 

 물론 사회적으로 나는 낙오자다. 명문대도 나오지 않았고, 대기업에 다닌 적도 없으며(허! 파트타임으로 일 한 적이 있다. 영광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다^^;) 강남에 큰 평수의 아파트도 없으니까.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무슨 무슨 아파트에 살아야만 다른 사람 앞에서 어깨를 펼수있는 빈약한 사고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친구가 외제차나 명품을 샀다고 해서 부러워 하는 사람도 아니다. 정치를 터부시 하는 것이 지식인인 양 착각하는 바보도 아니고, 대학에서 전공공부 좀 한 것으로 단순지식인과 교양인(혹은 인텔리)을 구별 못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언론도 기자나 데스크의 사견일 뿐이라 생각하며, 보도되거나 방송되는 것을 비판할만한 능력은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나의 모든 방식 중에 기성교육이 나에게 준 게 있었던가?

 

 설마? 공부 안한다고 매 맞은 게 전부다. 아마 서커스단의 불곰도 나만큼 맞지는 않았을 거다. 혹은 불곰도 그만큼 맞았으면 서울대를 갔을 지도 모르고(맞다. 나 바보다^^;)

 

 그렇게 사회는 끊임없이, 모난 돌이 정맞는 다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이나 가라고 했다. 당연하다. 근대사회(우리나라는 현대사회가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에서는 머슴을 생산해 내는 것이 목표지 시민을 생산하는 게 목표가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소세키는 사람과 일이 어떤 관계로 진행될지 예측한다.

 

-요컨데 먹고살기 위한 직업에는 성실하게 메달리기가 어렵다는 얘기지.

-내 생각과는 정반대로구만. 먹고살기 위해서니까 맹렬하게 일할 생각이 일지 않을까?

-맹렬히 일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성실히 일하기는 힘들지.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면 먹고사는 것과 일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목적이라고 생각하나?

-물론 먹고사는 쪽이지

-그것 봐. 먹고사는 것이 목적이고 일하는 것이 방편이라면, 먹고살기 쉽게 일하는 방법을 맞추어갈 것이 뻔하지 않겠나? 그러면 무슨 일을 하든 개의치 않고 그저 빵을 얻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노동의 내용이나 방향 내지는 순서가 다른 것이 간섭을 받게 된다면 그러한 노동은 타락한 노동이라 할 수 있지.

 

 그 후에 대한 소감은 강상중과 좀 다른 생각이었다. 삼각관계에 대한 소설이 아니라는 데는 나도 공감이다. 절대 삼각관계 따위를 이야기 하려고 쓴 소설같지는 않다. 중요한 내용도 아니고.  하지만 그래도 일은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강상중의 결론에는 찬성할 수 없었다.

 

 나는, 일은 하지 않는 인생이 제대로 된 인생이나 , 현대의 삶 자체가 그것이 돈 때문이건, 사랑 때문이건, 이유야 어찌되었건, 인간이 일을 할 수 밖에 없게 구조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앞의 이유들 때문에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삶의 모순을 한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소세키도 생계를 위한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교수 자리도 물리치고 소설가가 됐겠지.

 

 현대는 셀러리맨의 시대다. 물론 셀러리맨은 좋은 것이다. 자신의 정당한 노동행위로 댓가를 받아 삶을 영위하니까. 하지만 지금의 셀러리맨이 진정한 셀러리맨일까? 쥐꼬리만한 안정에 무한한 자유를 팔아서 무한한 잉여생산에 무한히 소모되고 있지는 않는가? 쓸모가 다하면 구고조정이란 이름으로 정리하고, 또 그 비슷한 교육을 받은(도대체 공장에서 찍어내는 나사와 뭐가 다른가?) 다른 누군가로 대체하는 사회.

 

 우리는 기업의 목적이 이윤추구라고 배웠다. 그러면 그 이윤추구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사장과 이사진, 주주들의 배를 더 불리며 그네들의 무한한 향락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직장인과 사회를 위해 보다 나은  복지사회가 목표인 이윤추구인가? 적어도 지금은, 후자는 아닐 것이다(아마 앞으로도. 고양이에게 생선을 맏겨두고 먹지 마라고 하면 배가 불러 터져 죽을 지경인 놈을 제외하고 먹지 않을 놈이 있겠는가? 하물며 자본은 절대 배가 불러터지지도 않는다).

 

 소세키는 그 후의 다이스케를 통해 근대사회의 맹점을 예측했다. 무한 생산과 무한소비, 그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한도 끝도 없이 희생되어 갈 거라는 걸. 1%도 되지않는 성공확률에 대다수의 인간이 자신만큼은 올라가리라는 착각 속에서 끊임없이 소모되어 갈 것임을.  그리고 속물같은 인간들이 대량생산되어 나오리라는 것도.

 

 예전에 회장님 말씀 한마디에 아침형 인간이 유행할 때가 있었다. 일찍 출근하고(그 회사 사람들, 아침 밥이나 제대로 먹고 다녔을까?) 일찍 퇴근해서 자기개발한다고 대개가 영어학원을 다니거나 혹은 다녀야 했던 그 시절. 한참 그런 열풍이 불고 있을 때 그 회사 부장급과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술자리에서 회사사가(? -혼자만 그 회사 사람이었다)를 부르며 자기는 OO맨이라고 자랑스러워 하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제길! OO이 니꺼야   OOO꺼지

 

 그런 아침형 인간 열풍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 회사 사람들의 공부가 정말 자신을 위한 공부일까 하고. 회장님도 말씀하지지 않았던가?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자기개발을 하라고. 아니 도대체 누구를 위한 자기개발인 걸까? 결국 인당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인간을 만들겠다는 건데, 그러기 위해 말이 좋아 퇴근이지 여가시간까지 회사에 바치라는 것 아닌가? 결국 회사원이란 그런 것이다. 좀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또 가족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결국에는 가족이 볼모가 되어, 돈과 휴가 일수에, 자신의 삶이 회사에 뺏기고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니 네이버 검색 순위 상위는 항상 스포츠기사가 대부분이고(스포츠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즐길게 스포츠 밖에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뿐) 소세키의 말마따나 입만 열면 바보들이 천지로 양산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이 자신이 아닌 외적인 것으로 자신을 나타낸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후진적이라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OO학교를 나오고 OO회사를 다니며 OO 아파트에 산다는 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는 건 자유다. 우리사회의 교육이 그런 식의 인간으로 크게 끔 만들어져 있으며, 우리사회의 의식이 돈만을 숭배하게끔 흘러가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나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속물로 살 권리도 분명 있는 거고 속물로 사는 것이 좋다면 속물로 살아도 된다. 단지 속물이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 뿐.

 

 아무튼 이런 내용들을 포함해 써져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예전같으면 좋은 교육을 받고 일도 안하면(다이스케같은) 인간말종이라고 생각했을텐데 요즘은 이전의 사고들을 처음부터 다시 점검해 보게 된다(내가 생각하는 나의 생각이 반드시 나의 생각은 아니라는, 교육이라는 세뇌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홍세화의 말처럼).

 

 노동은 신성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정말 노동은 신성한 걸까? 그렇게 신성하고 좋은 거면 왜 부자들은 노동을 하지 않는 거지? 정말 노동은 밥벌이 외에 자아발견이나 성취에 도움을 주는 것일까? 사실 노동은 그냥 힘든 거잖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지 않는가? 돈과 상관없는 노동이야말로, 레저, 유흥, 쾌락, 예술등 물질적 생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 신성한 것 아닐까? 우리는 노동이 신성하다는 명목하에 끊임없이 일하라는 요구만 받아왔다. 잉여생산을 위해 가족과, 시간과, 육체를 헤쳐가면서. 정말 직장이 좋아 죽을 것 같아서 다니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자본이 만들어낸 허상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닐까? 회사에  모든 시간을 희생해 가며(혹은 강요받으며) 살다가 며칠 외국에 휴가갔다 오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는 그런 인생, 지배계급에 받은 스트레스를 직급 낮은 이들에게, 그리고 나 보다 외형적으로 못사는 친구들에게, 차와 아파트와 명품에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껍데기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 반대의 경우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흔히 말하듯 그게 인생이지 않겠는가? 뭐 나도 완전한 복지사회 말고는 대안도 없다(혹은 어느날 엄청난 부자가 사실은 내가 니 애비다, 라며  찾아오는 것 외에는)

 

아무튼 소세키는 현대인이 그렇게 소외되고 사회로부터 강요받으며 살게되리라는 것을 아주 실감나게 소설에 적고 있는 것이다.(물론 소설 내용의 일부일 뿐이고 훨씬 다양한 인간군상과 사고관이 소설 전반에 걸쳐 펼쳐진다)

 

 

나와 선생님과 그리고 아주 약간 부모님과 얽힌 이야기

(스포일러 있음. 도대체 서울대 권장도서인데 뭐 어쩌라는 것이냐?)

 

 나는 그분을 을 선생님이라불렀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그냥 선생님이라고 쓰고 본명은 밝히지 않겠다. 이것은 세간의 이목을 의식해서라기보가 나에게는 그 편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금방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펜을 들어도 그 마음은 마찬가지다. 어색한 머리글자 따위는 도무지 사용하고 싶지 않다.

 

 마음은 첫문장의 힘으로 끝까지 읽은 경우다. 처음부터 끝까지 위의 문장과 같은 문체의 힘을 가지고 밀고 나간다. 멋을 부리지 않은 자연스런 멋이 있다고 할까? 억지스럽지 않고 담담하면서도 단아한 힘으로 끌고 간다. 내용이 크게 굴곡이 있는 것도 아니다(소세키의 소설이 대개 그렇지만).

 하지만 도덕이나 체면에 얽메이지 않고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의 감정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혹은 냉정하게 묘사되어 있는 면이 아주 좋았다. 앞부분 선생과 나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생의 유서(뭐 책의 결말은 다 알려져 있는 거니까) 부분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정도로 자살을 할 거면 아마 지구상에 사람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은데...... 일본 사소설을 좋아하면서도 유일하게 와닿지 않는 게 자살부분인데, 다자이 오사무를 썩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좋아는 하지만) 그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은 문체가 비슷하다. 전반기의 소세키는 풍자적인(읽어보면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라는 말이 착, 하고 감겨온다) 소설을 주로 썼는데 두 소설의 문체가 상당히 비슷하다. 사실 대개의 소설가들이 죽을 때까지 자신만의 문체를 갖기도 힘든데 소세키는 작품마다 다른 장르와 문체를 구사하니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작가로 평가할 수 있다.

 

 도련님은 소품에 가까운 것 같고, 역시 소세키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작품은, 최초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같다. 후반의 소세키 작품이 암울함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면 고양이는 해학과 풍자만으로 이끌어 가는 아주 밝은 소설이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전혀 모른다. 어두컴컴하고 눅눅한 곳에서 야옹야옹 울고 있었던 것만 기억한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 인간이란 것을 보았다. 나중에 듣자 하니 그 인간이 서생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영악한 종족이라고 한다. 이 서생이란 자가 때로 우리를 붙잡아 삶아 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무섭지도 않았다.......이른바 인간이라는 것과의 첫 만남이었다.

 

 고양이에는 일정한 줄거리가 없다. 그저 고양이가 구샤미 선생집에 얹혀 살면서 일어나는 일화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고양이의 눈으로 묘사한 인간군상들의 모습이 아주 유머러스하게 펼쳐지고, 재미있는 문체가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단숨에 읽게 만든다. 게다가 물항아리에 빠진 고양이의 마지막 묘사는 자못 도(道)에 도달한 기분까지 들게 한다.

 

-이제 그만두자. 될대로 되어도 상관없다. 삐직삐직 긁어 대는 일은 이제 그만하자.

 앞발도 뒷발도 머리도 꼬리도, 자연의 힘에 맡기고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점차 편해진다.

 고통스러운 것인지 다행스러운 것인지 모르겠다.

 물속에 있는 것인지 다다미 위에 있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간다.

 어디에 어떻게 있든 차이가 없다.

 다만 편할 뿐이다.

 아니 편하다는 느낌조차 없다.

 세월을 베어 버리고, 천지를 갈가리 부수어 신비의 평온함으로 들어간다.

 나는 죽는다. 죽어 이 평온함을 얻는다.

 평온함은 죽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기쁜지고 기쁜지고.

 

 다른 건 모르겠고, 이 긴 포스트를 끝냈다고 생각하니

 기쁜지고, 기쁜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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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나쓰메 소세키 평점10점 | q****e | 2010.08.05 리뷰제목
吾輩は猫である :: 夏目 漱石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세모" 라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다른 형제들과 길거리에 버려진 후에 어떤 고양이 아줌마한테 젖동냥을 받아 크다가 생후 2개월 무렵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입양' 을 왔다. 그게 2005년도의 일이고, 올해로 나는 다섯살이 되었다. 사람 나이로 치면 서른 여섯살쯤 된다. 그래도 내가 이 집의 제일 '어른' 은 아니다. 정확한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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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輩は猫である :: 夏目 漱石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세모" 라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다른 형제들과 길거리에 버려진 후에 어떤 고양이 아줌마한테 젖동냥을 받아 크다가 생후 2개월 무렵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입양' 을 왔다. 그게 2005년도의 일이고, 올해로 나는 다섯살이 되었다. 사람 나이로 치면 서른 여섯살쯤 된다. 그래도 내가 이 집의 제일 '어른' 은 아니다. 정확한 나이는 자기도 모른다지만, 대략 여덟살쯤 된 하록이형이 있다. 길거리 생활을 오래 한 하록형은 어느 겨울날 갑자기 사람들한테 붙잡혀 '땅콩 수술' 을 받고 귀를 뚫어 커다란 집게를 달아 놓은 채로 다시 거리로 풀려났댄다. 근데 그게 너무 아파서 밥 구하러도 못가고 5일 동안 나무 밑에서 추위만 간신히 피하고 있었더니 근처의 노점상 아줌마가 안쓰럽게 보았는지 집게도 떼어주고 지금 이 곳으로 입양도 보내주었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렇게 잡아다가 '땅콩 수술' 을 시키는 걸 'TNR' 이라고 한다. 우리 고양이들이 번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중성화' 를 시키는 것이다. (나도 8개월쯤 되어서 받았다.) 그리고 그 수술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 집게를 다는 것이라는데, 그게 얼마나 아픈지 그 인간들은 생각도 못했나보다. 듣자하니 어떤 고양이는 그게 너무 괴로워서 떼어 내려다가 아예 귀 한쪽이 뜯겨 버렸댄다. 요즘은 그게 잘못된 것이라고 깨달았는지 다시는 안한다지만(대신 수술한 고양이를 가려내기 위해 귀끝을 조금 잘라낸다고 한다.) 나는 그때 하록형의 말을 듣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일찌감치 알아버려 다행이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이 집에서 사는 5년 동안 우리 말고도 열댓 마리의 고양이들이 거쳐갔는데, 대부분 인간에 의해 어디가 상하거나 불구가 되버린 아이들이었다. 그중 여섯 마리가 죽고 세 마리는 다른 집으로 입양가고, 남은 아홉 마리. 즉 우리까지 총 열 한마리가 지금 안방을 차지하고 복작복작 살고 있는데, 한 녀석 한 녀석마다 사연이 기구하다. 온몸이 썩어 발가락이 저절로 떨어져 나갈 정도의 상태에서 발견된 구구, 태어날 때부터 안구가 없거나 백내장으로 어미에게도 버림 받은 조제, 제제, 페페 같은 장님 고양이들, 어느 미친 인간의 장난질로 다리 한쪽이 썩어 잘라낼 수 밖에 없었던 세발이 도도, 사람의 학대로 트라우마에 시달려 너무 낯을 가리는 바람에 고양이 보호소에서도 입양을 못간 메텔, 임신한 채로 안락사를 시키려 했던 나나, 역시 임신한 상태로 사람한테 걷어차여 사산하고 자궁 이상으로 큰 수술을 받았다는 마마 누나, 그리고 차에 치인건지 어쩐건지 얼굴 반쪽이 거의 날아가서 성형 수술만 세 번을 받아 평생 일그러진 얼굴로 살아야 하는 토토... 이게 다 지 잘났다는 인간들이 우리 고양이들에게 한 짓이다.

이런 아이들은 못생기고 나이 들고 불구자라 정상 고양이와 다를 거란 편견 때문에 선뜻 입양해 가려는 이도 별로 없다. 우리집에 와서 장님 고양이들이 화장실도 실수 없이 가리고, 어느 곳이나 잘 올라갔다 내려오고, 세발이 도도가 누구보다도 빨리 뛴다는 걸 보면 생각이 바뀔까. 우리를 돌봐주는 엄마 아빠의 말로는 "그래도 사람들은 예쁘게 생긴 고양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며 슬픈 모습으로 웃었다. 특히 우수한 품종의 몸값 비싼 고양이들을 많이들 선호한다는데, 나 자신도 고양이지만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품종이 달라봤자 고양이가 다 거기서 거긴데,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그런 고양이들도 나이 들어 못나지고 귀찮아지면 버리는 일이 허다하댄다. 우리가 무슨 장난감이나 인형 같은 거냔 말이다!

하기사, 뭐 여기 이 나라 이 땅에선 고양이를 좋아하고 키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길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 잘은 모르지만, 하록형이나 마마 누나의 얘기를 들어보면 길고양이 생활이라는 건 그야말로 하루 하루 목숨을 건 전투와도 같다. 일단 늘 굶다시피 지내다보니 먹고 싶어 먹는 게 아니더라도 쓰레기를 뒤질 수 밖에 없는데, 그것 좀 풀어 헤쳐 먹었다고 막대기로 때려 죽이거나 아예 독약을 풀어 놓기도 해서 그조차도 쉽게 먹을 수가 없댄다. 가끔 마음 좋은 사람들이 사료나 생선캔을 가져다주기도 하는데, 그 사람들도 그 악마같은 인간들에게 욕을 먹거나 해꼬지 당하는 일이 많아서 인적 없을 때 몰래 가져다 주거나 아님 아예 주는 걸 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나. 그러니까 우리처럼 구조 되어서 집고양이가 된 경우는 아주 극소수의 행운아일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비참한 생활을 하고 지낸다고 보면 되는거다. 내버려둬도 오래 못살건만, 이곳의 인간들은 우리를 못죽여서 안달이다!

바로 바다 건너 일본이란 나라는 사정이 좀 다르다고 들었다. 거기도 고양이를 괴롭히는 나쁜 인간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고양이를 예뻐하고 귀히 여겨 여기에서처럼 길고양이들이 밥을 못먹거나 학대 받는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고양이가 복을 불러 온다 해서 집집마다 복고양이 인형을 수호신처럼 모신다고 하니, 참 그것만큼은 되먹은 나라이지 싶다. 그네 나라는 요즘만 그런 게 아니고 아주 옛날부터 그랬댄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유명한 소설가는 이미 90여년전쯤에 고양이의 영민함을 알아보고 아예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을 썼다나. 게다가 이 소설은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는 국민 소설이 되었댄다. 참 부러운 일이다.

뭐, 그렇다고 그 소설이 우리 고양이들을 엄청 대단하게 마법이라도 부리는 마냥 써놓은 건 아니다. 대충 보아하니,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 고양이는 이름도 없고 우리보다 형편이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들 속에서 요령좋게 살아간다. 그 작가가 참 똑똑한 게, 인간들은 자기네가 제일 잘난 줄 알지만 고양이 눈으로 봤을 땐 다 별 거 아니다 라고 써놓은 점이다. 인간 눈에는 우리 고양이들이 팔자 좋게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자며 아무 생산성 없는 무위도식하는 동물로 비쳐질지 몰라도, 사실 인간이란 존재도 고양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묘사한 것이다.

나는 그 고양이 주인공처럼 인간보다 고양이가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오만방자하진 않다. 저 소설을 쓴 사람이나 우리를 구해준 사람처럼 똑똑하고 좋은 인간들도 많다는 걸 안다. 우리 중에도 인간을 매우 싫어하고 무서워 하는 애들은 많지만, 그렇다고 보복을 하거나 앙심을 품는 일은 거의 없다. 설령 우리가 그런 앙심을 품는다면 그건 인간들이 먼저 자초한 일이다. 못된 인간들은 우리 고양이란 존재들이 아예 세상에서 없어지길 바라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비록 원래 우리의 영역을 빼앗기고 내몰리는 지경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또 그런 환경에 잘 적응해 살아갈 수 있다. 인간들이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니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둬 달라. 우리 고양이들은 삶을 즐기기 위해 이 세상에 났다. 사람은 그렇지 않은가? 삶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을 질투해서 그렇게나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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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어설픈 말장난과 천박한 현학으로 범벅이 된 책 평점2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x***2 | 2011.12.09 리뷰제목
이 소설의 중간 부분에 보니, 왠 오탄친 팔레오로구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팔레오로구스가 누구인고 하니, 비잔티움 즉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틴 팔레오로구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나쓰메 소세키는 팔레오로구스를 가리켜 시종일관 멍청이나 얼간이를 뜻하는 일본 에도 시대의 속어인 오탄친이라는 말을 붙여서 오탄친 팔레오로구스라고 부른다.
리뷰제목

   이 소설의 중간 부분에 보니, 왠 오탄친 팔레오로구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팔레오로구스가 누구인고 하니, 비잔티움 즉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틴 팔레오로구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나쓰메 소세키는 팔레오로구스를 가리켜 시종일관 멍청이나 얼간이를 뜻하는 일본 에도 시대의 속어인 오탄친이라는 말을 붙여서 오탄친 팔레오로구스라고 부른다.

 

  대체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틴 팔레오로구스가 대체 뭘 얼마나 잘못을 했길래 그보다 4백년 후의 일본인 작가한테 멍청이라고 놀림을 받는지 모르겠다. 백성들을 생각해서 끝내 수도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병사들과 함께 오스만 투르크의 10만 대군과 맞서 장렬하게 항전하다가 전사한 군주인데 말이다.

 

  귀축미영이라고 욕하던 미군한테 패배하니까 나는 아무런 권한도 없었고 신하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비겁한 핑계와 변명을 대면서 책임회피하고 항복해 목숨을 구걸하던 비굴한 일본 임금에 비하면 훨씬 사내답고 영웅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뭐, 이제와서 죽은 나쓰메 소세키를 불러서 왜 그렇게 썼느냐고 따져 물을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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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똑똑하고 재치 넘치는 고양이가 본 100년 전 일본인 평점10점 | j***1 | 2014.02.16 리뷰제목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가하이와 네코데아루~   전부터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우선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기 때문이고-대학 졸업 후 산업예비군이었을 때 내 귀중한 친구였던 귀여운 나비 덕분에-, 또 나쓰메 소세키라는 독특한 어감의 작가의 글을 언젠가는 한 번 읽어보리라 생각했덨기 때문이다.-여러번 잡지에 연재했던 글인 덕에 각 장을 따로따로 읽어도 재미있는데,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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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와가하이와 네코데아루~

 

전부터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우선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기 때문이고-대학 졸업 후 산업예비군이었을 때 내 귀중한 친구였던 귀여운 나비 덕분에-, 또 나쓰메 소세키라는 독특한 어감의 작가의 글을 언젠가는 한 번 읽어보리라 생각했덨기 때문이다.-여러번 잡지에 연재했던 글인 덕에 각 장을 따로따로 읽어도 재미있는데, 한 장을 다읽고 나서 구석에 두었다가 TV 보다 질리면 또 꺼내 읽곤 하면 우리 동*님은 "아니, 아직도 소새낀지 뭔새낀지를 읽고 있는게야?"라고 농을 던졌다. 하하-  그런데도 이제야 읽게 된 것은 혹시 내용이 고루한게 아닐까, 재미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는데 다 읽고 난 지금은 명불허전이 진리임을 실감하고 있다.

 

일본인인 막내 올케에게 간신히 외운 '와가하이와 네코데아루'를 읽고 있다며 재미있다고 했더니 그리 책읽기를 즐기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올케가 "저도 읽어보았어요" 해서 의외라고 느낀 순간, 곧이어 교과서에서 보았다고 한다. 교과서에 나온 맞보기 작품들 중 하나로 몇 페이지 읽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온전한 책으로는 읽지 않았다며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한다. 하긴 어떤 외국인이 이광수의 <무정>을 읽었다고  내게 읽어보았냐고 하면 나 역시 난감한 얼굴로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습니다만.."이라 대답할 수 밖에. 이 책은 지금봐도 너무 재미있어서 백 년 전에 쓴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아, 그리고 제목의 일본어는 상당히 고어투라고 하여, 그냥 일반 일본어로 하면 "와타시와 네코데스"하면 되는 걸 굳이 이렇게 표현한 게 자못 주인을 닮아 살짝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느낌을 표현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로선 구한말에서 강제합방으로 이어지던 시기였고, 일본으로선 메이지 유신 이후 러일전쟁을 거치는 1905년, 지금부터 딱 100년 전의 글이지만 믿을 만한 번역가-김난주-의 적절한 번역에 의해 훌륭하게 살아났다.

 

우연히 학교영어선생네 집에 들어와 살게된 이름도 없는 고양이가 주인과 주인집 식구들, 그리고 주인의 친구와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을 관찰한 이야기가 생동감있고 재미있다. 기꺼이 자신을 고양이의 놀림감으로 제공하는 나쓰메 소세키의 희생정신에 힘입어 몇 안되는 등장인물이 이어가는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게 그려지고 군데군데 빌 브라이슨과는 또다른 유머코드가 넘친다. "주인에게 책이란 읽는 것이 아니라 잠들기 위한 도구, 즉 활판 수면제인 셈이다." 또 인간들이 사치스럽다며 "양에게 폐를 끼치는가하면 누에에게는 신세를 지고 목화밭의 온정까지 구하는 것을 보면 사치는 무능의 결과라고 단언해도 좋을 정도다"라며 일침을 날리는 고양이.  또 이렇게도 말한다. "주인은 무슨 일이든 자신이 모르는 것은 대단하다 여기는 버릇이 있다. 물론 이는 우리 주인에 한하는 버릇은 아닐 것이다."  나름의 사회의식은 관리가 국민위에 군림하는 자세를 꾸짖는 근대의식을 약간 보이는 정도다.

 

글은 조금씩 당시 일본의 모습을 보여준다. 덕분에 쥐 포획을 장려하기 위해 잡은 쥐를 파출소에 가져가면 4, 5전의 교환권을 주었다든가,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서 생활하는 모습까지. 또 한자에서 하이쿠까지, 그리고 서양철학과 문학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보이는 저자의 박학다식함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세계사적으로, 특히 우리나라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러일전쟁을 당시 살던 저자는 그냥 뉴스거리로 밖에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나, 조선에 대한 언급이라곤, "조선에는 인삼도 많다는데" 정도인 것을 보면 내가 역사에 대해 갖고있는 편견이 컸음을 깨닫게 된다. 하긴 우리나라에서 80년대를 살던 대다수의 대학생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자기 취직이나 연애만 신경쓰고 살았던 것 만큼이나 일제 강제합병을 코앞에 둔 시기에  그런 것에 별 신경쓰지 않고 살았던 일본인도 꽤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맨 뒤에 있는 연보를 보니 1909년 9~10월에 만주와 조선을 여행하고 <만한 여기저기>라는 글을 썼다는데 언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쓴 작가가 정작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가족에게 폭력을 쓰기까지 했다는 것을 보면 사람이이야말로 정말 이 책에 나온 고양이 말마따나 참 알 수 없는 존재이자 변덕 그 자체다. 주변을 잘 관찰하고 유머감각이 있어야 쓸 수 있는 작가이자 근대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이 다른 한편에선 아내와 자식에겐 폭력을 쓴, 아무리 신경쇠약이니 뭐니 해도 말이다, 사람이었다니. 

 

나처럼 침대에서 읽다가 옆에 밀쳐두었다가 또 보는 사람들이 마지막 책장을 넘겼을 때도 책 모양이 변하지 않도록 실로 잘 꿰맨 제본이 참 고맙다.

 

오자는 3개. 72쪽, 293쪽, 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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